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ent of the Demon Master RAW novel - Chapter (2009)
마존현세강림기-2011화(2008/2125)
마존현세강림기 81권 (20화)
4장 쏟아붓다 (5)
마스터가 미묘한 시선으로 그의 건너편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백색의 넓은 도포를 걸친 이.
중국 고전풍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 외에는 딱히 특색이랄 게 없는 사내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단 하나.
‘눈이 보이지 않는 건가?’
사내의 두 동공이 우윳빛으로 물 들어 있다는 점. 그게 그가 실명했 기 때문인지, 아니면 특수한 기공을 익힌 탓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 다.
애초에 이만한 수준에 오른 이에 게는 시력이 없다는 점이 움직임의 장애를 초래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사내의 텅 빈 동공이 마스터에게 로 향한다.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마스터는 자신의 몸이 깊은 어딘가 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아야 했다.
“……서양인인가?”
사내의 입에서 깊이 가라앉은 목 소리가 새어 나왔다.
“원탁에서 왔네. 보통은 마스터라 불리지.”
사내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진 다.
“들어본 적 있지. 원탁.”
“그럼 본인의 신분을 밝혀보는 것 은 어떻겠는가?”
“나는 환사(幻士)
“환사라……
뭔가 울림이 좋지 않은 이름이었다. 마스터가 묘한 눈빛으로 환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사람을 외양으로 판단 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겠지만, 그 대는 흑왕 같은 이를 따를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데?”
환사의 투명한 눈빛이 마스터에게 로 쏘아졌다.
“……그저 은혜를 갚는 것뿐이지.”
“은혜? 흑왕에게?”
“아닐세, 서양에서 온 이여.”
환사의 고개가 느릿하게 좌우로 저어진다.
“내가 은혜를 갚아야 하는 대상은
내가 발을 딛고 살아온 세계이지. 나는 그의 방법에 동의하지 않네. 힘으로 억누른 평화는 언제고 깨어 지기 마련이고, 희생을 동반한 이룸 은 언젠가는 그 가치를 잃는 법이 지.”
“그걸 알고 있는 이가 왜 흑왕을 따르는 건가?”
“삶이란 그런 것이니까.”
환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그리 대단한 이가 아닐세. 모두가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한 결과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지. 그리 고 무엇이 정확하게 옳은 길인지를
판단할 능력도 없네. 내가 할 수 있 는 것은 그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것뿐.”
“흑왕이 만들어낼 세상은 지금보 다 퇴보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럼 손을 놓겠는가?”
환사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결과는 누구도 모르는 걸세. 하 찮은 인간이 미래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 하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세상을 바꾸
려 했다는 것.”
마스터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진다. 그 말은 부정할 도리가 없다.
그가 마스터이기에 흑왕이 벌인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안다. 그 역시도 유럽의 무인들을 이끌어 보았으니까.
무인들이 처한 상황이 조금씩 나 빠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 하면서도 마스터는 그저 어떻게든 현상을 유지하려 애썼을 뿐이다.
안일했다?
천만에. 마스터의 입장에 서본 이 가 있다면 누구도 그런 말로 마스터
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 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왔다.
그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 흑왕이 게임 체인저일 뿐이다.
그들이 지켜오던 룰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버린 게임 체인저.
만약 강진호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가 여전히 원탁의 마스터로서 원 탁을 지켜 나가고 있었다면, 그도 흑왕의 논리에 동조해 그를 따랐을 지도 모른다.
“그저 서로 입장이 다르다는 거로 군.”
“그리고 무인들의 세상에서는 그
게 전부지.”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어쩌면 마스터는 무인이 되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늘은 그에게 훌륭한 무인이 될 수 있는 재능을 주었지만, 무인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향을 주지 않았다.
서로의 논리 중 어느 것이 옳은 가를 무력으로 결정짓는 이 야만의 세상은 그에게 있어서는 이해불가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제 힘으로 바꿨어야 한다.’
바깥세상 역시 마찬가지다.
이성과 논리가 주를 이루는 바깥 세상의 흐름 역시 처음부터 그랬던 게 아니다. 야만과 힘이 지배하는 세상을 수많은 이들의 피로 조금씩 바꿔온 결과다.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불 만을 토해내고 부정할 게 아니라 스 스로가 바꿔 나갔어야 한다.
그래.
그의 뒤에 있는 강진호와 환사의 뒤에 있는 혹왕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들은 세상의 본질을 누
구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 람들일지도 몰랐다.
‘ 아쉽군.’
마스터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온전히 제 의지로 이 자리 에 섰다면, 그랬다면 이 승부를 좀 더 즐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 지만 그를 이 자리에 서게 만든 것 은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후회와 고 뇌, 그리고 책임감이었다.
“시작하지.”
대화는 이걸로 됐다.
이제는 마스터도 안다. 무인들의 세계에서 대화만큼 불필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필요한 것은 대화가 아니라 증명이다.
환사의 투명한 눈빛이 마스터를 꿰뚫었다.
“조심하시게.”
환사의 양손이 그의 넓은 소매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사정을 두지 않을 생각이니.”
“이쪽도 마찬가지일세.”
마스터의 손이 아공간으로 밀려 들어간다. 그 안에서 룬검을 꺼낸 마스터가 자세를 잡고 환사를 겨누 었다.
대치하는 두 사람을 본 방진훈이 조금 불안한 눈으로 위긴스를 돌아 보았다.
“이사님.”
“왜 그러는가?”
“……저는 솔직히 마스터의 실력 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님과 마스터 중에 누가 더 강합니 까?”
“ 흐음.”
위긴스가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라 는 듯 눈을 찌푸렸다.
“그대들의 기준으로 보자면 내가 더 강하겠지. 예전에는 몰라도 지금
은 내가 확실하게 더 강하네.”
“T7.”
O •
방진훈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어 댔 다.
솔직히 말해 십이비도를 상대로는 위긴스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다. 막말로 지금이야 어떻게 어떻게 초 인의 영역에 접어든 그들이지만, 그 전에는 저 백연홍을 상대로 네 명이 서도 승리를 잡아내지 못하지 않았 는가.
그런데 위긴스보다 약한 이가 승 리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건 자네들의 기준 일 뿐이지.”
“예?”
“마스터와 내가 승부를 가린다면 누가 이길지는 나도 모르겠네. 나야 내가 이길 확률이 조금 더 높다고 생각하지만, 마스터의 생각은 또 다 르겠지.”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간단하지. 누가 더 빠르고 누가 더 강한가로 우열을 결정하는 자네 들의 방식으로 따진다면 내가 더 빠 르고 강하네. 하지만…… 우리의 방 식에는 상성이 꽤 크게 작용한다는
말일세.”
“왜요?”
“마법 때문이지.”
위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동양의 무학은 여러 체계가 있지 만, 그 근본은 스스로가 강해지는 것이네. 그러니 결국 마지막에 가면 모두가 비슷해지지.”
“그렇죠. 만류귀종이니까.”
“하지만 마법은 그렇지 않네. 똑 같은 마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만, 어떻게 연구하고 어떻게 발전시 켜 왔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 으로 발현이 되지.”
“그게 어떤 이점이 있는데요?”
“이점이라……. 이점은 나도 모르 겠군.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워 낙 다양한 타입이 있기 때문에 상성 을 극심하게 탄다는 거지. 상성이 맞지 않는 이에게는 극도로 허무하 게 패배할 수도 있고, 상성이 맞는 이에게는 사신과도 같은 모습을 보 여줄 수 있다는 의미일세.”
“ 으음.”
위긴스가 턱짓으로 환사를 가리켰 다.
“그리고 아마도 마스터가 보기에 저자는 자신과 상성이 맞는 이인 것
같군. 그러니 나서신 거겠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그게 파악 이 된다는 말이십니까?”
“마스터의 연륜과 경험을 무시하 지 말게. 무인들을 봐온 눈만 따지 자면 이곳에서 마스터를 따라갈 이 는 아무도 없네.”
위긴스의 눈이 마스터의 등으로 향했다.
‘마스터.’
그는 저 등을 보며 자랐다.
그에게 있어서 마스터는 언제고 넘어서고 싶은 스승인 동시에 언제 까지나 뒤를 따르고 싶은, 마치 아
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도 이제 는 나이가 들어 마스터의 품을 벗어 났지만, 그때의 감정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마스터는 총회의 감옥에서 살아가 는 생활을 그리 고통스러워하지 않 았다. 그럼에도 그는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 섰다.
위긴스는 마스터가 왜 이 자리에 섰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겠지.’
자신의 자존심이 아니다.
그는 원탁의 모든 기사들을 대신 하여 이 자리에 섰다.
한때는 세상을 조율한다는 명목으 로 무인들을 대표하던 원탁. 하지만 지금의 원탁은 세상의 중심에서 밀 려났다.
총회의 이름 아래서 신음하고, 흑 왕의 위엄에는 감히 범접하지 못한 다. 원탁의 무인들이 느끼는 상실감 은 밖에서 보는 이들이 짐작하는 그 이상일 것이다.
그런 와중에 세상의 운명을 결정 짓는 이 승부에 원탁이 배제된다?
‘그건 절망을 넘어서는 일이지.’
패배의식이 원탁을 잠식할 게 분 명하다. 육체적인 핍박은 사람을 단
단하게 만들지만, 정신적인 허무는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 법이니까.
그렇기에 이 자리에 선다. 그들에 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름만 마스터일 뿐, 총회의 의지 를 대행하는 위긴스가 아닌, 마스터 의 이름을 잃었으되 여전히 원탁을 대표하는 그가 아직 긍지를 가지고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서.
위긴스가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응시하고는 뒤쪽으로 슬쩍 물러섰 다. 지금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게 낫다. 원탁이 아닌 마스터를 위
해서.
원탁에 남은 이들이 다시 긍지를 가지게 되든 말든 그에게는 그리 중 요하지 않은 일이다. 그의 마음은 이미 원탁을 떠났으니까.
하지만…….
원탁을 위해 평생을 바쳐 온 마 스터의 마지막 의지만은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다.
‘내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위긴스의 눈이 마스터의 등으로 향한다.
‘보여주십시오, 마스터.’
우우우웅.
마스터의 검이 천천히 떨리기 시 작했다.
룬검은 검과 마법을 동시에 익히 는 이들만이 쓸 수 있는 검. 검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마법을 증폭시 키는 역할을 하는 마검사의 무기.
하지만 세상에 대가가 없는 효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 큰 출력을 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료가 필요한 법. 룬검을 사 용하는 이는 승부를 오래 끌 수 없 다.
마스터가 짧게 호흡을 뱉어냈다.
손에 잡힌 검의 감각.
몸을 휘도는 마나의 느낌.
‘그러고 보면……
왜 자신이 실패했는지 알 것 같 았다. 저 강진호를 만난 이후, 아니, 그 이전으로도 한참 전부터.
마지막으로 전력을 다해 목숨을 걸고 싸워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 지 않는다.
그러니 실패할 수밖에.
스스로 무인이라는 본질을 잊어버 렸으니까.
‘꽤 오래 버텨왔지.’
그의 육체는 이미 노쇠했다. 그가 원하는 만큼 잘 움직여 줄지도 의문 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와서 우는소리를 할 수 는 없지. 부러져도 움직여라.”
그의 검끝에서 붉은 화염이 휘몰 아쳤다.
“어디, 실력 한 번 볼까?”
마스터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불 꽃들이 허공에서 휘돌며 이내 거대 한 드래곤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하아아아압!”
그와 동시에 마치 거대한 토치로 쏘아대는 것 같은 강렬한 화염이 환 사를 향해 폭풍처럼 밀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