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21
220화 분노한 자
아스테라에선 흔히 차원은 두 개가 있다고 여긴다.
현실 차원과 에테르 차원이다.
전자는 아스테라의 여러 생명체들이 발을 디디고 호흡하는 그 세계다.
지구와 별로 다르지 않아서 아르마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분석할 것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4개의 천체가 어지럽게 얽힌 행성계는 확실히 흥미롭지만 당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테르 차원에 대해서는 아주 궁금한 것이 많단다.
왜냐하면 에테르란 에너지가 정확히 뭔지, 어떻게 작용하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면 아공간 마법이 있겠네요. 이 마법은 아공간 창고에 물체를 넣어둔다는 개념인데 질량까지 완전하게 숨길 수는 없답니다.”
“아공간에 넣으면 질량까지 숨겨지는 건 맞잖아? 고위기사들은 골리앗을 아공간에 넣어 다니니까.”
“정확히 말씀드리면 현실 차원에서 질량이 사라지는 건 대신 에테르 차원으로 옮겨가는 거랍니다. 그래서 아공간에 골리앗을 넣어둔 채 비행선에 탈 수는 없어요.”
“비행선이 안 떠오르나?”
“네. 부유석의 부유력에 비해 골리앗의 질량이 너무 무겁거든요. 지갈레온을 예를 들면 본체의 질량이 아공간에 있기에 그를 태운 비행선은 비행이 불가능합니다.”
“그런 문제가 있었군… 루시아는 어때?”
“루시아는 본체를 아공간에 넣는 개념이 아니라서요. 세틀러호에 있는 본체를 소환하는 거라서 전혀 문제가 없죠.”
“에테르 수신기의 원리에 가깝겠군. 둘 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거야.”
아직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되면 천천히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르마는 그 외에도 레오볼드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주문했다.
“마스터께서 골리앗에 탄 채로 적당한 기사와 육박전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왜? 전투 데이터는 원거리에서 뽑을 수 있잖아?”
“고위기사의 데이터를 확보하고 싶어서요. 에테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파악하면 마스터의 힘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 레오볼드는 상당히 이상한 존재였다.
근간이 되는 에테르 감응력은 엄청난데 비해 운용법이 전체적으로 영 어설펐다.
자동차에 비교하면 엔진은 V12에 6,000cc인데 토크 허용량이 형편없는 4단짜리 미션이 물려 있었고 RPM마저 제한되어 최대 출력을 짜내기가 힘들었다.
물론 이건 아스테라의 기사나 마법사가 볼 때 그렇다는 것으로, 우주에서 플레이그와 싸우는 것을 전제하고 유전자를 맞추고 능력을 개발해 왔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아르마에 의하면 기사만이 운용하는 독특한 에테르 체계가 있단다.
“여기에선 그걸 에테르 하트라고 부른답니다. 에테르 회로의 발전형으로 마법사는 또 그들만의 체계가 따로 있죠. 이걸 연구한다면 마스터의 진정한 힘을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녀도 여러 문헌을 가지고 따로 연구를 하겠지만 레오볼드가 직접 싸워서 얻어낸 것만큼의 데이터를 얻을 수는 없었다.
해서 그는 골리앗을 타고 자이움의 기사와 일대일 대결을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게 되었다.
영지라면 모를까 아무도 보는 이 없는 평원에서 말이다.
‘레일건 한 방 쏴주고 기사를 끄집어내면 되는데 귀찮게 되었군.’
능력을 개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니 해보는 수밖에.
레오볼드는 가슴팍의 봉인마법진을 문질러 지웠다.
에테르 회로를 봉인한 상태에서 자이움의 하이 나이트를 봐주며 싸울 수는 없었다.
‘이 녀석으로는 적당히 치고받는 게 더 힘들어.’
그가 탑승한 자간급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엘브랑데나 자이움의 골리앗과 비교해 보니 상상도 못할 쓰레기였다.
출력은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지 않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구동계와 프레임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났다.
‘알테마와 지갈레온의 차이와 비슷하겠군.’
어쨌든 레오볼드가 에테르 회로를 가동시키자 약간의 에테르가 자간급의 코어를 완전히 활성화시킨 것도 모자라서 프레임 사이로 넘쳐 흐르게 되었다.
덕분에 그의 골리앗은 마치 황금색의 기사처럼 보였다.
‘젠장, 에테르를 조금만 더 넣으면 코어가 쪼개지고도 남겠군.’
최대한 조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에밀은 골리앗이 번쩍이는 걸 보고 잠시 넋을 잃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눈앞의 자간급이 뭘 하든 그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적을 해치우는 것이 나의 사명…….’
그것이 이번 전쟁의 핵심인 반다스 남작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형태가 변하는 무기나 황금색 광채를 발하는 골리앗 등 수상한 점이 많았지만 그거야 무릎을 꿇리고 심문하면 되는 일이다.
그는 머릿속에서 상념을 지웠다.
베파르급 골리앗의 거구가 살짝 움츠리더니 창을 쥐고 폭발적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꽤 빠르군.’
[마스터, 이쪽입니다」아르마의 메시지와 함께 창의 궤도가 시야에 표시되었다.
공격이 닿는 시간까지 정확하게 나와 있어서 레오볼드로선 아주 편했다.
‘아르마의 지원이 있으니 전투가 아니고 게임에 가까운데.’
시야에 나타난 점에 의식을 집중하고 골리앗을 움직여 막아내기만 하면 되니 전투라고 하기에도 좀 민망했다.
코어 출력의 차이로 레오볼드의 골리앗이 뒤로 밀려나긴 했지만 큰 타격은 없었다.
에밀은 거기에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재차 공격을 이어나갔다.
파파파―
회색의 창이 화살이라도 된 듯 연달아 쏘아졌고 마지막 일격은 하늘에서 날아왔다.
무기끼리 부딪친 반탄력을 이용해 골리앗이 허공에서 회전한 것이다.
베파르급이 보기보다 무겁다는 걸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기예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오볼드에겐 너무 느리게 보였다.
‘일부러 딜레이를 줘서 합을 맞추는 게 생각보다 어렵군.’
용병들처럼 실력이 바닥도 아니라서 더 맞추기가 어려웠다.
쿵!
창대가 검은 창과 자간급 골리앗을 동시에 내려찍자 땅이 방사형으로 쪼개지며 충격파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에테르 파장이 감지되었습니다. 마스터께서 보여주신 에테르 블레이드와 비슷한 종류입니다.」
단지 파장만 같을 뿐 규모 면에서는 비교할 수도 없는 차이가 난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자이움의 하이 나이트쯤 되는 기사라면 자의로 무기에 에테르를 실을 수 있다는 것.
그게 눈에 보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위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카카칵―!
무기와 무기가 맞부딪치며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에밀은 자간급 골리앗으로 자신의 공격을 받아낼 수 있다는 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구동계가 부들거리면서도 용케 버티는 걸로 봐서 한계점은 아니었다.
‘자간 같은 쓰레기로 이 정도의 힘을 끌어내다니…….’
만약, 만약에 말이다.
반다스 남작이 베파르급 골리앗을 타고 제대로 된 실력을 낸다면 얼마나 강할까?
그때도 지금처럼 무기를 맞대고 평수를 이룰 수 있을까?
‘젠장!’
에밀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었다.
그는 자이움의 하이 나이트이고 엘브랑데의 기사들과 맞먹는 실력자였다.
‘나는 당신에게 질 수가 없단 말이다!’
분노를 끌어올리자 체내의 에테르 하트가 완전히 가동되었다.
전신에 에테르가 공급되며 그의 골리앗이 황금빛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레오볼드에 비하면 훨씬 정제되어 있었고 그게 바로 아르마가 노리던 것이었다.
「분석 시작합니다, 마스터. 최대한 전투를 길게 끌어주세요.」
‘그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을 것 같아.’
순간 회색의 창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가 있던 공간을 찔러 들어왔다.
레오볼드는 늦었다고 판단하고 창을 방패 형태로 변환시켜 막았다.
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창이 튕겨나갔지만 방패의 표면도 멀쩡하진 못했다.
놀랍게도 리빙메탈이 파손된 것이다.
「에테르를 한 점에 집중시켜 파괴력을 증강시켰군요. 놀라운데요.」
‘가능하면 나도 써보고 싶은데?’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합니다, 마스터.」
자료를 달라니 줄 수밖에.
레오볼드는 에밀의 골리앗이 자세를 가다듬는 틈을 타 품으로 뛰어들었다.
서로의 공격이 수차례 교환되었고 그때마다 리빙메탈로 이루어진 창은 상당한 손상을 입었다.
손상을 입을 때마다 금방 수복하긴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에밀의 공격은 그만큼 강했고 또 빨랐다.
「에테르 추진기와 비슷한 방법으로 공격의 속도를 증강시키는군요. 정말 놀라워요.」
플레이그의 기관을 인간이 모방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그러나 레오볼드는 그런 태평한 소리를 들을 처지가 못 되었다.
에밀이 말 그대로 미친 듯이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에테르 감응력은 멀쩡하지만 그걸 받아줘야 할 골리앗이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단시간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구동계가 맛이 가기 직전이었고 프레임 여러 곳이 삐걱거렸다.
소프트웨어가 아무리 좋아도 하드웨어가 쓰레기면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
레오볼드는 다급한 마음에 도움을 청했다.
‘혼자서 놀라지만 말고 나도 좀 도와줘.’
「바이오칩을 통해 마스터에게 에테르 회로의 운용법을 전송했습니다. 이거면 도움이 될 거예요.」
그게 뭔지 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시야에 선명하게 에테르 회로가 떠올랐고 오른쪽 가슴이 시큰해졌다.
‘뜨겁다…….’
가슴에서 시작된 고통이 전신으로 뻗어나갔고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창이 검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레오볼드는 검에 희미한 에테르가 입혀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게 에테르 블레이드군.’
명왕성 주역 전투에 비하면 형편없는 에테르지만 눈앞의 골리앗을 해치우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창을 향해 한 발 내딛으며 검을 아래로 그었다.
찬란한 황금빛의 검광이 창과 골리앗의 팔을 동시에 갈랐다.
스컥―
베파르급 골리앗의 창과 팔이 깔끔하게 절단되어 땅에 떨어졌다.
에밀은 처음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다가 골리앗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 비로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뭐, 뭐야 이거?’
허공에 선이 하나 그어지나 싶더니 팔이 날아갔다.
이건 대체 무슨 공격인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다시 공격이 들어왔다.
에밀은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검이 망치의 형상으로 변하는 걸 목격하곤 툴툴거렸다.
‘무슨 저런 무기가 다 있나 그래…….’
하지만 무기 때문에 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반다스 남작의 골리앗은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공격을 버텨냈으며 검에 에테르를 덧씌워 마침내 베파르급 골리앗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쾅!
폭음과 함께 베파르급의 복부 장갑이 뭉개지며 뒤로 날아갔다.
기사 에밀은 전신을 강타한 충격에 기절하고 말았다.
레오볼드는 그제야 망치를 창의 형상으로 바꾸고 한숨을 돌렸다.
“맞춰주는 것도 힘들군 그래. 데이터는 좀 모았어?”
「조금은요. 에테르 하트의 구조를 파악하려 했는데 거기까진 이르지 못했네요.」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겠지. 에테르를 검에 실을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걸로 충분해.”
사이커 중에는 블래스터도 있고 주먹에 에테르를 실어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능력자도 존재한다.
하지만 몸이 아닌 무기에 에테르를 실을 수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직접 쥔 무기가 아닌 골리앗이 쥔 무기에.
레오볼드는 통신구를 통해 비행선에 신호를 보냈다.
자이움에서 온 기사는 자간급 골리앗과 비행선에 실어 보내고 베파르급을 조종해 영지로 갈 생각이었다.
사실은 탐사정의 도움을 받겠지만.
잠시 후 비행선이 떠올랐고 레오볼드는 베파르급을 올려다봤다.
“이제 이 녀석을 타면 되겠군.”
에밀은 적당한 금액을 약속한다면 돌려주겠지만 골리앗은 안 돌려줄 생각이었다.
프로잔 후작이 길길이 날뛰겠지만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졌으면 입 다물어야지. 그건 그렇고 이 마법진을 지우면 아무나 탈 수 있다고 그랬나?”
「조금 오른쪽에 새겨진 마법진이에요.」
“루시아가 준 아티팩트가 어디 있었는데…….”
마법진을 지우고 골리앗에 탑승한 그는 넘치는 코어의 출력에 만족했다.
“자간급과는 비교가 안 되는군. 앞으로 잘 부탁한다, 딩고.”
* * *
바그란 왕궁에 불길한 소식이 전해졌다.
오하멜 남작령에 비행선이 날아들어 완전히 박살 났다는 것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선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비행선과 영지가 박살 나는 것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남작 소유의 비행선에는 에테르 캐논이 없고 있다 하더라도 제한적인 위력밖에는 발휘하지 못하는데.
답답해진 란티스 백작은 정황을 자세하게 알아보라고 측근들을 닦달했고 그제야 진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오하멜 자작령을 급습한 비행선 2대에 골리앗 2대가 탑재되어 있었음.
―현재 오하멜 자작의 죽음이 확인되었고 그 외 주요 관료나 군사 지휘관들은 포로 신세가 됨. 따라서 오하멜 자작령은 반다스 남작의 손에 넘어갔음.
―자작의 병력은 이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예정대로 반다스 남작령을 공격할 것인가 회군할 것인가로 갈팡질팡하고 있음.
―자이움에서 온 하이 나이트 에밀의 행방이 묘연함.
“그러니까 요약하면…….”
“전쟁에서 졌군.”
루아드 왕자가 이죽거리자 작은 주먹을 부르르 떨며 분노를 참고 있던 이올린이 까무러치고 말았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한 것이다.
란티스 백작은 상황을 정리해 놓은 서류를 와락 구겼지만 그런다고 나아질 리는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비행선에 골리앗을 탑재할 수 있지?”
“그건 나도 궁금하군. 아공간을 열 수 있는 고위기사라고 해도 에테르 간섭 때문에 힘들 텐데.”
골리앗을 아공간에 숨기더라도 질량까지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에 비행선에 타봐야 의미가 없었다.
경량화를 이뤘거나 부유력을 증강시킨 게 분명한데 둘 다 알려지지 않은 방법이었다.
루아드 왕자가 기분 좋은 반면 란티스 백작은 미친 듯이 주위에 연락하기 바빴다.
“오하멜 그놈은 나중이다! 하이 나이트부터 찾아!”
“용병 놈들이 나한테 차후의 일정을 물어본다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지휘관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루아드가 보기에 란티스 백작은 이번 일의 주동자였다.
본인이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그것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새 자이움에까지 소식이 닿았는지 프로잔 후작의 연락이 날아왔다.
“에밀이 뭐가 어떻게 됐다고? 사망한 거요? 아니면 행방불명?”
“송구스럽습니다, 후작님. 최대한 빨리 기사의 행방을 찾겠습니다.”
상대가 눈앞에 없음에도 연신 굽실거리는 란티스 백작을 보며 루아드 왕자는 진심으로 암담해졌다.
“전하의 신하들이 자이움의 힘을 빌어 멀쩡한 귀족 하나를 박살 내려다가 오히려 당하게 생겼군.”
“…….”
란티스 백작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통신구에서 손을 떼었다.
왕자의 질책이야 감당할 수 있었으나 앞으로의 일은 절대 그냥 넘기기가 힘들었다.
오하멜 자작을 포함한 귀족 다수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그 넓은 자작령이 가증스러운 반다스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는 혀를 차는 루아드 왕자에게 허리를 숙였다.
“저하, 거친 용병들이 황금 핏줄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손에 자작령이 넘어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용병들도 반다스 남작의 부하 아니오? 그렇다면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이건 영지전이고 관례에 따르면 진 쪽은 모든 것을 넘겨 주기로 되어 있잖소.”
“수십 년 전의 얘기입니다. 전하께서도 이번 일의 정황을 아시면 용납하지 않으실 겁니다.”
“자이움을 끌어들여 반다스 남작을 치려 한 백작의 의도도 아시게 되겠지. 그걸 원하시오?”
“…….”
란티스 백작은 숨을 멈췄다.
잘 생각해보니 이건 바그란 3세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그 어느 왕이 다른 국가의 간섭을 껄껄 웃으며 받아들인단 말인가.
불똥이 공주에게까지 튀지는 않겠지만 근신은 확정적이고 자신의 입지도 위험했다.
무엇보다 휘하 가신들의 시선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오하멜 자작을 내세우고 뒤로 빠졌는데 정작 그가 영지를 잃고 사망했으니 앞으로 백작의 발언에 힘이 실릴 리가 없었다.
현 상황에서 돌파구는 하나뿐이었다.
그는 루아드 왕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십시오, 저하. 바그란의 신하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손을 뻗어주십시오.”
“그걸 조금 일찍 말했으면 좋을 것 같지 않소? 아무튼 나로서는 반다스 남작을 제지할 수 없소. 애초에 개입한 적이 없으니까.”
“…….”
란티스 백작은 패배감에 말없이 고개를 떨어트렸고 루아드 왕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작령을 넘겨주는 선에서 끝냅시다. 그곳이 동부에서 좋은 입지이기는 하나 수십 년 동안 발전한 게 없잖소. 반다스 남작의 손에 들어가면 뭔가 달라질지도 모르지.”
“프로잔 후작에 대해서는…….”
“그건 내가 중재를 해보겠소. 남작이 하이 나이트를 죽이지 않았기를 빌고 있으시오.”
만약 죽었다면 프로잔 후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 * *
“…….”
데노바에 와 있던 지온은 불온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신의 정체를 눈치채서가 아니었다.
‘루시아의 아티팩트는 과연 확실하군. 내 거대한 에테르를 감쪽같이 감출 줄이야…….’
지상에서 요정을 구경한 지도 꽤 되었는데 어쩌다가 레오볼드 같은 불한당에게 붙잡혔는지 모를 일이었다.
애교가 많은 건 원래 성격인가?
요정은 하나같이 성격이 괴팍하다고 들었는데 좀 이상했다.
어쨌든 지온은 난리가 난 중앙거래소에 앉아 있다가 불손한 몇몇 목소리를 들었다.
“뭐? 오하멜 자작이 졌다고? 다시 연락해 봐! 확실한 출처를 요구해!”
“자작의 죽음이 확인되었습니다! 현재 반다스 남작령 소속의 용병 두 명이 영지를 점거했다고 합니다!”
“용병 둘로 자작령을 점령했다는 건 누구의 망상이야?”
“비행선으로 골리앗을 실어 날랐답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직원들은 정신없이 날아드는 정보를 취합하는 데 바빴다.
투자자들도 여기저기 연락하느라 완전히 영혼이 가출한 듯했다.
아마 오늘 중앙거래소에서 쓴 통신구만 해도 상당할 것이다.
이렇게 중앙거래소가 뒤집어진 가운데 필리프 시장이 직원들을 대동하고 지온에게 왔다.
지온은 시장의 인장이 찍힌 증권서류 수십 장을 흔들어 보였다.
“드디어 소식이 도착한 모양이군. 내 투자금은 총 1만 골드에 배당은 더 높아져서 14배, 레버리지는 10배야.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 기억합니다.”
필리프 시장의 목소리는 거의 쇳소리처럼 들렸다.
하기야 140만 골드를 토해내게 생겼으니 고심이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장이 지불하는 건 아니지만 상인 수백 명의 파산은 곧 데노바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뜻했다.
“돈 내놔.”
그가 손바닥을 쫙 펴서 내밀자 필리프 시장은 물끄러미 그걸 쳐다보다가 겨우 웃음을 머금었다.
어쭈, 웃어?
“서류는 면밀하게 검토하셨습니까?”
“증권 서류? 누굴 바보로 아나? 전부 다 검토했어. 문제는 전혀 없으니까 돈 내놓으라고.”
지온의 목소리가 점점 올라가려 할 때 필리프 시장이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혹시 만기일도 적혀 있던가요?”
“무슨 기일?”
“금액을 언제까지 지급한다는 만기일 말입니다.”
“…그런 건 없는데?”
“저런. 그러면 저희도 지급을 늦출 수밖에 없군요. 아, 이건 지급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
그러니까 떼먹겠다는 뜻이다.
데노바는 이미 반다스 남작과의 거래를 한 차례 무산시킨 바 있다.
이제 완전히 인연이 끊기고 신뢰가 추락하겠지만 140만 골드를 변제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필리프 시장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지껄였다.
“원금에 더해 1만 골드 정도는 융통해 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 천천히 기다려 주십시오. 언젠가는 지급을 할 테니까요.”
그가 사라졌고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지온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이 새끼들이?’
블루 드래곤 지갈레온이 진심으로 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