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tination of the Shilohan Butterfly RAW novel - Chapter 12
11. 후일담: 시열
가입국 내에서 두 집단 간 싸움이 불거지고 한국이 절대적으로 반대파에 섰음을 기사화하는 과정에서 우선 선별된 인원만을 UT 행성으로 보내느니 마느니 하는 얘기가 매일 같이 논란이 되는 가운데. 오늘 하루만 해도 인터뷰 요청 수십 개를 받은 남자는 그런 일을 모르는 사람처럼 해맑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양아버지란 사람이 총통 자리에 오르자마자 한 일이 자신을 전면으로 앞세워 ‘하이브리드 인간’이니 뭐니, 전쟁에 있어 비장의 카드인 것처럼 타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끄러워진 세상 따윈 알 바 아니라는 표정이라니.
윤 박사는 그의 팔뚝에 주사를 놓으며 빈정거리듯 물었다.
“낮에 차온 씨 다녀갔어. 어디 멀리 며칠 갔다 올 수도 있으니까 피 좀 왕창 뽑고 가겠다던데.”
윤 박사의 말에 그의 얼굴에 꼴 보기 싫은 행복이 피어났다. 일하느라고 연애는커녕 남자 구경도 어려운 윤 박사의 눈은 더욱 세모꼴이 됐다.
“결혼은 언제 하게.”
들떠서 좋아할 줄 알았더니만. 내내 묵묵히 말이 없던 그가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온이.”
온이? 짧아진 애칭이 가관이었다. 윤 박사가 놀고들 있다며 콧소리 낼 찰나였다. 그가 갑자기 팔을 빼는 시늉을 했다.
“좀 덜 넣어줘.”
“뭐를? 약을?”
결혼은 언제 하느냐고 물었더니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있었다. 윤 박사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자 그가 말귀 못 알아먹는다며 주삿바늘을 강제로 빼었다.
“이러면 나중에 더 아플 텐데.”
“그러면 좋아.”
“…….”
“안절부절못하다가……. 내 옆에서 원하는 만큼 안아 주고 보살펴 줘.”
윤 박사는 경악에 가까운 얼굴이었건만. 그는 마치 대단한 자랑이라도 하듯이 떠벌리고 있었다.
“얼굴도 하얘져.”
“그래서?”
“그렇다고.”
윤 박사는 그를 오래 알아 왔지만 요즘처럼 미친놈이라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 없었다. 그는 윤 박사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없는 얼굴이었다.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양복 재킷을 대충 껴입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때 그의 주머니 속에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게 무언가 봤더니,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삐삐가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유심히 보곤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뒤에선 윤 박사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건 또 뭐야. 박물관이라도 털었어?”
“클래식하잖아. 이런 걸 좋아해.”
클래식을 넘어 고물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고나 있는지. 연결만 하면 얼굴이 동동 떠다니는 최신형 연결 수단을 두고 저 지랄을 하고 있는 커플이 예뻐 보일 리 없었다.
어느덧 연락을 마쳤는지 그는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파란 넥타이를 고쳐 맸다. 저러고 가면 한동안은 또 못 볼 것 같아 윤 박사는 커피를 내리며 물었다.
“차온 씨는. 찾을 가능성이 있대?”
차온은 지금 시열의 지원 아래 팀을 꾸렸다. AVRTA 대체재를 찾고 AVRTA 광산에서 일어나는 부작용까지 알릴 준비를 마쳤다고 했다.
그게 전쟁을 앞당길지, 아니면 뒤로 미루게 될지 모르겠으나 어차피 안 그래도 고갈 난 지구의 자원을 대체할 무언가를 찾기는 해야 했다.
“어려울 텐데. AVRTA가 나타난 것도 인류에겐 기적이었다고.”
그러나 그는 윤 박사에게 미소만을 남긴 채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복도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명령을 남기는 그를 보면서 윤 박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목소리가 저렇게 달라서야. 윤 박사는 몇 방울이 남은 약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 뭔지.
“결혼식이나 열 수 있으려나.”
그러나 저 둘에겐 딱히 그게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서로 애틋해 죽을 지경인데 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배 아파서라도 빨리 남자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굳이 결혼을 해야 할까 싶기도 하다. 뭐. 어쨌든 부럽다는 소리였다.
* * *
486. 사랑해라는 뜻이었다. 17317071. 마찬가지로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낯간지러운 것처럼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입에 담지 못하지만 손바닥만 한 기계로는 뜨거울 정도로 주고받고 있었다.
그는 바빴다. 그리고 그녀도 바빴다. 군용기로 전국을 쏘다니며 폐쇄된 폐광을 돌아다니며 씨를 제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메마른 황무지에 피는 꽃을 소중히 여기는 그녀의 일은 어쩔 땐 열흘을 넘기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던 하이브리드 인간이라는 명목으로 온 언론에 집중을 받고 있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같이 UT 행성으로 가는 인원을 늘려달라고 시위까지 하고 있는 상류층을 달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여러 굵직한 직함들을 목에 걸게 됐지만, 그들이 보는 건 인간 이시열이 아니라 뺨에 그려진 문신, 인간보다 나은 신체적 성능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소란을 이기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침실에 그녀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문을 열었다.
들어서자마자 안도의 숨이 바닥으로 깔렸다. 침대 위에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는 이불의 실루엣을 보고 그는 미소가 배어 나왔다. 양복 재킷을 벗어 식탁 의자에 걸어둔 뒤, 그는 욕실에 들어가 물을 틀고 샤워를 했다. 작은 소리에도 그녀가 깰까 걱정이었다. 그는 가운을 걸치고 나와 뱀처럼 침대로 올라갔다. 잠꾸러기 차온을 깨울 시간이었다.
이불 밑으로 들어간 그는 차온의 속옷을 이빨로 물어 벗겼다. 그리운 음부에 혀를 넣고 속살을 엄지로 벌렸다. 쭈웁, 빨아먹자 차온의 허리가 들썩거렸다. 젖고 미끈거리는 속살을 혀로 샅샅이 핥았다. 잠투정 부리던 차온이 허벅지를 조이며 눈을 떴다.
“흐…….”
“안 자네.”
“왔어?”
일주일만의 만남이 어찌나 반가운지. 그녀는 이리로 오라며 그를 불렀다. 자연스럽게 그는 돌아온 그녀의 옆에 누웠다. 이제야 집으로 온 기분이었다. 그녀가 없는 며칠은 너무도 쓸쓸해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음에는 당신도 같이 갔으면 좋겠다.”
그는 기대감을 가졌으나 그걸 표시 내지 않고 말했다.
“왜?”
“당신 없으니까 쓸쓸하더라.”
똑똑한 차온은 똑똑한 대답만 골라 했다. 이 만족스러움은 그녀만이 줄 수 있었다. 자신과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만족감 말이다. 시열은 그녀의 목에 걸린 로켓을 점검하듯 만졌다. 어머니가 준 로켓에 그녀는 시열의 사진을 넣고 다녔다. 이 세상에 그것보다 완벽한 조합은 없었다.
“상황은 여전히 별로지?”
전 세계적으로 비가입국 나라의 인구는 늘고 가입국의 인구는 줄고 있다. 자국의 땅을 희생하면서 발전한 나라가 왜 그들을 신경 써야 하냐는 논란이 연이어 언론을 장식하고 있었다. AVRTA 대체제가 없으면 안 그래도 부족한 자원을 위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니,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전쟁이 일어나는 건 똑같다는 소리였다.
그도 곧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다만 그 전쟁에 그녀는 참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말 없는 거 보니까 많이 안 좋나 보네.”
하이브리드 인간을 만들기 위해 각국에서 시열에게 비결을 물어보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불안했다. 만약 그들에게 차온의 존재가 알려진다면,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온을 희생시키려 안달할 것이었다.
“있지. 보여 줄 거 있어.”
차온은 거의 반말을 썼다. 차온은 그게 더 연인 같고 내 남자 같아서 좋다는 소리를 했다. 차온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그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차온은 아차 하더니 자그마한 가방을 하나 꺼냈다. 리본으로 포장되어 있는 빨간 상자를 그에게 내밀었다.
“열어 봐.”
기대로 볼을 부풀리고 있는 그녀의 반응을 보니 어디서 귀한 선물을 구해 온 모양이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반짝반짝 한 전구가 있었다.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문구와 함께 작은 루돌프의 코가 반짝였다. 크리스마스카드인 모양이다. 며칠 뒤면 크리스마스구나.
“짜잔.”
그때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보여 줬다. 핵심은 저것인 모양이었다. 애지중지하는 충전기를 본 시열의 눈이 궁금증을 띠었다. 그녀는 창가에 두고 키우던 분홍 꽃을 들고 왔다.
“이 뿌리가 독특하잖아. 하얀 물도 나오고. 건강에 이상이 있을까 봐 조사해 봤는데 이 뿌리를 자르면 나오는 액체가 작지만 연료 역할을 했어. 오염 물질의 수치도 AVRTA에 비해 거의 없는 수준이야.”
차온은 그의 뺨에 키스를 쪽 하고는 화사하게 웃었다.
“어때? 내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직 구체적인 것은 연구를 해 봐야 안다고 종알거리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아무에게도, 심지어 그녀에게도 말하지 못한 속마음이 있었다. 이 나라 같은 건, 이 지구 같은 건 사라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에겐 오로지 그녀의 기분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별로야?”
시무룩해진 그녀의 표정을 본 시열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더 들어주고 싶은데. 얼마 전에 약을 맞아서 그런지 몸 상태가 영.”
차온의 입술, 눈이 커졌다. 약효가 좋은 차온의 입술이 그의 뺨에 눌렸다. 그는 비로소 행복을 머리로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그녀가 무엇을 발견하든, 발견하지 않든 상관없다. 내일 당장 이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 그러나 차온이 같이 죽어주겠다고 했으니까.
“자고 일어나서 얘기해 줘.”
“어, 알았어. 얼른 자자.”
방금 일어났으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에게 이불을 덮어줬다. 시열은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속마음을 흘렸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원하는 게 있으면, 내가 어떻게든 해 줄게.”
그러니 너는 평생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일만 생기고 그랬으면. 나쁜 일은 모두 나에게 생겼으면. 자신은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그의 속마음은 전해지지 못했지만, 눈치가 삼단인 차온이 그의 팔뚝을 베고 누우며 말했다.
“응. 대신 당신도 갖고 싶은 거나 보고 싶은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
차온은 그의 손에 깍지를 끼웠다.
“우린 이제 가족이니까.”
시열은 사랑이라는 유한한 감정보다 그녀와 저를 한 곳에 묶어둘 수 있는 단어를 사랑했다. 가족, 부부, 연인, 그리고 죽음. 드디어 그도, 그녀의 마음속에도 휴가가 찾아왔다.
그 누가 알았을까. 우리가 낭만적이지 못한 시대에 낭만을 좇는 연인이 될 줄을.
[실로한 나비의 행선지에서, 完]실로한 나비의 행선지에서 3권
2021년 11월 17일 초판 발행
지은이 | 디키탈리스
편집 | 에이블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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