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43
242화 내 밑으로 네 위로
이올린은 약혼자의 통보를 들었음에도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가 있으리라 믿었다.
그녀는 공주이고 장차 바그란의 왕좌에 오를 계승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오볼드가 준비해 놓은 함정은 그녀의 예상보다 더 위험하고 치밀했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라는데요? 어떻게 하죠? 후작?”
“이것 참 난감하군요…….”
타운젠트 후작마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정도로 난감한 함정이었다.
이올린 공주와 프로잔 후작의 혼약에 관한 것은 이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다만 자이움의 내부 사정이 워낙 엉망이었기에 함부로 나서지 못할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직접 나섰다는 건…….
타운젠트는 이 일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공주님, 자이움에 가서도 강녕하시길 충심으로 빌겠습니다. 그럼…….”
이올린은 눈을 치켜뜨고 그를 잡았다.
“어딜 가는 거죠?”
“약혼자께서 나서시는데 제가 할 일이 있겠습니까? 영지로 돌아가 본분에 충실하려 합니다.”
“결국 경의 충심과 힘이란 건 그 정도밖에 안 되었나 보군요.”
교묘하게 자존심을 긁으려 했지만 타운젠트 후작은 나서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공주님, 프로잔 후작의 두 번째 발언을 귀담아 들으셔야 합니다.”
“흉수가 반다스 백작에게 제압당했다는 거요? 그게 뭘 어쨌다는 거죠?”
“현재 바그란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즉 반다스 백작은 프로잔 후작과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뜻이죠. 최소한 흉수가 타고 있던 골리앗의 잔해를 넘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뜻밖의 말에 이올린은 입을 벌렸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반다스 백작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구나 싶어 불쾌했던 것뿐인데 사실은 보다 깊은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타운젠트 후작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발언을 이어나갔다.
“황제가 암살된 마당에 프로잔 후작이 흉수의 무언가를 확보했다는 건 그의 입지가 강화되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흉수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거기에 흉수가 타고 있던 골리앗을 가져온다면 황족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겠군요…….”
“더불어 반다스 백작도 유명세를 타겠죠. 저 작은 나라에 하이 나이트도 당하지 못한 암살자를 처치한 기사가 있다는 식으로. 그런 상황에서 프로잔 후작이 직접 나섰는데 허투루 일을 처리하려 들까요? 영지의 전 병력을 동원할 것이 뻔합니다.”
이올린은 이 대목에서 이를 앙다물었다.
“그러니까 나는 얌전히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가요?”
“빠져나갈 길이 안 보이는군요. 그리고 저 또한 둘과 대립각을 세우고 싶진 않습니다.”
후작이라고 하지만 제국의 후작과는 힘 자체가 달랐다.
거기에 레오볼드라는 인물 또한 결코 경시할 수 없었다.
둘을 상대할 순 없으니 얌전히 꼬리를 내리고 도망갈 수밖에.
더욱이 그는 이올린 공주에게 부군 운운한 적이 있었다.
왕도에 있는 것을 프로잔 후작이 본다면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비겁자!”
“뭐라 말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타운젠트 후작이 측근들을 이끌고 왕도에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왕도에 있는 그의 추종자 소수였고 그들마저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이올린의 지원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최소한의 인원을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레오볼드가 전세를 내어 머물고 있는 여관이었다.
벌써 소문이 났는지 왕도의 유력자와 영애들이 만나 보겠다고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누가 봐도 권력의 축이 그에게 기울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올린이 나타나자 그들은 썰물처럼 여관을 빠져나갔다.
“…….”
“공주님께서 이 누추한 곳에 어쩐 일로… 일단 앉으시지요.”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기에 이러는 거죠?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간 자신이 잘못한 점은 모조리 잊어버린 뻔뻔한 발언이었다.
레오볼드는 그걸 지적하는 대신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승자는 이미 결정됐으니 이 작고 연약한 공주님을 몰아붙일 필요는 없었다.
“약혼자가 별로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군요.”
“그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에요. 이대로 바그란을 떠날 수가 없어서 그래요. 내 나라잖아요. 내가 주인이라고요.”
“맞습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뭐… 라고요?”
레오볼드는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국왕 전하와 왕자 저하께서 승하하신 현재, 이 바그란의 정통 계승자는 이올린 공주님이죠. 저도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공주께선 프로잔 후작과의 혼약을 깰 수가 없습니다, 그렇죠?”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에 이올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 지금도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프로잔 후작은 충분히 대단한 사람이고 그녀가 미래를 맡길 만한 귀족이었다.
그의 후원으로 자이움의 사교계에 데뷔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말이다.
다만 바그란을 완전히 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아델라가 아니라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레오볼드는 그런 그녀의 망설임을 파고들었다.
“공주님께선 바그란을 완전히 떠나는 게 아닙니다. 잠시 동생에게 맡겨놓는 것뿐이죠. 저는 그것을 관리할 책임을 지고요.”
“맡긴다라… 언제든지 내게 돌려주겠다는 의미인가요?”
“저는 공주님의 오라버니인 루아드 저하께 맹세했습니다. 바그란에 충성을 다하고 그 이름을 버리지 않기로.”
“하면 왜 그를 부른 건가요?”
“공주님에게서 타운젠트 후작을 떼어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두쇠에 옹졸하고 나이까지 많습니다. 그런 자가 공주님의 부군이라고 선언하는데 화가 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분을 언급하자마자 떠나는 저 꼴을 보십시오. 그는 결코 공주님께서 마음을 맡길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난 누구를 믿어야 하는 거죠?”
“저를 믿으십시오.”
레오볼드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손등에 키스했다.
지금까지 내내 적대해 온 사이였음에도 이올린은 그의 선명한 눈동자에 빠져들었다.
“저를 믿고 자이움에서 편히 지내십시오. 왕궁을 훌륭하게 재건하고 바그란을 성장시켜 놓겠습니다. 공주님께서는 적당한 시기가 되었을 때 그걸 가지러 오시면 됩니다.”
진심 어린 목소리에 이올린은 홀딱 빠지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왕가가 몰락한 뒤 그녀에게 이런 비전을 제시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단지 엉망이 된 바그란을 어떻게 주워 먹을 수 없을까 탐내던 놈들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적대하기만 하던 반다스 백작이 충심을 잃지 않으니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레오볼드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며 말했다.
“그때까진 바그란을 맡아 두고 있겠습니다. 아델라 님은 제가 좋은 혼처를 봐두지요. 그러면 되겠습니까?”
완벽하다.
이올린은 그에게 키스를 퍼부어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대신 그의 목과 어깨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예전엔 이런 상처가 없었는데… 흉수와 싸우다 얻은 건가요?”
“제 실력은 비록 미천하지만 왕가에 위해를 가한 자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이제 이올린은 완전히 그를 믿게 되었다.
“레오볼드 경, 당신을 믿고 다녀올게요.”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자이움 제국은 너무 화려하고 거대한 곳이라 공주님께서 마음을 빼앗기실지도 모르니까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참, 공주님의 거처에 보석 세트와 드레스를 주문해 놓았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군요.”
어쩜 이렇게 황홀한 말만 할 수 있을까.
이올린은 들어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되어 여관을 나갔다.
이로서 혹 하나가 깔끔하게 떨어졌다.
그녀는 언젠가 화려하게 복귀할 날을 꿈꾸겠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레오볼드는 머릿속의 리스트에서 이올린 바그란을 지웠다.
* * *
프로잔 후작은 약속대로 직접 이올린 공주를 데리러 왔다.
비행선만 10대에 수백 명의 병력이 동원된 대단한 행사였다.
그는 레오볼드와 악수를 나눈 후 뜻밖이라는 얼굴로 물었다.
“공주의 표정이 밝아 보이는데 어떻게 된 일이오? 완전히 죽을상인 줄 알았는데.”
“자이움의 사교계에 데뷔할 생각에 들뜨신 모양이지요.”
구워삶았군.
이 음흉한 남자의 능수능란한 혓바닥에 공주가 철저히 놀아난 게 분명했다.
저 근심이라곤 한 조각도 없어 보이는 철없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프로잔 후작은 로제론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아무리 제국의 대귀족이라고는 하나 대병력을 이끌고 주인 없는 곳에 오래 머물렀다간 진의를 의심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화려하게 치장한 이올린 공주를 데리고 떠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그들을 배웅했다.
그렇게 행사가 끝난 로제론은 조용한 가운데 약간의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레오볼드가 본격적으로 섭정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나 레오볼드 반다스는 아델라 공주님을 바그란의 차기 국왕으로 추대할 것을 선언한다. 단, 아델라 님의 연령이 아직 어린 것을 감안하여 섭정으로서 보좌하고자 한다.”
로제론의 유력자들이 혼란에 빠졌다.
바그란의 역사에서 섭정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코덱스를 뒤지면 어딘가에 한 구절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걸로 섭정을 선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거기까진 이해할 만했다.
이올린 공주와 타운젠트 후작 등 구심점이 사라진 상황에서 로제론을 책임질 만한 귀족은 반다스 백작뿐이었다.
서부에 대영주가 꽤 있고 로제론에도 중앙귀족이 많지만 빚이 문제였다.
바그란 왕가는 왕족의 장례식을 치르느라 상당한 돈을 썼다.
거기에 왕궁의 재건 자금과 사망한 자들의 보상금까지 합하면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최소 5만 골드 이상이 들어가야 하는데 누가 낼지…….
―왕가의 재정 상황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고 돈 나올 구석이 없지요.
―사그리스 은광이 있긴 한데 반다스 백작이 빠지고 나면 들어갈 사람이 없어. 하루에 몇 명이 죽어나가는데 이 시국에 감당이 되겠나?
결국 상인들에게 빚을 져야 한다는 뜻인데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아델라는 뒤늦게 그걸 알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레오볼드 님의 힘이면 해결할 수 있죠?”
“저만 믿고 편히 지내십시오, 공주님.”
어린 그녀의 눈에 레오볼드는 든든한 후원자 그 이상의 존재였다.
언니도 떠나고 왕실을 어찌 꾸려갈지 막막했는데 그가 등장하고부터 체계가 잡히는 게 느껴졌다.
인재와 자원, 그것을 아우르는 지시가 딱딱 맞아떨어지니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당장 왕궁 재건 계획도 선금이 지급되자 건축가들이 서로 나서 진행하려고 했다.
그렇기에 아델라는 국왕의 직인을 그에게 맡겨 버렸다.
이제 레오볼드의 지시는 곧 국왕의 지시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그란 개편을 놓고 아르마와 본격적인 의논에 들어갔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바그란 시에 대단한 기술을 투자할 필요는 없습니다. 토질이 괜찮고 바다도 있으니 농업과 어업 쪽으로 특화하는 게 나아요.”
둘은 아스테라 대륙 전체를 하나로 묶어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에 따르면 바그란의 영토는 질적인 면에서 나쁘지는 않으나 너무 구석에 처박힌 게 문제였다.
아무래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 시설을 유치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우주관련 산업도 좀 그렇고… 역시 농업 쪽으로 특화할 수밖에 없겠군.”
아르마의 로드맵에 의하면 아스테라 전역엔 여러 개의 핵심시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그중 하나가 로제론이고 앞으로 세계 정복을 위한 기반이 될 것이므로 식량에 특화된 산업을 배정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땅이 걸림돌이었다.
아르마의 손가락이 지도에 선 몇 개를 그렸다.
“현재 로제론 주위엔 몇 개의 위성도시와 영지가 존재합니다. 이들은 엄연히 직할령에 속했으나 전 왕자가 여러 중앙귀족에게 불하했습니다. 돈 때문이죠.”
중앙귀족은 레오볼드 같은 영주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지배하는 영지가 없으며 주로 왕도에서 관료 생활을 한다.
거기까진 문제가 없는데 루아드 왕자가 돈이 부족해 왕도 직할령을 넘겨버렸다.
소유권을 완전히 이전한 건 아니고 빌려준 것이지만 언제까지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보니 회수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관련 서류는 있나?”
“서약서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구두로 합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거 골치 아프군.”
따로 서약이 존재한다면 위약금을 물고 영토를 받아오면 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구두약속을 한 경우에는 함부로 회수할 수가 없었다.
“힘으로 밀어붙이긴 좀 그런데…….”
섭정이 시작부터 힘으로 밀어붙이면 민심이 동요할 우려가 있었다.
중앙귀족들이 작정하고 저항하면 여러모로 골치 아픈 게 사실이었다.
레오볼드는 유력자들의 목록을 보다가 뜻밖의 성을 발견했다.
아이혼 그람 백작.
현재 레오볼드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 기회만 엿보고 있는 자다.
중앙귀족인 만큼 대영주의 위세는 갖고 있지 못했으나 왕도의 유력자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상당히 컸다.
그가 그람 제국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그람과 같은 성인가?”
“네. 그람 제국에서 이어져온 유서 깊은 성씨입니다. 불행히도 제국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영지를 잃고 중앙귀족 신세가 되었지만요.”
“아이혼 그람 백작이라… 직계인지 방계인지가 중요하겠군.”
“세 왕국에서 서로 직계라고 주장하고 있어서 큰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발가드라면 이자를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람 황가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으므로 찍소리도 못하겠죠. 단 비밀을 밝혀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선조가 조용히 하라고 하면 입을 다물 거야.”
발가드 그람은 그람 제국 황가의 일원으로서 현재 세 국가에 퍼진 그람 가문의 까마득한 선조였다.
그걸 증명할 수만 있다면 일이 의외로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어떻게 증명하냐가 문제인데…….”
“예전에 물어본 바에 의하면 그람 황가는 에테르의 운용에 있어서 다른 가문과는 조금 다르다고 합니다. 가문의 일원이라면 그 비전을 알아볼 수가 있다네요.”
“그럼 바로 알아보겠군, 됐어.”
머리만 치면 나머지는 지리멸렬할 것이므로 크게 문제되는 부분은 없을 것이다.
남은 건 그렇게 회수한 땅을 어떻게 쓰는가였다.
“식량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선 비료공장과 비료를 대량으로 실어 나를 교통 플랫폼이 필요합니다.”
“에테르 기차를 전역에 깔아야 되겠군.”
비행선이 있지만 아무래도 부유석의 공급과 비행선 자체의 중량 제한 때문에 운임이 상당히 높았다.
“고부가가치 화물은 비행선으로, 나머지는 기차로 나르면 되겠네요. 궤도는 이런 식으로 바그란 전역에 깔 예정입니다.”
동부는 그럭저럭 모양이 나왔지만 서부가 문제였다.
상당히 규모가 크고 번화한데 확고한 주인이 있어서 손대기가 까다로웠다.
“대영주들이 자기 땅을 순순히 바칠 리는 없을 테니 고생 좀 하겠어.”
“란티스의 최후를 봤으니 절대 외부와 손을 잡는 등의 행동은 하지 않을 겁니다. 거북이처럼 움츠리고 있겠죠.”
방법은 두 개뿐이었다.
찍어 누르거나 암살을 하거나.
“일단 로제론부터 확보하고 보자고.”
현재 레오볼드는 동부의 지배자였지만 로제론까지 확보했다고 할 순 없었다.
그걸 위해선 몇 가지 조치가 필요했고 그는 섭정의 명의로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거기엔 불하한 왕가 직할령을 회수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반발이 터져 나왔다.
* * *
“이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아이혼 그람 백작은 서류를 흔들며 분통을 터트렸다.
얼마 전 섭정이라는 자가 발표한 직할령 회수 정책이 문제였다.
2개월의 유예를 주고 푼돈을 받고 땅을 반납할 것인지 그냥 회수당할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거였다.
땅을 임대한 유력자들 입장에선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투자한 돈이 얼마인데 그걸 날로 먹겠다고……!”
당연하지만 레오볼드와 아르마는 그 땅에 얼마를 투자했는가는 관심이 없었다.
싹 치우고 새롭게 개간해야 하니 어떤 시설물이 있든 쓰레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걸 모르는 입장에선 날도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아이혼 그람 백작은 측근들과 대책을 논의했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섭정의 의사가 확고한 것 같습니다. 몇몇이 가봤지만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직인까지 가지고 있다 보니 왕명을 발동하면 그만입니다. 아델라 님도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계시고요.”
“으음…….”
그러나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섭정이라 한들 혼자서 이 로제론을 지배할 수는 없는 법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인재의 조력이 필요한데 그들이 돌아서면 섭정도 난처해질 거라는 게 아이혼 그람 백작의 생각이었다.
“이 통보는 나 외에 몇 명이 받았지?”
“직할령을 불하받은 유력자들 모두에게 간 것으로 압니다.”
“그들에게 위임장을 받게. 내가 이번 건을 해결한다고 말일세.”
“백작님, 혹시 파업을 계획하시는 겁니까?”
“위험하지. 하지만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왕도의 유력자들이 동시에 일손을 놓는다면 그의 지시도 공중에 붕 떠버리게 되지.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거야.”
그걸 현실화하기 위해선 유력자들의 총의가 필요했고 위임장이 제격이었다.
흙은 뭉쳐봐야 흙이지만 물에 개어 밀짚을 넣고 구우면 단단한 벽돌이 되지 않는가?
“대단한 요구를 할 생각은 아니야. 단지 그에 맞는 보상을 지급하라는 거지.”
“옳은 말씀이십니다.”
“저희가 가문을 돌며 위임장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수십 장의 위임장이 모였다.
아이혼 그람 백작은 그것을 들고 섭정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웬 덩치 큰 대머리 남자가 구석에 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큰 칼을 차고 있는 걸로 봐서 섭정의 호위인 것 같았다.
“섭정 각하. 위임장을 가져왔습니다. 로제론 귀족들의 총의입니다.”
“…….”
위임장을 대충 훑어본 레오볼드는 그에게 대뜸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들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파업을 하겠다, 그 얘기요?”
“적당한 대가를 받으면 즉각 철회할 것입니다.”
“그동안 직할령을 가지고 해먹었으면 됐지 뭘 더 이상 바란단 말이오?”
“루아드 저하와의 약속이었습니다. 섭정 각하께서 그걸 염두에 두지 않으신다면 저희를 무시해도 큰 상관은 없습니다.”
설마 네가 그럴 수 있겠냐는 비웃음이 담긴 발언이었다.
레오볼드도 유력자들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어쨌든 일을 하려면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군. 위임장이라… 즉, 경만 설득하면 이 수십 개 가문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뜻 아니오?”
“포, 폭력이나 협박에 굴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소. 하지만 이래서야 돈을 줄 수가 없겠군. 마지막 기회요. 이 돈을 받고 끝내든지 강제로 회수당하든지 선택하시오.”
숨 막히는 위협에 아이혼 그람 백작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그러시다면 제 가문을 포함한 로제론 전체의 에테르 혈통이 손을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어지간하면 쓰지 않으려 했는데… 발가드, 자네가 나서줘야겠어.”
“젠장, 내 이름을 이런 조무래기한테 밝혀도 되는 거요?”
“비밀 유지는 시킬 테니까 상관없어.”
구석에서 팔짱만 끼고 있던 발가드가 나서자 아이혼 그람 백작은 잔뜩 긴장했다.
“서, 설마 폭력을 쓰려는 건…….”
“어이, 너.”
무지막지한 손이 그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 역시 기사임에도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발가드가 허공에 붕 뜬 그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람 가문이라고 했나? 잘 들어라. 지금부터 그람이라는 성을 쓰는 놈들을 전부 데려와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당신은 누군데 갑자기…….”
“내 이름은 발가드 그람. 네놈의 선조 되는 자다.”
에테르 하트가 공명하자 아이혼 그람 백작의 눈이 부릅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