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ent of the Demon Master RAW novel - Chapter (2015)
마존현세강림기-2017화(2014/2125)
마존현세강림기 82권 (2화)
1장 증명하다 (2)
기이한 일이었다.
눈앞의 사내는 분명히 걷고 있다. 하지만 그 발소리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들리지 않는다.
평범한 이들에게라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숙련된 무인의 발소리는 일 반인들이 들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 발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가 그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권성이 눈을 찌푸렸다.
‘살수는 아닌 것 같은데……
꽤 음침한 복장을 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살수 특유의 날카로움 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발소 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상 대가 일반적이지 않은 무학을 익힌 이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뭔가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 난다.
마침내 혈마가 자신의 앞에 서자 권성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이위평(李爲平). 과거에는 권성이 라 불렸다.”
“혈마.”
혈마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권성 의 눈이 찌푸려졌다.
“……혈교의 교주인가?”
“기억해 주는 이들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일지도 모르겠군.”
혈마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재미있는 일이다.
마교는 몰락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교의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다. 마교도들이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 리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악명을
뒤집어쓰든, 쓰레기 취급을 받든 어 쨌거나 그 이름이 전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이름조차 사라져 버린 혈교와 는 다르게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혈교를 기억 해 주는 것은 과거의 강자였다.
“혈교, 혈교…… 혈교가 아직 명 맥을 이어오고 있었군.”
“운이 좋게도 말이야.”
“홈.”
권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로군. 혈교 는 과거부터 역천(逆天)을 그 기치
로 삼지 않았던가. 저들과는 성향이 맞지 않을 텐데?”
혈마가 낮게 웃었다.
“역천이라…… 혈교에 대해서 잘
아는 모양이군.”
“꽤 자주 싸웠으니까.”
그 말에 혈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권성이라…… 들어본 적이 있군.
복마권성(伏魔奉聖) 이위평.”
“한때 내 별호였지.”
혈마의 입꼬리가 더욱 짙게 말려 올라갔다.
흔한 이야기다.
세상을 뒤덮는 악을 물리치며 위
대한 명성을 쌓는 영웅의 이야기 같 은 건 말이다. 물론 혈교는 그 영웅 의 이름을 빛나게 만들어주는 악역 에 불과했지만.
아니, 대부분의 경우 제대로 된 악역조차 되지 못했다.
“과거에 나는 혈교와 몇 번이고 주먹을 섞었지. 당대의 혈마와 싸운 적도 있다.”
“그렇기에 알아보지 못했군. 그때 의 혈마에 비해 너는 너무도 달라졌 구나. 그때는 적어도……
“수다쟁이로군.”
권성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내 당당한 표정을 지은 권성이 굳은 의지를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에는 적이었다고 하나, 지금 도 적일 이유는 없지. 애초에 십이 비도는 그런 관계들이니까. 서로 다 른 생각을 가지고 싸우던 이들이 위 대한 뜻 아래 몸을 의탁한 것뿐이 다.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싸울 이
“흑왕의 이름 아래로 들어올 생각
은 없는가?”
혈마의 고개가 살짝 삐딱해진다.
그 조롱 섞인 몸짓을 보고도 권 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대가 원하는 세상은 그쪽에 없 다. 그대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이는 바로 흑왕뿐이다.”
“내가 원하는 세상?”
권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교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세 상 아닌가?”
“세상이 바뀌면 사람도 달라져야 하는 법이지. 정사마(正邪魔)의 구
분 따위는 지금의 세상에서는 아무 런 의미도 없다. 오직 무인과 무인 이 아닌 이의 구분만이 있을 뿐.”
혈마가 묵묵히 권성의 말을 들었 다.
“흑왕에게로 오라, 과거의 영광을 잃은 자여. 흑왕께서는 흔쾌히 그대 들의 부흥을 약속하실 것이다.”
“굳이•…”
혈마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 다.
“우리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나?”
“필요하지. 나는 혈교에 대해 잘 아니까.”
“그대들의 무력이 가치 있다 공치 사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대들의 능력은 흑왕께는 꼭 필요한 것이다.”
혈마의 시선이 권성의 뒤쪽에 있 는 흑왕에게로 가닿았다.
흑왕은 아무런 말 없이 혈마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긍정도 아 니고, 부정도 아니다.
하지만 혈마는 저 미묘한 미소가 긍정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굳이 밀어낼 이유도 없다. 혹왕에게 있어서 혈교는 그 정도의 가치겠지.
하나 그렇다 해서 권성의 말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대들의 능력은 새로이 생겨날 무인들의 세상을 다스리는 데 반드 시 도움이 된다. 그리고 바깥세상을 상대하는 데는 오히려 그 이상으로 필요할지도 모르지.”
“귀하게 쓰일 것이다. 마존이 원 하는 세상과는 다르게.”
혈마가 낮게 웃었다.
확실히 저 말은 그리 틀리지 않 았다. 기괴막측한 사술을 제 힘으로 삼는 혈교도들은 흑왕의 통제력을
강화시켜 줄 것이다. 그리고 그 힘 은 무인들이 아니라 군인들을 상대 로 할 때 몇 배, 아니, 몇 십 배의 힘을 낼 수 있다.
그건 이미 그들이 인민해방군에 몸을 담으며 증명된 사실이다.
인간은 전차를 상대로는 싸우려 들지만, 귀신을 상대로는 도망부터 치는 법이니까.
달콤한 말이다.
이치에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래서……
혈마가 이죽거리며 권성을 비웃었
다.
“남 부러울 것 없이 잘난 것들과
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니까.”
권성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입 발린 말이 아니다.”
“알아. 진심이겠지. 자비롭게도.”
“하지만 말이야……
혈마가 비웃음이 어린 눈으로 권 성을 바라보았다.
“거지에게는 화려한 대궐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야.”
“……무슨 의미냐?”
“그건 어차피 내 것이 아니거든.”
권성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찌푸렸다.
“이거 봐, 이거. 잘나신 것들은 이해를 못한다니까.”
필요하기에 함께하자는 말은 필요 하지 않으면 내치겠다는 말이나 다 름없다. 혈교를 필요로 한 이들은 그동안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혈교와 함께하는 이가 누가 있는가.
“달라졌다라……
혈마가 말끝을 흐렸다.
“하고 싶은 말은 ‘달라졌다’가 아 니겠지. ‘나약해졌다’, ‘한심해졌다’ 뭐, 그런 말 아니었나?”
“그게 아니면 쓰레기 같아졌다든 가.”
“받아들이지 못하는군.”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네 쪽이 야.”
혈마의 입가에 장난기가 어렸다. 하지만 권성의 눈에 그건 웃음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게 너희가 논하는 가치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흑왕이 말
하는 새로운 세계든, 마존이 말하는 공존이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야.”
혈마가 이를 드러낸다.
“모든 사람이 너희의 잘난 논리와 이상에 공감해서 싸운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장 생존을 걱정하는 이들에 게 이상 같은 건 바닥에 떨어져 짓 밟힌 떡 한 조각만도 못한 법이지. 나는 둘이서 뭔 소리를 지껄여 대든 아무 상관 없어. 당장 내일 일 같은 것도 관심없어.”
수도 없이 사냥 당했다.
때로는 누군가의 정의감을 충족시
키기 위해.
때로는 누군가에게 아직 남아 있 는 원한의 발로로.
때로는 그저 재미로.
살아남기 위해 달라져야 했고, 살 아남기 위해 버려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 능력을 팔고, 자존심을 팔고, 모든 것을 팔았다.
이제 손에 남은 건 무엇도 없다.
무인의 세상 같은 건 지긋지긋하 다. 수백 년 전에 저지른 짓이 족쇄 처럼 따라다니고, 얼굴도 모르는 이 가 저지른 악행 때문에 살해당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이 짐승 같은 세
상은 너무도 역겹다.
“우린 마교와 달라.”
“영광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과 거의 영화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혈교의 부활?”
혈마가 낄낄대며 웃었다.
“세상에서 혈교가 가장 사라지길 원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이 병신 같은 새끼야.”
그의 눈에서 뭐라 해석할 수 없 는, 악독한 눈빛이 흘러나왔다.
“이해할 수 없군.”
권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 간절하다면 되레 흑왕을 따 라야 하는 것 아닌가? 그분은 너희 가 원하는 평화를 주실 수 있는 분 이다.”
“ 평화?”
“세상에 평화 같은 건 없어.”
“사람은 싸운다. 언제고 싸운다. 싸우지 못하게 된 인간은 만만한 사 람을 짓밟고, 조롱하고, 물어뜯지.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권성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희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개 가 되는 것, 그리고 그 개가 되어
또 다른 원한을 쌓아 나가는 것. 그 래, 그렇겠지. 그게 너희가 생각하는 혈교니까.”
“내 말의 의미는 그게……
“아주 잘 봤어. 우린 원래 그런 쓰레기들이지.”
권성이 주먹을 움켜잡는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는 도무지 이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횡설수설. 말에 논 리가 없고, 제멋대로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라는 말이 냐?”
“너희의 논리에는 질렸어.”
“노력하고 스스로 거할 자리를 쟁 취하라는 너희의 논리는 강자의 논 리일 뿐이야. 그건 승리한 자가 패 한 자 앞에서 으스대며 하는 조롱이 지.”
혈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우리가 원하는 건 영광이 아니 다.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그늘이 고, 적대감 어린 눈빛을 피할 수 있 는 어둠이다. 살아가기 위해 발악하 지 않아도 되는 집이고,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지 않아도 되는 땅이다.”
“그게 흑왕께서 만들려고 하는 세 상이다.”
“개소리하지 마.”
혈마가 비웃음을 흘렸다.
“우리를 박해한 건 다름 아닌, 너 희 같은 새끼들이야. 그런 놈들이 득시글대는 곳에 내 발로 걸어 들어 가라고?”
“왜? 다시 혈교 사냥이라도 시작 해 보시게? 아니면? 혹왕이 내려준 알량한 권력을 붙들고 복수하듯이
가혹하게 너희를 감시하기라도 할 까?”
혈마의 두 눈에서 붉은 안광이 뿜어져 나온다.
“확실한 건 하나뿐이지. 너희는 겨우 찾은 우리의 안식의 땅을 흙발 로 침범한 침략자고, 우리가 거할 곳을 부수려 하는 파괴자라는 거지. 그러니……
혈마가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남은 곳을 빼앗기는 이가 얼마나 격렬하게 저항할 수 있는지 알게 될 거야. 와봐. 그 잘난 주둥 이로 지껄이는 이상이라는 게 얼마
나 무가치한 것인지 알려줄 테니까.”
그 말을 들은 권성이 고개를 내 저었다.
“무지몽매하군.”
“하핫!”
“하지만 괜찮다. 이 승부는 너희 를 짓밟는 승부가 아니니까. 지금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건 그저 패배뿐이겠지만, 패한다 해도 너희 는 혹왕의 치세 아래에서 그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혈마의 얼굴이 뒤틀렸다.
밝다.
한 점 티 없이 맑다.
그래서 더더욱 메스꺼웠다.
“그래, 너는 영웅이겠지. 나는 그 영웅의 앞을 가로막는 악역이고 말 이야.”
혈마의 전신에서 붉은 혈기가 흘 러나온다.
“하지만 하나는 알아야지. 영웅이 영웅일 수 있는 이유는 살아남았기 때문이야. 죽은 영웅은 이름도 없이 사라질 뿐이지.”
“그 말, 명심하지.”
권성의 전신에서 백색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눈부시게 밝고 성스러운.
혈마가 뿜어낸 혈기가 그 눈부신 빛 앞에 이지러진다.
두 눈에서 핏빛의 안광을 뿜어낸 혈마가 입가를 뒤틀며 권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짙은 혈기가 깊은 어둠을 만들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