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150
150화 지구의 주인
대략적인 설명이 끝나고 볼드윈 대통령은 따로 마련된 밀실에 안내되었다.
사전에 수행원들이 점검하려 했으나 그는 의미 없다며 물리쳤다.
“여기에 온 마당에 비밀이란 없네. 당분간은 밖에 있게.”
둘만 남게 되자 그는 아르마가 예상한 이야기를 꺼냈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유 대통령의 제안에 응할 생각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으로선 응할 수 없다는 거겠군요.”
“유 대통령은 눈치가 참 빨라서 좋아요. 내가 누구로 보입니까?”
“에드몬드 볼드윈 주니어. 미국의 대통령이죠.”
“그게 아니라 내 본질 말입니다.”
“…흑인.”
그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유 대통령은 황인이고, 나는 흑인이죠. 이건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주류가 되지 못하는 증거가 됩니다.”
“민주당에서 반대하는군요?”
“민주당뿐만 아니라 의회 전체, 펜타곤, 여러 정부기관과 수많은 기업들… 이 모든 것을 백인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는 소수에 지나지 않아요.”
애초에 그가 대통령이 된 것도 민주당 출신 백인 정치인인 브라이언트 후보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지하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미국 대통령은 백인이었을 거라는 뜻.
그는 창밖의 경치가 참 좋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 밀실은 해저에 위치해 있기에 수중의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
“물고기가 참 예쁘군요. 내 조부께서는 루이지애나에서 물고기와 바다가재를 잡으셨죠. 거긴 흑인이 꽤 많았지만 나는 그들과 지내는 대신 사회의 주류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백인이 될 수 없었어요. 피부가 다르니까.”
그는 자신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이 피부는 바꿀 수 없습니다. 나는 좋은 대학을 나왔고 사회활동도 열심히 했으나 밥은 언제나 흑인들과 먹었습니다. 백인들은 정치적 동료로서의 나는 인정하나 자신의 집에 나를 초대하진 않았죠.”
인종 분리는 공식적으로는 철폐되었지만 미국 사회 곳곳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백인 거주지에는 흑인이 끼어들 자리가 없으며 상류층이 다니는 학교가 따로 있다.
히스패닉도 마찬가지고 숫자가 밀리는 동양계는 아예 외국인 취급을 당한다.
하지만 볼드윈 대통령은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 차별에 대해서 말하려는 게 아니었다.
“미국은 백인의 국가입니다.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그걸 느꼈죠. 나는 그들에게서 잠시 자리를 빌리고 있을 뿐이라는걸.”
“화이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
“현 미국을 지배하는 주류라고 할 수 있죠.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니 그들은 곧 세계의 주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엔 조금 분위기가 다르지만.”
“그 주인이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보군요.”
볼드윈 대통령은 씁쓸하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 않습니까? 유 대통령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는데. 실업자가 폭증하는 현상은 미국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통계 마사지에 들어가서 그렇지, 실체가 밝혀지면 난리가 날 겁니다.”
유지하가 도입한 초기술이 긍정적인 면만 가져다주는 건 아니었다.
한국은 그나마 나았지만 세계 각국은 크고 작은 경제 위기를 겪어야 했고 그건 현재진행형이었다.
새로이 등장한 핵융합이나 우주개발 같은 산업으로도 줄어만 가는 일자리를 보충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한국이 세계의 부를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돈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겠는데, 과연 지금 사회에 적합한가로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죠.”
유지하는 그 말을 듣고 상체를 기울였다.
“우주에서 온 괴물이 우리를 위협하는데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단 말입니까?”
“인간은 원래 보수적입니다. 상황이 달라져도 그렇게 입장을 확확 바꾸지 못해요. 반도체 기업들을 볼까요? 에실 프로세서가 등장한 이후로 인원의 40%를 감축해야 했습니다. 이들이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교육 훈련을 받고 다른 분야에 배치하면 됩니다. 한국에선 흔한 사례죠.”
“인공지능을 통한 관리 말이군요. 미국에선 용납되지 않을 겁니다.”
“하긴, 수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야드파운드법을 쓰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군요.”
그 말을 들은 볼드윈 대통령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못 합니다. 사람들의 인식도 그렇고요.”
“그런 보고가 종종 들어오더군요. 미국 정부 기관이나 기업과 일을 할 때 도량형 문제로 마찰이 일어나면 항상 야드파운드법을 내세운다던데.”
“그 보고는 나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신라그룹이 바꿔 준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습니까?”
“바꿀 이유가 없으니까요.”
기술을 받는다면 모를까 전수하는 입장에서 눈치를 봐야겠는가?
볼드윈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유 대통령은 주관이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계의 주인이니 너희들이 따라야 한다는 식이죠.”
“그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유 대통령이 도태시킬 테니까… 맞습니까?”
“아뇨. 우주에서 온 괴물이 인류를 도태시킬 겁니다. 나는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미래를 봤습니다. 2100년을 넘기지 못했죠.”
“그 얘긴 아까도 들었습니다. 결국 멸망한다는 말인 것 같은데, 솔직히 와닿지가 않아요.”
70년 안에 인류가 멸망한다는 얘기를 누가 진지하게 믿어 주겠는가?
그 말을 한 게 유지하였음에도 각국의 정상들은 온전히 믿지 못했다.
유지하가 예지 능력을 가진 것은 인정하고 우주괴물의 힘도 확실히 알겠는데 그 미래는 안 믿는다는 것이다.
만약 이번에 골리앗급이 왔다면 인류는 확실히 멸망의 위기를 직접 체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 좋게도 현 군사력으로 해결 가능한 비스트급이 왔고, 미국은 의외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비스트급이 가장 작으며 약한 개체라고 수없이 설명했음에도 그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직접 당해 봐야 느끼는 거겠지.’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인류연합도 플레이그가 대대적으로 침공하기 전까지 선지자의 모든 경고를 무시했다.
그 결과 슬픔의 밤 때 5억 명이 죽었고 80년도 지나지 않아 완전히 멸망했다.
유지하를 제외하고는.
“혹시 대통령께서도 안 믿는 겁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현실주의잡니다. 여태까지 유 대통령이 경고한 게 현실이 되었으니까, 믿죠. 사실 다른 사람들도 그 발언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너무 충격적인 얘기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정신을 차릴 때까지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죠.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후우… 잠깐 담배 좀 펴도 되겠습니까?”
그러라고 하자 볼드윈 대통령은 싸구려 담배를 피워 물었다.
“괴물 건에서 내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당이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는가죠. 유럽에서 유 대통령의 손을 들어 버리는 바람에 내 입지가 상당히 좁아졌습니다. 괴물만 아니었더라면 나름대로 할 말이 있었을 텐데.”
“유럽에서 그런 협상을 한 게 상원의원들에게 좋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군요.”
“상원의원들뿐입니까? 연방정부 전체에서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재선은 어렵겠죠.”
회한의 긴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나와 다릅니다. 어떻게든 당신에게서 주도권을 찾으려 애쓸 겁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을 때도 되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남은 카드가 별로 없지요.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이 세계가, 지구가 그들의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다면 그게 착각이라는 걸 깨닫게 해 줄 뿐이다.
유지하가 별 반응을 않자 볼드윈 대통령은 담배를 비벼 껐다.
“원래는 공동대책위원회 같은 것을 제안하려 했었는데, 유 대통령의 표정과 태도를 보니 안 되겠군요.”
“우주괴물을 물리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내 통제를 받는 거죠.”
“백인들은 그걸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역사와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주류였으니까요. 하여튼 오늘은 이만하죠.”
그는 일어서서 돌아서다가 말했다.
“참 오늘 이야기는…….”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볼드윈 대통령이 사라졌고 홀로 남은 유지하는 생각에 잠겼다.
‘역시 그들은 인정하지 못하는군.’
우주괴물까지 나온 마당에 유지하의 얘기를 믿지 못해서는 아니겠고 자신들이 이룬 것들을 버리려니 두려운 거겠지.
과도하게 부풀어 오른 금융경제와 부동산, 문화, 그 외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총력전 체제에 들어서기는 쉽지 않다.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수도 서울의 값비싼 아파트를 보유한 사람이 그걸 팔고 메가시티에 영주권을 얻어 들어갈 수 있겠는가?
또한 유지하의 방식이 못마땅한 것도 있을 것이다.
민주의식이 투철한 국민이 인공지능에 의한 독재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
결국 지구는 아직 플레이그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 혼자 할 수밖에.
* * *
세계 각국은 유지하의 제안에 다양하게 반응했다.
미국이나 프랑스처럼 대놓고 회의적인 입장을 드러낸 곳도 있었고 러시아는 전면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그 외는 다소 머뭇거리는 듯했다.
우주에서 온 괴물을 직접 보고 인류가 멸망한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행동에 나서는 것은 꺼려했던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유지하의 계획을 따르자면 궁극적으로 주권까지 포기해야 한다.
독일은 UN과 같은 국제공조를 이끌어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왔다.
하지만 유지하의 입장에서 국제적인 공조는 쓸모가 없었다.
결국, 의미 있는 뭔가를 하려면 구성원 다수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플레이그와의 전쟁에서는 시간낭비에 불과했다.
결국 세계의 협력을 받아낸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만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고 인류연합의 에테르 연구소를 크게 확장하고 거기에 사이커를 유학시키는 정도의 교류는 이루어졌다.
사이커들에게 걸린 빗장이 풀린 것이다.
유지하에게 필요한 건 사이커가 아니라 유전자이므로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유전자를 확보해. 뭣하면 안드로이드 하나 붙여줘도 되고.”
그렇게 확보한 유전자는 바이오백을 비롯한 유전공학 시설에서 다양한 공정을 거쳐 사이커 시드로 거듭나게 된다.
그 시드를 다음 세대에 삽입해 인공 사이커로 만드는 게 유지하의 계획이었다.
이건 인류연합이 쓰던 방식이고 유지하가 혐오하던 것이지만 현재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무튼 이런 사실은 대중에겐 공표되지 않고 진행되고 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들은 만큼 기밀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건 무리지만 아직까진 잘 지켜지고 있는 모양.
다만 일부 계획이 유출되어 레딧 등지에서 심도 있게 논의되기도 했다.
―유지하가 기술을 양도한다고? 그것도 공짜로?
―설마 공짜겠어? 우리가 모르는 물밑거래가 있는 거겠지.
―내가 아는 사람이 사이커 연구소에 있는데 최근 사이커들이 꽤 자유로워졌다고 들었어. 여행도 가능하다던데.
―레일건에 이온 추진기에 아이언 빔… 이게 다 얼마야. 이걸 준다고?
―잘 생각해 봐. 그걸 준다는 건 더 이상 유지하에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야. 더 나은 뭔가가 있는 거지.
실제로 그랬다.
유지하는 각국의 사이커를 테라 섬에 초대하는 대가로 여러 기술을 공여하기로 합의했다.
플레이그가 출현한 이상 녀석의 사체를 분석하면 자연스레 여러 기술이 나오기 때문에 미리 생색을 내기 위함이다.
단 직접적인 공여가 아니라 안드로이드 기술진이 현지에 파견되어 개선점을 짚어주는 식이다.
하프늄2 폭약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미국이 극구 반대했다.
―하프늄2로 탄두를 만들면 전술핵이나 다름없다. 그걸 전수하는 건 곧 핵확산이다.
―우주에서 괴물이 오는데 핵확산 따위가 중요한가?
―우리에겐 중요하다. 다시 말하겠다. 다른 기술은 상관없지만 하프늄2는 절대 안 된다.
그러나 유지하의 고집은 미국조차 막을 수 없었다.
애초에 한국과 인류연합은 미국의 영향력에서 상당히 벗어난 상황이었기에 그들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테라섬에서 하프늄2 폭약 제조법 공여를 위한 기술협약 체결이 이루어졌고 미국은 함대까지 동원해 압박했지만 실질적인 뭔가를 해내지는 못했다.
사실 입자가속기와 사이커를 보유한 국가라면 하프늄2 제조가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에테르파를 정교하게 다루기엔 기술력이 모자랐고 탄탈럼 시세가 크게 올라 곤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 전량 공급받고 있는 한국은 그나마 나았지만 당장 콩고 공화국과 르완다에서 내전이 터지게 생겼다.
원래부터 콩고 공화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프랑스가 나섰다.
콩고의 질서를 회복하고 시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준다는 명분을 댔지만 진짜 목적은 탄탈럼 광산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지하가 각국에 하프늄2 폭약 제조법의 전수에 나서자 프랑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대체 무슨 대가를 받았기에 저런 걸 전수하는 건가?
―우린 하프늄2를 전력화하기 위해 110억 유로를 쏟아부었다! 독일은 유지하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고!
―하프늄2의 확산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 테러리스트에게 유출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프랑스 정부는 물론이고 언론과 군부에서 온갖 불만과 경고가 쏟아져 나왔지만 유지하에게는 다른 우주의 얘기로 들릴 뿐이었다.
하프늄2를 만들려면 에테르파 가속기와 잘 훈련된 사이커, 그리고 탄탈럼이 필요한데 테러리스트 집단이 가지는 건 불가능했다.
프랑스의 이런 불만은 인류연합이 훔쳐갔던 코쿤을 반환하면서 약간 사그라졌다.
비록 미국에 반환한 것이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입회하에 파괴하기로 했으므로 큰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유지하는 미국의 사이커를 얼마든지 초청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미국은 레일건과 이온 추진기 등을 상당히 발전시킨 국가였으므로 다른 미끼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코쿤을 훔쳐 달아났던 어스 플릿이 코쿤을 가지고 출항했다.
목적지는 미 대륙 동부에 있는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노퍽 해군기지였다.
이 반환 과정은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전체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왜냐하면 어스 플릿이 코쿤을 에테르 역장으로 고정시키고 비행했기 때문이다.
그 규모는 예전의 9척이 아니라 두 배가 넘는 20척이었다.
그러나 이걸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었다.
미국과의 마찰을 생각했는지 어스 플릿이 영공 주장을 할 수 없는 고도까지 올라가 버렸기 때문이다.
20여 척의 배가 진형을 펼치고 대기권을 비행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지만 대중에 일체 공개되지 않았다.
미국은 어스 플릿이 50km 고도에서 비행했다는 걸 알아차렸으나 따로 항의하지는 못했다.
거의 우주나 다름없는 고도여서 영공으로 주장하기가 좀 꺼려졌던 것이다.
그와 별도로 미군 내부에선 인류연합과의 기술력 격차에 진지한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50km 고도는 우주나 다름없다. 즉 어스 플릿 소속 군함은 배가 아니라 우주선이다.
―어스 플릿은 코쿤을 역장으로 묶어둔 채 태평양과 미 대륙을 2시간 안에 주파했다. 이런 게 가능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이런 기술을 가진 자가 우주에서 온 괴물이 두려워 국제적인 공조를 요청했다. 정말 괜찮은 건가?
미군의 의혹은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추론이었으나 정계는 이를 반쯤 무시했다.
그들에게도 나름 이유는 있었다.
유지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미국을 지탱하는 기둥을 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월가로 대표되는 금융시스템은 물론이고 거대한 부동산 시장과 전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까지 포기해야 한다.
유권자에게 표를 받아야 하는 정치인이 과연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정부나 학계에선 우주괴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고 이들은 유지하와 다시 이야기를 해봐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주류 의견은 아니었다.
미국엔 아직도 지구평면설을 믿고 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인구가 15%나 되다 보니 도저히 무시할 형편이 아니었고 이는 미 정부의 의사결정 프로세스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백악관에서는 세상을 통째로 뒤집는 변혁 대신 작은 쇼를 기획했다.
바로 우주에서 온 괴물을 연합함대가 때려잡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괴물에 대한 정보를 유지하가 전해주었기에 가능한 쇼였다.
―우주괴물은 앞으로 이틀 뒤면 코쿤에서 깨어난다고 한다. 주변에서 금속을 흡수하지 못했기에 예전보다 약할 게 분명하다.
―이 괴물을 우리 군이 때려잡는다면, 정부에 대한 지지가 높아질 것이다.
미국 내에선 우주의 괴물에게 지구의 주인이 누구인지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원래는 단독으로 하려 했으나 프랑스와 영국이 결사반대하고 나섰기에 고집을 꺾어야 했다.
미국은 이번 행사에 유지하 대통령이 참관하길 원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이에 대해 다양한 추측이 오갔으나 실제로는 흥미가 없었을 뿐이었다.
비스트급은 플레이그 중에서도 최약체이고 그 유생체에 불과한데 신경을 쓸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사이필드를 차단했으니 당장 본대가 쳐들어올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그렇게 버지니아주 앞바다에서 우주괴물이 다시 깨어났다.
녀석은 커다란 바지선 위에 영문을 모른 채 서 있다가 느닷없이 폭격을 얻어맞았다.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영국 함대에서 이륙한 전투기가 하프늄2 탄두를 떨어트린 것이다.
지근거리에서 세 발이 기폭되는 바람에 유생체의 육체가 순식간에 분해되었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플레이그와 용도를 다한 코쿤이 산산이 흩어졌다.
확인할 필요도 없는 즉사였다.
“와우!”
“좋았어!”
“이 괴물아! 지구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았겠지!”
쇼를 지켜본 많은 미국인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주요 언론에서 이 광경을 열심히 기사로 작성해 전파했고 세계가 하프늄2 탄두의 위력을 똑똑히 확인했다.
―저 정도 위력이면 다시 우주괴물이 와도 대응할 수 있겠지.
―확실히 미국은 초강대국이네. 프랑스는 이제 몇 발 만들었는데 수십 발이나 가지고 있었잖아.
―애초에 체급이 다르다니까.
지구에서 이런 떠들썩한 행사가 일어나고 있을 때, 유지하는 어설트 아머에 타고 화성의 기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음에 오는 유물이 초대질량 입자가속기던가?”
「네. 유물 중에선 가장 크고 중요하죠.」
반입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유물이니까.
현재로선 플레이그 군단에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걸 위해 화성엔 매스 드라이버를 개조한 캡쳐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기지가 들어서고 있었다.
어느새 5척으로 불어난 채굴선단이 중력 크레인으로 매리너 계곡을 깎아냈고 워커들이 동원되어 기지를 조립했다.
유지하가 고개를 들자 동기화환 어설트 아머의 헤드유닛이 똑같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야에 시비르 위성이 전해주는 정보가 나타났다.
지금 지구는 비스트급 플레이그를 죽인 걸로 축제 분위기였다.
방송에선 연일 우주괴물의 파괴력을 과장하기 바빴고 하프늄 탄두를 투하한 파일럿들은 유명세를 탔다.
비스트급 한 마리를 죽인 것치고는 좀 과하다 싶었지만 굳이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었다.
‘대혼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이군.’
유지하가 우려하던 건 대혼란이 일어나 사람들이 메가시티로 몰려드는 것이다.
테라섬 외에는 한참 공사 중이기 때문에 아직은 입주할 수 없고 그마저도 자격을 둘 예정이었다.
아무나 받았다가 안에서 내분을 일으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번 플레이그의 출현은 본대에 알려질 가능성만 빼면 유지하에게 상당한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눈치 보지 않고 기술을 꺼낼 수 있겠어.’
여태 눈치를 본 적은 없지만 각국이 의구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는 게 컸다.
대신 미국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대폭 상승했지만 그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지구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결국 미국과 싸워야 한다.
그들이 양보할 리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