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truction of the Fortress RAW novel - Chapter 220
220
第四十四章 사령(邪靈) (5)
누강에게는 행운이 따랐다.
평소라면 혈루마옥 무인 두 명을 제치고 혈오를 차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는 안에 무인 두 명이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기가 소침해지고, 자신감도 떨어졌다.
헌데 신법이 통했다.
혈루마옥 무인들이 방심을 한 탓이다.
그들에게는 방심을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누강 같은 자에게 신경을 쓰기에는 너무 큰 일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촌장이 오고 있다.
촌장이라는 한 인물이 던지는 무게감은 누강 같은 자가 견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 촌장은 아버지다.
혈루마옥에서 가장 높은 어른이다. 말 한 마디에 천금 무게를 갖는 분이다.
그런 분에게 반기를 들었다.
촌장이 그런 자신들에게 온다. 이미 증평으로부터는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유지자문을 무너트리느라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증평 무인들과 싸웠고, 물리쳤다. 증평에게 혈루마옥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온다.
정신이 말짱할 수 없다.
촌장이 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혈오는 누강 손에 들어갔다.
누강을 죽일 수는 있지만 혈오까지 잃을 공산이 크다.
혈오를 버려도 좋은가? 이 물음에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누미뿐이다.
누미는 혈오에게 가지 못했다.
“쯧!”
촌장이 석화 선생을 보며 헛바람을 찼다.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사람 살리는 일만 한 사람인데…… 가장 정을 많이 준 사람에게 죽음을 맞이했구나. 아가야, 꼭 죽여야만 했느냐?”
촌장이 말했다.
촌장 도착시간이 예정시간보다 훨씬 빨랐다. 예정대로라면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 같았는데, 준비할 겨를도 주지 않고 불쑥 들이닥쳤다.
촌장이 이토록 빨리 도착할 줄 알았다면 석화 선생도 굳이 떠나려고 하지 않았을 게다.
촌장의 움직임은 모든 정보를 앞지른다.
하오문이 촌장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녹천 무인들이 곳곳에 깔려 있는데.
“몸이 많이 불편하시다고 들었는데, 괜찮아 보이시네요.”
누미가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지 않다. 소문이 사실이다. 촌장은 이미 심맥이 끊겨서 죽음과 공존한다.
누미는 촌장에게서 죽음의 기운을 감지했다.
촌장이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는 부분, 죽음의 그림자가 촌장을 덮어씌우고 있다.
“후후후! 혈오에게 길들여졌구나.”
촌장이 뜻밖의 말을 했다.
누미는 눈빛만 차갑게 굳힐 뿐 대답하지 않았다.
촌장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촌장과 누미만 안다. 다른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누미와 혈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눈치 채셨어요?”
“진작 알았지.”
“너무하시네요. 진작 아셨다면 조언 좀 해주시지.”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서 어찌해야 되는지는 너도 알고 있잖느냐. 네가 거부했을 뿐.”
“호호호! 이제야 이 분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네요.”
누미가 죽은 석화 선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이 그랬거든요. 촌장님이 오시면 제가 죽는다고. 촌장님이 죽이는 게 아니라 누강이 죽인다고. 감히 누강 따위가 나를…… 했는데, 그게 아니네요.”
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부축하고 있는 제이령에게 말했다.
“넌 옆으로.”
제이령이 잠시 촌장을 봤다.
촌장은 누미와 겨루려고 한다. 이미 저승에 한 발을 디딘 몸으로 누미와 정면승부를 생각한다.
질 것이다.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제이령이 말했다.
“꼭…… 이기세요. 아버지.”
“후후후!”
촌장이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버지라는 말이 무척 낯선 듯.
저벅! 저벅!
촌장이 제이령을 뒤에 남겨놓고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아직도 두렵기는 한데…… 그 몸으로는 힘드실 것 같은데요.”
스읏!
촌장을 지팡이삼아 짚고 있던 검을 들어올렸다.
순간, 검에서 칠색 무지개가 피어난다. 아름다운 광휘가 온 세상을 휘감는다.
“어려워요. 이 정도로는.”
누미는 생글생글 웃었다.
촌장은 예전에 비해서 절반 위력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이토록 눈부시지 않았다. 고요하면서도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을 게다.
화려하다는 것은 미성숙했다는 뜻도 된다. 고도의 상태가 아니라는 거다. 그때,
“윽!”
멀쩡하던 누미가 느닷없이 가슴을 움켜잡더니 비칠비칠 뒤로 물러섰다.
“아직도 어렵다고 생각하느냐?”
“누…… 강…….”
누미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바로 말을 이었다.
“죽여! 당장 죽여!”
누구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해 듣는 사람이 있다.
쒜에에엣!
무인 두 명이 검을 쳐왔다.
누강은 살기를 감지했다. 저들은 혈오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매서운 살기를 뿜어낸다.
‘모두 죽일 생각이다!’
저들은 혈오를 통해서 혈루마옥의 저주를 파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혈오만큼은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헌데 틀렸나? 감히 혈오를 죽이려고 하다니.
스으읏! 파라락!
누강은 즉시 검성 시절 절정검학으로 널리 이름을 알렸던 십오참쾌를 펼쳐냈다.
일초십오변의 무서운 쾌검이 피어났다.
허나 혈루마옥 무인들은 쾌검 사이를 자유롭게 들어선다. 신법으로 쾌검을 피하면서, 검을 들이민다.
“으읏!”
누강은 즉시 몸을 빼려고 했다.
도저히 저들의 검을 막지 못하겠다. 자신의 검초를 뚫고 들어서는 검…… 막지 못한다.
물론 생각만으로 몸이 뒤로 빠질 리 없다.
절체절명, 목숨이 위태롭다. 단 일 초만에 저들에게 제압당하는 격이다.
저들이 충분히 조심했기 때문이다. 누강의 무공을 낱낱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신법을 펼칠지, 어떤 검초를 펼칠지 환히 알고 있는 터이다. 그때,
스읏!
누강 앞에 한 인형이 불쑥 튀어나왔다.
퍽퍽! 퍽퍽퍽!
누강을 찔러오던 검이 그를 찔렀다. 불쑥 치솟은 그림자를 무자비하게 난타했다.
“후욱!”
그림자가 고통스러운지 짧은 탄식을 토해냈다.
“음사!”
“혈오…… 혈오를…….”
음사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하지 못했다. 혈루마옥 무인들의 검은 치명적인 사혈만 노리며 짓쳐 들었다. 간신히 두어 마디 한 것도 기적이다.
툭!
음사가 고개를 떨궜다.
쒜에에엑! 쒜에에엣!
두 사람이 검초를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마치 연무(鍊武)를 하듯이 부드럽게 검초를 주고받는다. 검초에 살초가 섞여 있지 않고, 흉맹한 기운이 없고, 얼굴에는 웃음마저 떠올린다.
까깡!
검과 검이 부딪쳤다. 그리고 누미가 그 탄력을 이용해서 뒤로 훌쩍 물러섰다.
“이만큼 봐 드렸으면 됐죠?”
“후후후!”
촌장이 웃었다.
“봤느냐?”
뒤에 서 있는 제이령에게 한 말이다.
“네.”
제이령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말했다.
“이것이 내가 누미를 죽여야 하는 이유다. 반드시 죽여야 하는 이유. 혈오에게 제압당한 영혼은 생을 버리고 사(死)만 취한다. 결코 변하지 않을 성품인 게야.”
“하지만…….”
제이령은 뒷말을 잇지 않았다.
누가 봐도 승부는 명확하다. 촌장은 누미를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사실…… 제이령은 누미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촌장이 봤냐고 물어서 봤다고는 대답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증평은 돌아갈 수 있다.
수선화는 증평주를 죽였다. 하극상을 저질렀다. 촌장도 공격했다. 하지만 혈루마옥으로 돌아갈 수 있다. 돌아가도 무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녹천도 돌아갈 수 있다.
녹천 무인들은 정체성을 잃었다. 녹천주를 잃고, 화천도 잃었다. 그리고 혈루마옥과는 상관도 없는 누미를 모시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름조차 알지 못하던 여인을 모시는 것이다.
그래도 돌아갈 수 있다고 봤다.
촌장은 기습 잠입을 택했다. 그 이유가 녹천 무인들을 살상하지 않기 위해서다.
녹천과 부딪치면 결국 그들을 죽여야 한다.
촌장은 이런 경우를 막기 위해서 일부러 잠입하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누미는 아니다. 누미는 돌아가지 못한다.
왜 누미만 돌아가지 못하는지……. 촌장을 그 이유를 봤냐고 물었고, 봤다고 답했으나 실제로는 보지 못했다.
“으윽!”
누미가 또 가슴을 부여잡고 비칠거렸다.
‘틈!’
제이령의 눈에 기회가 보였다.
그녀의 눈에 보인 기회를 촌장이 보지 못할 리 없다. 촌장은 더 잘 본다.
쉬이이잇!
촌장이 소리 없이 검을 쳐냈다.
이것은 기습이다. 누미는 싸움에 여유를 두었는데, 촌장은 기습을 취했다. 평소 촌장이라면 목숨이 없어져도 취하지 않을 비겁한 암수다.
스각!
촌장이 검이 누미를 갈랐다.
누미가 갈라진다. 두 쪽으로 쩍 갈라진다. 그리고 갈라진 틈에서 검 한 자루가 불쑥 치솟더니 촌장의 가슴을 파고든다.
푸욱!
검은 정확하게 가슴을 뚫었다.
촌장이 검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촌장 스스로 자진을 하듯이 검을 향해 뛰어들었다. 촌장이 공격을 하고, 누미가 방어를 한 것이지만 멀리서 보면 꼭 촌장 스스로 검을 향해 달려든 것처럼 보인다.
“강……하구나.”
“다 배웠어요.”
“그렇구나.”
“역시 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누강뿐인데…… 어쩌죠? 누강도 저를 죽이지 못하니.”
“그렇구나.”
촌장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알았다! 혈오와 누미는 서로 교감한다. 혈오를 괴롭히면 누미가 괴로워진다.
혈오를 죽이는 것은 큰 소용이 없다. 누미와 혈오가 교감을 나누고 있다고 해도 삶과 죽음까지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혈오가 죽으면 큰 아픔을 느끼겠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고통은…… 혈오의 고통은 누미의 고통이 된다.
누미도 그런 점을 알고 혈오를 죽이라고 한 것이다. 모두 다 죽이라고 한 것이다.
쒜에에엑!
음사를 죽인 검이 그를 쳐온다.
누강은 저들의 검을 피하지 못했다. 두 눈 빤히 뜨고 지켜보면서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석화 선생이 기묘한 무공이라고 말한 사형도 소용없다.
저들은 이미 그의 신법을 알아버렸다.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환히 꿰뚫어 본다.
저들의 검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저들 검 앞에 혈오를 내미는 것뿐이다.
허면 저들은 혈오를 거침없이 벨 것이다.
누강은 혈오를 내려놓았다. 저들이 검을 쳐오는데…… 검을 볼 생각은 하지 않고 혈오를 내려놨다.
푹! 푸욱!
검이 그를 쑤셨다.
누강은 몸을 뚫은 검도 보지 않았다. 누워서 방글방글 웃는 혈오만 봤다.
“그놈 참…….”
“까르르르!”
누강의 말에 혈오가 소리 내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