Descent of the Demon Master RAW novel - Chapter (1933)
마존현세강림기-1935화(1932/2125)
마존현세강림기 78권 (20화)
4장 뒤흔들다 (5)
쇄애애애애액!
발끝에 스친 풀이 면도날에라도 베인 듯 잘려 나간다.
선두에 선 홍왕이 내뿜는 기세가 평소와 다르다. 평소라면 아무리 급 해도 한 줌의 여유를 잃지 않는 사 람이 홍왕이지만, 오늘의 홍왕은 평
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 다.
자국의 주석이 노려지고 있다는 상황 때문에?
‘그럴 리가.’
강진호의 슬쩍 홍왕의 뒷모습을 보고는 고소를 머금었다.
홍왕이란 사람은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자신감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 다.
그리고 강진호뿐 아니라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겠지만, 홍왕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 그는 분명 중원 최고의 무인이자, 중원 최대 무인
세력의 지배자니까.
하지만…….
다른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한 다고 해도 지금의 홍왕은 그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 다.
일련의 패배는 그의 자존심에 깊 은 상처를 남겼을 테니까.
물론 그는 신창과의 일대일 승부 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적의 꼬임에 넘어가 위기를 자초한 것 역시 사실 이다. 강진호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 더라면 지금쯤 홍왕은 산목숨이 아 니었을 터.
자존심이 강한 이일수록 스스로에 게 엄격한 법이다.
겉으로야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만, 홍왕의 내심은 용암처럼 끓어오 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마음이 내뻗는 발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강진호가 슬쩍 고개를 들어 앞쪽 을 바라보았다. 홍왕의 마음은 능히 짐작하지만, 지금은 강진호도 그런 홍왕에게 신경을 써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앞쪽에서 풍겨오는 피 냄새가 점 점 짙어진다.
그들이 우거진 숲을 지나 이어지 는 들판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이……
“망할 새끼들이!”
위긴스와 바토르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피, 그리고 시체.
무인이라면 익숙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똑같은 것도 어떤 상황에서 마주하느냐에 따라 그 느 낌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법.
그들이 아무리 전장의 풍경이 익 숙하다고는 해도 저항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학살당
한, 천에 가까운 시신을 두 눈으로 직면하고도 무덤덤할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심지어 장민의 입에서까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살인이라면 그들도 지겹도록 저질 러 보았다.
만약 지옥이라는 곳이 있다면 이 곳에 있는 이들 중 죽어 지옥을 벗 어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이 광경 에는 학을 떼고 말았다.
“개 같은 놈들이! 달아나는 이들
은 보내줘도 되잖아!”
무인이 아니다.
화기를 쓰는 이들은 십이비도에게 어떠한 피해도 입힐 수 없다. 심지 어 모기조차도 사람의 피부를 뚫고 피를 빨고 가렵게 만들 수 있지만, 이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모기만 한 위협도 줄 수 없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겁에 질려 달아나는 데 굳이 그 등을 노려 살수를 쓸 필요가 있겠는가.
우드드득.
강진호의 시선이 홍왕에게로 향한 다.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리고 있
는 그의 주먹이 부러질 둣 움켜쥐어 진다.
“ 침착해.”
“ 안다.”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목소리만 들으면 냉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강진호의 생 각으로는 저 홍왕의 목소리가 차갑 게 들리는 것 역시 그리 좋은 징조 는 아니었다.
“저쪽이다!”
홍왕이 단호하게 외치고는 앞으로 달린다.
별장을 이루는 정원 주변이 피로
물들어 있다. 정원이라고 부르기보 다는 숲이라고 불러야 할 광활한 구 역 전체가 마치 단풍이라도 든 것처 럼 울긋불긋하다.
단숨에 정원을 뛰어넘어 별장으로 달려가려던 홍왕의 발이 갑자기 멈 췄다.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그가 천 천히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보았 다.
“숨어봐야 소용없다. 나와라.” 일제히 멈춰 선 이들이 홍왕의 시선이 닿은 곳을 바라본다.
우거진 수풀이 느릿하게 흔들린다
싶더니, 그곳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순간, 홍왕의 눈썹이 꿈틀했다.
나타난 사내의 모습이 어쩐지 눈 에 익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한 번…….
“너……
전신을 두른 검은 장포. 그리고 그 장포 안에 보이는 몸은 단 한 군데도 남김없이 시커먼 붕대로 친 친 감겨 있다.
분명 본 적이 있는 모습이다.
“아니, 아니야. 너는 혹왕은 아니 로군.”
과거, 창왕과 강진호가 마지막 전 투를 치를 때, 그곳에 난입한 흑왕 이 딱 저런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하 지만 이자는 혹왕이 아니다.
체형부터 풍기는 분위기까지, 그 가 본 흑왕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보기만 해도 둥골에 전기 가 흐르는 듯한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누구냐?”
붕대로 전신을 두른 이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으며 홍왕을 바라보 았다.
“멍청한 소리를 해 대는군. 아둔
한 놈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말이 야.”
홍왕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당연히 나는 십이비도. 그분의 수 족이다.”
“그걸 몰라 물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텐데?”
“여전히 멍청해.”
붕대로 두른 사내의 입가가 비틀 린다. 딱히 안력이 좋지 않은 자가 아니어도 그게 비웃음이라는 걸 이 해하기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가? 어차
피 싸우고 서로 죽일 텐데 말이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면 답해 주지. 나는 흑비(黑匕)
이름이라 할 만한 것이 들려왔음 에도 홍왕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군.”
“그렇겠지. 이건 흑왕께서 내려주 신 이름이니까.”
“과거, 세상은 나를 혈왕(血王)이 라 불렀지.”
“혈왕?”
그제야 홍왕의 눈빛이 변한다.
분명 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 다.
“혈왕이라……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강진호 가 그 이름에 반응했다.
“지금 여기에 없는 놈이 그 이름 을 들었다면 깜짝 놀랐겠군. 이 세 상에 네 후예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 들을 돕지 않았나?”
“마존이시군.”
흑비가 양손을 가볍게 내밀었다.
분명한 예의의 표현.
“뵙게 되어 영광이군, 마의 지배
자시여. 나 역시 사마(死魔)에 발을 들인 자. 그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오만한 왕에게 예를 표하지 않을 도 리는 없지.”
“후예들은 그저 후예일 뿐이다. 이제 와 내가 그들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나를 따르라 한다면 미친 놈 취급이나 받을 뿐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혈왕이 낮게 웃었다.
“느긋하게 서로 안부를 물어볼 상 황은 아닌 것 같은데. 급하지 않은 가?”
“아니지, 아니지. 어쩌면 댁들도 주석의 목이 떨어지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군. 그럴 의도라면 적당히 내가 시간을 끌어드리지. 면피가 되도록 말이야. 어떤가?”
홍왕이 고개를 돌려 강진호를 바 라보았다.
“먼저 가라, 마왕.”
“이 일은……
“어차피 아래로 가면 일직선이다. 알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나라고 해 서 저 안의 지형을 아는 것도 아니 고, 나라고 해서 대화가 더 잘 통하
는 것도 아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홍왕의 말이 틀리지 않다.
“나도 멍청이는 아니야 적어도.•♦…
홍왕이 고개를 슬쩍 돌려 강진호 와 그의 뒤에 서 있는 이사들을 바 라보았다.
“내 입으로 내뱉기에는 굴욕적인 말이지만, 내가 가는 것보다는 너희 가 가는 쪽이 낫다는 건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다. 대신 마왕.”
홍왕의 눈이 광망을 뿜어냈다.
“비록 다른 세계를 사는 이라고 하나, 그는 이 국가의 수장이다. 반
드시 구해내라.”
“나는 그런 건 관심 없어.”
강진호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 다.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불을 붙 인 그가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주석이니 뭐니, 당장 내 나라의 대통령도 신경 안 쓰는데 주석이 죽 든 말든 그건 딱히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야.”
홍왕이 눈을 찌푸렸다.
이곳까지 달려온 이가 할 만한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강진호의 말은 그런 그의 의문을 해소해 주기에 충
분했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지.”
홍왕이 강진호를 탄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부탁한다.”
“ 가자.”
강진호가 미련을 남기지 않고 앞 으로 달려 나간다. 그러자 그의 뒤 를 따르던 이사들도 일체의 망설임 없이 강진호의 뒤로 따라붙었다.
정원을 순식간에 뛰어넘어 별장까 지 거의 도달한 순간, 바토르가 살
짝 걱정이 되는 듯한 얼굴로 물었 다.
“주인, 괜찮겠는가?”
“뭐가‘?”
“홍왕 말이다.”
그가 슬쩍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자가 정말 그 전설 속의 혈왕이 라면, 아무리 홍왕이라고 해도……
“흐음, 장로가 둘이나 붙어 있잖 습니까?”
위긴스의 물음에 바토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너는 혈왕이 누구인지 몰라
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저 자가 정말 혈왕이고, 그에 대한 전 설이 반의반만 사실이라고 해도…… 장로들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위긴스가 새삼스러운 얼굴로 고개 를 돌려 이미 한참 멀어진 홍왕과 그의 앞에 있는 검은 괴인을 바라보 았다.
“신경 쓸 것 없어.”
“……이길 거라고 믿는 건가?”
“모르지.”
강진호가 심드렁하게 말한다.
“진다면 거기까지일 뿐이야.”
“가서 돕기라도 하게?”
바토르가 침음을 흘린다.
강진호의 말이 맞다. 홍왕이 자신 의 입으로 자기가 맡겠다고 한 이 상, 이건 홍왕의 일이다. 그를 걱정 해 돕겠다고 남는 것은 되레 홍왕을 모독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바토르가 아는 한 홍왕은 모욕을 받아서는 안 되는 이다.
“우리는 우리가 맡은 일부터.”
“알았다!”
별장을 바라보며 일직선으로 달리
던 강진호의 얼굴에 뒤틀린 미소가 피어난다.
‘좋군.’
안에서 뭔 일을 벌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충돌하는 기의 여파가 여기까지 느껴진다. 순간순간 기운 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손끝이 저릿 저릿한 기분이다.
“단번에 돌입한다.”
“알겠다!”
빛살처럼 별장 안으로 뛰어 들어 간 이들이 망설임 없이 나아간다. 시체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 저들이 간 길을 알려주고 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뻥 뚫려 있는 문을 발견한 이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 안으 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 벌써?”
붉은 벽.
아니, 처음에는 분명 새하얗다고 칭해야 옳을 벽이었을 것이다. 하지 만 지금 그 벽은 누군가 홀린 피들 로 더없이 붉게 물들어 있다.
그리고 그 바닥에는 동강동강 잘 려 나간 이들의 시체가 마치 장난감 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이 새끼들……
바토르가 이를 간다.
이전에도 보았지만, 이들의 손속 은 너무도 잔인하다. 쉽게 목숨을 끊어줄 수 있는 이들도 굳이 참혹하 게 죽여 댄다. 무학이란 서로의 목 숨을 빼앗기 위해 존재하는 것. 그 렇기 때문에 오히려 생명에 대한 존 중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다면 살인에 미친 마귀 가 되고 마는 법이니까.
“마존이시여, 이건 아마도……
으 ”
강진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사(銀絲) 다.”
장민이 위긴스를 보며 말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머리카락보 다 얇은 실이 목을 노려 올 거다. 미리 대비해 둬.”
“……그게 가능한 겁니까?”
“조심해 두는 게 좋아. 대비하지 않았다가 마주치자마자 목부터 날아 가지 않으려면.”
“•••알겠습니다.”
위긴스가 몸 주변에 실드를 두른 다.
그 모습을 확인한 강진호가 가라 앉은 눈으로 옆쪽에 보이는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 짙군.’
피 냄새가 코를 찔러올수록 몸 안에서 뭔가가 뒤틀리는 기분이다.
혀로 입술을 한 번 핥은 강진호 의 눈에 계단 아래의 광경이 펼쳐졌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