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09
208화 돈을 내놔라
알테마호가 부유대륙으로 떠난 지 한 달이 지났다.
반다스 남작령은 전체적으로 포기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런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통신구까지 가져갔다고 하는데 그럼 실시간으로 보고가 올라왔을 거 아냐?”
“이쯤 됐는데 영주님 입에서 아무 말도 안 나온다는 건… 실패했다고 봐야지.”
“그런데 비행선 속도가 어떻게 되지? 아직 도착을 안 했을 수도 있잖아?”
다들 눈만 끔뻑끔뻑했다.
시골 영지가 대개 그렇지만 비행선에 대한 정보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확실한 정보는 딱 두 개였는데 하늘을 날고 운영비가 비싸다는 것 정도였다.
그것도 카슨 행정관이 한탄하는 걸 듣고서야 알아낸 것이다.
“행정관님만 안타깝게 됐지. 이제 배가 돌아오면 운영비 만들어 내야 하는데.”
“청어로 모처럼 돈 좀 만져 보나 했는데 공사하고 비행선에 다 털어 넣었으니 할 맛 안 날 거야.”
“행정관님 표정이 구겨져 있는 게 그래서였구만.”
“만약에 말이야, 비행선이 못 돌아오기라도 하면…….”
사실 그게 제일 큰 문제였다.
알테마호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긴 하지만 엄연히 왕가의 재산이었다.
그게 침몰당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유감 표명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카슨 행정관이 우려하고 있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물론 비행선은 비싸지만 현재 영지의 재력이면 충분히 충당할 수 있었다.
진짜 문제는 영주가 비행선이 출발하기 전 데노바의 상인들과 맺은 계약이었다.
‘대체 어쩌자고 그런 계약을 맺으신 건지…….’
바다 건너 남쪽에 위치한 상업도시 데노바는 꽤 이질적인 도시였다.
상인들은 정치적인 움직임에 휩쓸리지 않는 순수한 도시를 원했고 이게 꽤 먹혀 데노바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수많은 물자와 인재가 모여들었고 덕분에 데노바는 수십 년에 불과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성세를 구가했다.
지금의 데노바는 자체적인 군사력까지 거느린 대륙 최고의 상업도시였다.
듣기로는 데노바엔 100개가 넘는 회사와 그들에 투자하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한다.
일종의 주식회사 개념인데 카슨은 거기까진 이해했으나 권리를 사고 파는 것은 도통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이번 원정의 성공에 대한 권리를 사고 파는 것은 도대체 무슨 개념인가? 단순한 도박 아닌가?’
문제는 데노바의 상인들이 영지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영주와 만난 후 비행선의 부유대륙 원정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 마경에 도전하신다고요? 성공률이 높진 않겠군요.”
“하지만 나는 확신하고 있소. 알테마호는 그 이름답게 우리에게 영광과 부를 가져다줄 것이오.”
“골드 드래곤 알테마라… 영주님께서 그걸 믿으신다면 저희와 계약 한 건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무슨 계약을 말하는 거요?”
이쯤에서 상인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비틀리기 시작했다.
카슨은 그게 상인들 특유의 비웃음이라는 걸 알고 영주를 말리려 했으나 그는 자신이 알아서 한다며 홀로 계약을 진행했다.
덕분에 행정실에는 반다스 남작과 데노바의 남대륙 주식회사 사이에 체결된 계약서가 한 장 놓였다.
직인 두 개가 찍힌 서류 두 장에 담긴 내용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반다스 남작과 남대륙 주식회사는 상기의 계약에 합의한다.
―반다스 남작은 대륙력 1037년 3월이 지나기 전까지 2만 골드 이상의 화물을 남대륙 주식회사와 독점적으로 거래한다.
―남대륙 주식회사는 그에 대한 프리미엄으로 천 골드를 반다스 남작에게 지급한다.
―위약금은 투자금의 10%이며 알테마호의 화물은 양측이 공동으로 확인한다. 모든 시세는 만기일의 데노바 중앙거래소의 시세를 따른다.
이 거래 자체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미래의 화물을 앞당겨서 거래하는 것은 흔한 방법이었고 프리미엄을 얹어주는 것이나 위약금 10%도 통상 범위 내였다.
문제는 이 거래에 걸린 증권 상품이었다.
데노바에서선 이번 거래의 위험성이 높다는 핑계를 대고 수수료를 먹기 위해 증권을 발행했는데 영주는 성공 증권을 구입했다.
그러니까 이번 거래가 문제없이 성사된다는 쪽에 영지의 가용한 자금을 털어 넣은 것이다.
그 사실이 데노바 상인 쪽에 알려지자 수십 명이 부도 증권을 구입했다.
전체 상품의 규모가 3만 골드를 넘어가는 바람에 리스크를 우려한 데노바 중앙거래소에서 중재에 들어갔다.
하지만 레오볼드는 물러서지 않았고 확신한 상인들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그들은 승률이 100%에 가까우니 빚을 내서라도 자금을 대야 한다는 논리를 댔다.
“지금껏 부유대륙에 상륙한 자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엘브랑데에서도 수차례 실패했죠. 반다스 남작님의 힘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만, 성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난기류를 타서 부유대륙에 상륙할 가능성이 0은 아닙니다. 하지만 채권에 적힌 내용을 잘 보십시오. 만기 시에 2만 골드 이상의 화물을 거래해야 합니다. 온전히 돌아오리라 보십니까?”
“부유대륙에 자원이 많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3월 내에 그걸 캐서 가져오는 것은 알테마가 되살아날 확률과 비슷할 겁니다. 그러니 돈을 투자하십시오.”
“우리는 반다스 남작이 부도를 내고 야반도주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염려하고 있습니다. 해서 담보를 잡아두었죠. 암염광산의 수십 년 운영권과 골리앗 4기면 담보로 충분할 겁니다.”
상인들은 자신들이 패배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레오볼드가 제안한 것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담보로 남대륙 주식회사의 지분을 걸고 싶습니다. 선택권도 나한테 줬으면 좋겠군요.”
성공했을 시에 금화 대신 남대륙 주식회사의 지분을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상인들은 그 회사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살짝 불안해졌다.
“최근에 그 회사에서 남쪽 대륙의 독점 개발권을 얻은 걸 알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 치더라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지금까지 전례가 없잖습니까.”
“부유대륙 주둔부대의 장교에게 물어봤는데, 거기 위로 올라가는 건 자살행위라고 합니다.”
“질 수가 없는 싸움이군.”
그리하여 데노바 중앙거래소에서 정식으로 증권의 발행을 확정지었고 이제 양자는 3만 3천 골드에 달하는 판돈을 두고 도박을 하게 되었다.
이긴 쪽이 3만 3천 골드를 먹는 단순한 싸움이었고 여기에서 카슨 행정관은 절망했다.
“대체 어쩌려고 그런 증권을 구입하신 겁니까, 영주님…….”
데노바에서 제안한 공식 거래는 그나마 절망적이진 않았다.
위약금 2천 골드는 대단한 금액이지만 영지의 보유금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3만 골드는 반다스 남작령 같은 작은 영지에선 죽었다 깨어나도 만들기가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심지어 중앙의 고위귀족이나 바그란 왕가에서도 댈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안 그래도 전쟁으로 왕가에서 많은 요구를 해올지도 모르는데 이런 거래라니…….”
헹정관 입장에선 절망스러운 게 당연한 것이다.
어쨌든 데노바 중앙거래소의 공증을 받은 이상 거래를 무를 순 없었고 이제 한쪽이 파산하는 길밖엔 남지 않았다.
행정관은 그게 십중팔구 영주가 될 거라 생각했지만 일말의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여태껏 영주가 보여준 행보는 정신이 나간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만약 그가 모든 것을 계획했었고 데노바의 상인들을 털어먹기 위해 준비했었다면?
그러면 모든 것이 달라지겠지만 안타깝게도 3월이 다 지나가는 시점에서 대단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 흔한 알테마 호에서의 연락도 없었다.
“영주께선 출타 중이시고 아르마 양은 괜찮다고만 말하니…….”
그나마 행정관이 믿는 구석이 있다면 매사를 철두철미하게 챙기는 아르마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시중을 드는 하녀로만 보는지 몰라도 진면목은 완전히 달랐다.
그야말로 초인.
모르는 게 없었고 못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영지 내에선 돈 얘기라면 행정관을 찾아가야 하지만 그 외 영지의 전반적인 사항을 논의하려면 아르마를 찾아가라는 얘기가 있다.
체력도 엄청나서 어지간한 강행군에도 멀쩡했고 언제나 솔선수범해서 시범을 보였다.
무엇보다 영지민들의 얘기를 들어주다 보니 인기가 없을 수가 없었다.
카슨 행정관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물어봤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행정관님을 그분을 믿지 못하시는군요.”
“그게 아니라 답답해서 그럽니다. 최소한 알테마호와 연락이 되는지만이라도 알려 주실 순 있는 거잖습니까.”
하필 영주가 출타해 있는 바람에 서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르마뿐이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하나만 알려드리겠습니다. 행정관님은 3만 골드 혹은 남대륙 주식회사의 지분을 어떻게 쓸 건가 고민하면 됩니다.”
“그럼…….”
“거기까지만 말씀드리죠. 그리고 영지 내에 좋은 집을 하나 마련해야 할 것 같네요. 데노바에서 받은 프리미엄이 있으니 그걸로 짓도록 하죠.”
“손님이라도 오십니까?”
“그것도 아주 귀중한 손님이죠.”
그녀는 사라졌고 카슨 행정관은 그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시금 카슨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제 빚더미에 오른 왕가가 돈을 요구할 텐데 큰일이었다.
* * *
1년을 끌어오던 전쟁이 끝났다.
엘브랑데는 전선을 100km 이상 밀어붙였고 자이움을 비롯한 인간 왕국들은 그들의 공세를 버틸 여력이 없었다.
수백 대의 골리앗이 파괴되거나 오버홀을 필요로 할 정도의 손상을 입었고 각국이 입은 물질적인 피해도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엘브랑데는 예전처럼 잔혹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들은 보다 많은 전쟁으로 협상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쪽이 훨씬 수월했고 이익도 많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아무리 소수종족과 뭉쳐 대항해봐야 결국 근본적인 전투력은 우리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전멸시키는 것보다는 공세역량을 끊고 전쟁수행 의지를 단절시키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협상으로, 절대 양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시 전쟁을 할 의지와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 한다.
인간 왕국들은 야금야금 땅을 파먹고 협상을 종용해오는 엘프들에게 치를 떨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엘프들은 냉소적으로 그들에게 대응했다.
―승자는 패자를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고 너희들이 말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전쟁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다. 언제든지 와라.
당연하지만 인간 왕국들엔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다.
중심이 되는 자이움 제국마저 빨리 협상을 마무리 짓고 싶어서 난리였고 바그란의 국왕이 협상의 무대에 올라야 했다.
그리고 아주 굴욕적인 협상이 체결되었다.
―이스트하트 동맹과 엘브랑데 제국은 현 시점에서 국경선을 확정짓고 더 이상의 적대적인 행동을 중단한다.
―양측은 군대를 50km씩 물리고 그 안의 모든 군사설을 철거한다.
여기까진 크게 문제가 없었다.
전쟁 이전으로 영토를 물리지 못한 것은 엘프들이 이미 몇 개월 전부터 세계수의 가지를 심고 관리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거기에서 어떤 유물을 캐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바그란 3세는 최소한 그 유물을 공동으로 캐내자는 제안을 했지만 철저히 무시당했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협상은 지금부터였다.
―이스트하트 동맹은 알테마 숭배를 중단하고, 판테온에서 알테마의 신전을 완전히 철거한다. 이 사항에 대한 감독은 신성교국의 성녀와 엘븐 나이트 티렌델이 맡는다.
―이스트하트 동맹은 티렌델의 임무에 적극 협조하며 알테마 숭배자들을 잡아 가두는 데에 동의한다.
이 두 사항은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했던 자이움 제국마저 망설일 정도의 굴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스트하트 동맹에 엘븐 나이트가 들어와서 활동하겠다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거기에 알테마 숭배자들을 잡아 엘브랑데로 호송하겠다는 것은 내정간섭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알테마 숭배자는 드래곤 전쟁 후 200년이 지난 지금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판테온에서도 그녀의 자리는 구석에 처박혀 있었고 순례객도 대단치 않았다.
바그란 3세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경고했다.
“우리의 신이나 다름없는 알테마의 존재를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달려드는 거요. 절대 이 협상을 받아들이면 안 되오.”
대전쟁 당시 골드 드래곤 알테마는 명백히 인간의 편에 섰다.
엘프들은 인간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배하기 위함이라고 조롱했지만 그녀가 수많은 엘프를 죽인 건 사실이었다.
오죽하면 챔피언 학살자, 엘프 도살자라는 호칭이 붙었을까.
하여튼 엘프들은 다른 조건은 몰라도 알테마 숭배를 뿌리 뽑겠다는 것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알테마는 신이 아니라 단순한 짐승이다. 죽은 지 오래된 짐승을 인간들이 숭배하는 건 악습이다.
―우리가 그 악습을 뿌리 뽑겠다. 그러니 심판관을 방해하지 말라.
심판관으로 파견되는 티렌델은 2천 명에 달하는 엘븐 나이트 중에서도 상당한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프엘프라는 태생적인 약점에다 애꾸에도 불구하고 전장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려 다들 그를 두려워했다.
일각에선 그가 파견되는 이유로 다음을 꼽았다.
―역시 하프엘프라서 차별을 받는 게 분명하다. 엘브랑데와 본인은 결코 수긍하려 들지 않겠지만.
―그가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엄청난 증오를 끌어 모을 게 분명하다. 엘프랑데 입장에선 나중에 처분해도 손해가 없다.
엘브랑데에선 순혈 우드엘프와 하이엘프만이 대접받는다.
다른 종족은 거의 하등민 취급이었고 하프엘프는 그 중에서도 최악의 대우를 받았다.
엘프의 피는 결코 흐려져선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티렌델이 엘븐 나이트 중에서도 고위직에 오른 것은 오로지 실력으로 일궈낸 쾌거였다.
얼마나 실력이 뛰어나면 혈통을 중시하는 엘븐 나이트 사이에서도 추종자가 생겨날 정도였다.
―티렌델의 움직임에선 우아함까지 보인다. 전장에 그가 나서면 이미 승리는 확정된 거나 다름없다.
―그놈의 혈통만 아니었다면 대가문이 13개로 늘어났을 것이다.
여하튼 이스트하트 동맹에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기에 티렌델의 파견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내정간섭이 찝찝하긴 하지만 소수의 파견대이니 별일이야 있겠나 싶었던 것이다.
자이움 제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성교국의 빠른 결정에 사람들이 의아했는데 진실은 따로 있었다.
티렌델의 파견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바그란의 루아드 왕자는 신성기사단을 이끌고 내방한 성녀를 접견했다.
평범한 신관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그녀는 한 장의 초상화를 내밀었다.
“혹시 이 분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초상화 속에는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을 한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체격이 대단했고 외모도 훌륭했다.
루아드 왕자는 초상화를 흘깃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유감이지만 바그란에 이런 남자는 없습니다. 혹시 이 남자가 신탁의 주인공입니까?”
“네. 저는 거대한 배를 타고 아스테라로 오는 것을 직접 보았답니다. 그 배는 검은 철로 만들어졌는데 정말 어마어마하게 컸었죠.”
“대체 얼마나 큰 배이기에…….”
“제가 배 쪽은 잘 모르지만 다른 신관들에게 물어보니 500미터 이상이라고 합니다.”
루아드 왕자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무리 신탁이라지만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이움이나 엘브랑데에서도 구조적인 이유로 전장 100미터 이상의 배는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수의 껍질을 재질로 쓴다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엘프들이 지배하고 있는 마당에 가당찮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성녀 앞에서 부정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다른 세계에서 오는 용사라고 하니 뭐 그렇게 큰 배를 타고 올 수도 있겠죠.”
“네. 우리는 이 용사님을 꼭 찾아야 합니다.”
현재 신성교국에서 전력을 기울여 찾고 있는 이 남자를 세간에서는 용사라고 부르곤 했다.
참 오래된 호칭이고 사실 비웃는 자도 적지는 않았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용사 운운하느냐는 것이다.
“몬스터가 창궐하고 마왕이 세상을 지배하려 드는 때는 지났어. 지금 하늘엔 배가 날아다니고 있다고.”
“설사 다른 세계에서 용사가 온다 하더라도 엘프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
“그 용사가 우리 편이 된다는 보장도 없지.”
“그리고 신탁을 내려준 신이 누구인지도 모르잖아?”
신성교국에는 아스테라의 신들을 모시는 판테온이 존재한다.
이 판테온에선 성녀가 신탁을 받도록 되어 있는데 신에 따라서 그녀에게 내리쬐는 빛의 색깔이 달라지는 게 특징이었다.
드래곤 전쟁 이후 살아남은 신은 몇 되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 황금색을 상징으로 삼는 신은 없었다.
일설에는 창조신 라사가 직접 내려준 신탁이라고 주장했지만 존재감이 워낙 희미한 신이라 다들 믿지 않았다.
―라사는 신이 아니라 기원이고 규칙이야. 그러니 신성력을 가질 수는 없어.
―드래곤 전쟁 때도 조용했는데 이제 와서 신탁을 내려준다? 말이 안 되는 거지.
사람들의 라사에 대한 인식이 박한 이유는 그가 드래곤 전쟁 때 아무런 활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스테라 판테온은 대부분 각자의 의지에 따라 인간 혹은 엘프의 편을 들었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 활약상은 없었지만 노래와 전설 등으로 후대에 전해졌고 거기에서 라사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교단은 신탁이 지목한 남자를 찾는 데 필사적이었다.
“정말 이 초상화의 남자를 본 적이 없으신가요.”
루아드 왕자는 귀찮았지만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모든 귀족의 신상을 훑었지만 비슷한 남자는 없었습니다.”
“혹시 최근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젊은 남자는 없나요? 몇 개의 특징만 비슷해도 상관없습니다.”
순간 루아드 왕자의 뇌리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레오볼드 반다스 남작.
최근에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귀족이며 체격도 비슷했다.
다만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졌고 전체적인 이목구비도 초상화의 남자와는 영 닮지 않았다.
최근에는 청어로 제법 큰 돈을 벌더니 비행선까지 빌려가는 등 기행을 벌이고 있었다.
거기에서 기행이 멈췄더라면 관심이 끊어졌겠지만 대담하게도 상업도시 데노바와 도박을 했다.
겉으로는 증권이니 상품이니 치장했지만 루아드 왕자가 보기에 그건 도박이었다.
그것도 아주 위험한 도박.
‘성공한다면 큰돈을 벌겠지만 실패한다면 파산… 완전히 미친 자가 아닌가.’
대체 어디에서 그런 용기, 아니, 만용이 튀어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성녀는 신성기사단과 함께 바그란을 돌아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루아드 왕자는 재무국에서 정리한 서류를 보며 치를 떨었다.
“1년에 걸친 전쟁 끝에, 우리는 어마어마한 빚을 안게 되었군.”
전쟁은 절대 공짜가 아니며 엄청난 자원과 인력을 필요로 한다.
자이움은 전쟁을 강요한 주제에 보상 부분에선 할 말이 없다며 발을 뗐고 이제 바그란은 전비를 홀로 감당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4만 골드가 넘는 전비는 현재의 왕가로선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이 돈을 어디서 구하란 말이냐…….”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나올 구석이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귀족들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루아드 왕자는 서류를 움켜쥐고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노바의 빚쟁이들이 몰려들기 전에 귀족들의 영지를 돌아야 할 것 같았다.
* * *
대륙력 1037년의 3월을 이틀 남겨둔 날.
반다스 남작령은 데노바에서 온 손님들로 꽤 시끄러웠다.
영지민들은 그들이 머무른 덕분에 짭짤한 소득을 올렸지만 한편으로는 우울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이 빚쟁이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건 빚쟁이는 환영받지 못하고 그게 영주와 관련되어 있다면 더욱 그렇다.
부유대륙과 비행선 알테마호가 싣고 와야 할 화물에 대한 소문이 영지 내에 쫙 퍼졌고 이제는 어린아이도 알 수 있을 지경이 되었다.
영지민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저 하늘 너머에서 비행선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러나 3월의 마지막 날의 아침이 밝았을 때에도 비행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에 데노바의 상인들은 영주 저택으로 몰려가 자신만만하게 서류를 내밀었다.
“이쯤이면 승부는 난 것 같습니다, 영주님.”
“여기 이 선명하게 찍힌 직인을 보십시오. 설마 이걸 무시하시진 않으리라 믿습니다.”
다들 이 영지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되어 기쁜 얼굴이었다.
반다스 남작령에는 대단한 건 없지만 청어를 팔고 남은 여유금이 꽤 있는 걸로 알려져 있었고 암염광산과 골리앗 4대까지 존재했다.
그 권리를 합쳐서 채권으로 팔면 상당한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레오볼드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직 4월이 되진 않았잖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오.”
“그러지요.”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승부는 났다는 게 상인들의 생각이었다.
알테마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통신이 두절되었다는 걸 보면 뻔했다.
억지로 부유대륙에 상륙하려다가 난기류에 휘말려 어디엔가 추락했으리란 게 데노바 정보국의 추측이었다.
워낙 파편이 많이 떨어지는 곳인 만큼 알테마호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도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정오가 되어 상인들은 여관을 겸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주문했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이 영지를 가지게 되는군.”
“어떤 채권부터 발행할지 생각해 봅시다. 골리앗 4기가 쓸 만한 모양인데 바그란 왕가에 대여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나저나 이 청어 구이는 정말 끝내주는군.”
그들이 잡담을 하며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여관 1층에까지 확산되었다.
사람들이 뭐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왔다! 왔다고!”
“배가 돌아왔어!”
뭐가 왔다고?
상인들이 자리를 박차며 식당에서 나왔다.
영지민들이 가리키는 하늘에 배 한 척이 들어오고 있었다.
골드 드래곤의 선수상과 전체적인 외형을 보면 완벽한 알테마호였다.
“서, 설마…….”
“이건 말도 안 돼…….”
상인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