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75
274화 세계의 적
바그란으로 복귀하는 여정은 그리 길지 않을 예정이었다.
엘브랑데의 영역을 벗어나면 아르마가 시범적으로 워프게이트를 열어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레오볼드를 보낼 정도의 작은 크기만 가능했지만 에테르 오리진이 완성 단계에 이르러 하이페리온급의 비행선을 보낼 정도가 되었다.
에테르 오리진이 완성된다면 녹스에서 통과했던 것 같은 거대한 워프게이트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은 아직은 무리였다.
어쨌든 엘브랑데의 영역을 벗어나는 며칠간 레오볼드와 마르그레타는 이런저런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고 여러 사건을 겪어서 둘은 부쩍 친해졌다.
그럼에도 카밀라나 아르마가 걱정했던 일, 예를 들면 침대를 같이 쓴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는데 한 주제를 가지고 가벼운 말싸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엘드그라실을 불태우려는 레오볼드의 계획이었다.
“어, 어떻게 엘드그라실을 불태우려 할 수가 있죠? 그분은 신이에요.”
“신이 아닙니다. 그냥 특별한 권능을 가지고 있는 좀 커다란 나무일 뿐. 그걸 대체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그녀는 그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보고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남자는 엘프의 신을 죽이려는 것이다.
“대체할 수 있다고 해서 함부로 불태우려 하는 게 정당한 일인가요?”
“이유 없이 불태우는 건 아닙니다.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녀는 한참 고민한 후 고개를 끄덕이곤 그가 권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하이페리온호는 여타 비행선의 몇 배나 되는 덩치를 자랑하지만 난기류에 흔들리는 건 똑같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발광석을 이용한 조명기구가 둘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며칠 전 메데아에서 엘프들의 모습을 보셨을 겁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침착했지만 드리즈덴이 무슨 말을 했는지 갑자기 흉포하게 변했죠.”
“하지만 그건 드리즈덴의 명령을 받고…….”
“대로에 나온 엘프들 전부가 드리즈덴의 부하는 아니겠죠. 즉, 그들은 자의로 우리를 증오했던 겁니다.”
공격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호위기사들이 전투를 각오했을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였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드리즈덴의 선동이라는 말밖엔 나오지 않는다.
그에겐 레오볼드를 얌전히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흥분한 군중에 둘러싸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발생하기 마련이죠. 가끔은 누가 다칠 수도 있고… 드리즈덴은 그런 그림을 원한 것 같더군요.”
“…그게 엘프 전체의 생각은 아닐 거예요.”
“수도 메데아에서 일어난 일이고 한두 명이 아니었죠. 엘프 전체까진 아니더라도 충분히 대표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르그레타는 슬픈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 물었다.
“엘프들이 선동에 놀아난 것과 엘드그라실을 불태우는 계획에는 무슨 관계가 있나요?”
“선동에 취약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만 듣다 보면 확증편향적인 사고를 가지기 쉽죠. 나도 아르마가 없었다면 이렇게 잘난 체를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레오볼드는 그녀 앞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말을 이어갔다.
“그들의 언행에서는 정의를 집행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나더군요. 그것이 옳은 행동이라는 거죠. 나는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원인이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메데아에 와서 그걸 직접 보고 깨달았죠.”
“엘드그라실… 우리의 신이 그렇게 만든 거라는 건가요?”
“태어나면서 엘드그라실의 가호를 받고, 엘드그라실을 보고 자라며 그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절대적인 존재라고 칭할 수도 있겠죠. 엘프들은 판테온 중에서도 엘드그라실을 최고로 치더군요.”
마르그레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한 신이라서 서열을 논하지도 않죠. 엘븐 판테온의 여러 신들도 엘드그라실은 격이 다르다고 계시를 내리기도 했고요.”
“나는 엘드그라실을 불태움으로써 그런 믿음을 깨려 합니다.”
“엘프의 신을 죽여서 그걸 이루려고요?”
“엘드그라실은 신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은 선지자 라사뿐입니다.”
그녀는 순수하게 광기에 불타는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선지자는 어떤 존재이기에 이 냉정하고 계산적인 인간의 왕이 절대적인 신앙을 바치는 것일까?
물론 라사는 아스테라의 창조신으로서 여러 신화에 이름을 올렸지만 거의 존재감이 없는 신인데…….
시선을 외면하자 그가 다시 말했다.
“나는 그들의 행동을 바꾸는 대신 깨닫게 해주고자 합니다. 엘드그라실은 신이 아니며 그냥 나무라고요.”
“잘 설득하면 알아들을지도 몰라요.”
“사람의 성향이란 건 성장기에 정립되면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엘프의 수명이 300년에 가깝던가요? 하여튼 오랜 세월을 살다 보니 고집이 보통이 아니죠.”
“엘드그라실을 불태우면 당신은 엘프, 아니, 아스테라 전체의 적이 될 거예요.”
엘프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이나 아인종, 그리고 수인종들도 엘드그라실을 신으로 생각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기에 왔을 때부터 대륙 전체의 적이 될 각오를 했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면 그 정도는 감당해야죠.”
마르그레타는 미동조차 없는 레오볼드의 눈동자를 보면서 신앙심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엘드그라실을 숭배하는 엘프와 선지자를 숭배하는 당신… 무슨 차이가 있죠?”
“나는 내가 정의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엘프들이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보다는 내가 하는 편이 조금 더 나을 겁니다.”
조금이 아니라 훨씬 더 낫다는 건 마르그레타의 식견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너무 극단적이란 게 문제였다.
“엘드그라실을 불태우지 않는 방법은 없나요?”
“역시 전하께서도 엘드그라실에 심한 의존도를 보이시는군요. 그런 태도 때문에 엘드그라실이 사라져야 하는 겁니다. 단,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무슨 의미죠?”
“엘드그라실을 대체할 존재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게 완성되면 이 세계는 에테르란 에너지를 훨씬 쉽고 편하게 쓸 수 있게 될 겁니다.”
“인공적인 신을 만들겠다는 계획인가요?”
“에테르 오리진은 신은 아닙니다만 원한다면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진정한 신은 선지자뿐이며 나머지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게 레오볼드의 사상이었다.
심지어 아스테라 판테온이나 엘드그라실마저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섣부른 추측이라 할 수 있지만 최근 아르마의 분석 결과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선지자가 이 세계를 만들고 관리를 위해 여러 알고리즘을 투입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권능을 가진 아스테라 판테온입니다.」
「엘드그라실은 영혼의 저장고이자 에테르를 6가지로 세분화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에테르 오리진은 두 존재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습니다. 에테르를 훨씬 더 효율적이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죠. 완성되면 에테르 혁명이 일어날 겁니다.」
에테르 오리진으로 아스테라 판테온과 엘드그라실을 대체한다는 게 레오볼드의 계획이었다.
그러니 엘프들에게 쓸데없는 오만을 안겨준 큰 나무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레오볼드는 여전히 자신을 설득할 의지를 보이는 그녀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엘드그라실은 몇 가지 특수한 기능을 가진 큰 나무일 뿐입니다. 그 점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날 이후 둘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대놓고 화를 내는 건 아니었지만 표정과 태도에서 그를 피한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레오볼드에겐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녀는 언젠가 그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이움을 흡수하고 엘브랑데와 전쟁을 치르는 시점에서 인류제국은 첫 걸음을 내딛을 것이다.
그는 황제가 되어 많은 신하를 둘 예정이었고 또 그들에게 땅을 맡길 생각이었다.
마그르레타와 티렌델 정도라면 엘프 자치령을 충분히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걸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티렌델은 그의 말이라면 맥주를 보리로 돌린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지만 마르그레타의 경우는 의외로 자기 주관이 확고하다.
이른바 외유내강형이지만 젊은 엘프라서 사고가 유연하므로 기대할 가치는 있을 것이다.
“그 정도 기다릴 시간은 있으니까 지켜보기로 하지.”
「무엇보다 마스터와 같은 침대를 쓰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카밀라님이 말씀하시네요.」
진짜 카밀라가 그렇게 말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얼마 후 하이페리온호의 진로에 워프게이트가 생겨났다.
공간을 넘어 거대한 비행선이 바그란 직할령 상공에 나타났다.
* * *
메데아에서 그 난리가 터진 후 엘브랑데는 한동안 조용했다.
다만 이는 대외적으로 어떤 발표를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내부에선 활발하고 시끄럽게 뭔가가 논의되고 있었다.
그것은 레오볼드와 바그란을 엘프의 적으로 돌린다는 것이었다.
사실 바그란은 몰라도 레오볼드는 이미 엘브랑데 제국의 공적 1호로 올라 있었다.
하지만 엘프의 적이 된다는 건 그런 것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 폭격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드리즈덴 총통은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제국의 신민 여러분의 희생과, 이 상처에 걸고 맹세합니다. 레오볼드 반다스라는 증오스러운 적을 반드시 소멸시킬 것을! 그것은 엘드그라실이 우리에게 내려준 신성한 권리입니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다는 그의 선언에 엘프들은 열광했다.
사실 이번 사태를 일으킨 건 레오볼드가 아니었다.
그는 초대를 받아 갔을 뿐인데 갑자기 비행정 공격을 받는 등 상당히 억울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엘프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드리즈덴이 직접 꾸린 선전국에선 날이면 날마다 인간과 레오볼드에 의한 전단지를 뿌리고 다녔다.
―이 증오스러운 자는 우리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회담을 결렬시키곤 비행선으로 폭탄을 퍼부었다. 그에게 신의 저주가 있기를!
―반다스가 동원한 하이페리온호는 과거 대전쟁 시절 엘프 함대가 격침시킨 비행선이었다. 그것을 동원했다는 건 우리 엘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 하이페리온에 의해 메데아가 공격당하고 총통께서 부상을 입으셨다. 전 신민에게 물어보겠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당해야 하는가?
먼저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비행정을 동원한 것이 엘브랑데라는 것을 쏙 빼놓은 선동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선동은 꽤 잘 먹혔다.
정보 자체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드리즈덴이 대부분의 권력을 쥐고 흔드니 진실을 말해줄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엘프들은 삼삼오오 모여 거리를 행진하고 주먹을 들어 올리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인간에게 베풀 자비는 없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엘프를 위해! 총통을 위해! 엘드그라실을 위해!”
“엘브랑데여 깨어나라!”
이런 구호가 예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드리즈덴을 위한 선동이 포함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번 사태를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고 경호를 핑계 삼아 친위대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이 친위대는 형식적으로 대의회의 인가를 받는 국방국과는 결이 다른 조직으로서 오로지 드리즈덴의 지시만 듣는다.
권한도 대단히 넓고 방대해서 드리즈덴의 허가서 한 장만 있으면 거의 모든 조직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엘브랑데 전체가 드리즈덴과 친위대로 재편성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대의회의 몇몇 의원들은 이를 의심스럽게 여기고 해명을 요구했지만 결과는 숙청이었다.
친위대장 에키드나 문시커는 휘하 병력을 동원해 자신들의 주인에 대항하는 몇 안 되는 대의회 의원들을 하나씩 척살해 나갔다.
그 결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수십 명이 사망했고 총통부에선 이를 티렌델의 테러로 몰아갔다.
―티렌델은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 있다. 따라서 경계를 늦추어선 안 된다.
―총통부와 친위대가 애쓰고는 있지만 티렌델을 잡기 위해선 더 많은 자금과 전폭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드리즈덴은 이런 핑계를 대고 정부조직에 자신의 심복을 하나둘씩 심어 나갔다.
있지도 않은 외부의 적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 강화에 이용한 것이다.
그의 나이가 상당히 많다는 점을 봤을 때 이는 특이한 일이었다.
보통 엘프가 300세 가까이 되면 모든 일을 내려놓고 엘드그라실의 밑동 가까운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소일거리를 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게 관례였기 때문.
세계수 자체가 워낙 거대하기 때문에 주위엔 그런 노인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 몇 개 있고 드리즈덴도 자리를 예약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원치 않았다.
‘불멸자로 거듭날 수 있는데 뭐 하러 유한한 삶을 산단 말인가?’
보통이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최근 연구소에서 수명 연장을 위한 실마리가 튀어나왔다.
그것을 위해선 대전쟁 당시에 소멸되었다고 알려진 여러 신격을 소생시키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어차피 놈을 죽이기 위해선 신격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신격뿐만이 아니라 엘브랑데의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할 판이었다.
이번 사태에서 놈이 보여 준 하이페리온만 봐도 대전쟁 당시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여러 증언에 의하면 최대 속도는 시속 100km 이상이고 선체의 일부가 리빙메탈로 이루어져 내구력이 괴물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재빠른 비행정을 다수 요격한 수십 문의 에테르 캐논은 요주의 대상이었다.
에테르 캐논의 조준이 그렇게 빠른 줄은 처음 알았으니.
드리즈덴은 측근들과 몇 번의 회의를 거친 결과 군대의 전면 재편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보다 거대하고 효율적인 군대가 필요하다. 단지 엘븐 나이트로 하여금 골리앗을 몰게 하고 비행정을 생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두 자치령의 협조가 필요하다.”
그의 계획은 엘브랑데군을 친위대와 기존의 군대, 그리고 의용군으로 분리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지원은 친위대가 가져가게 되어 있었고 기존의 국방군은 축소되었다.
그리고 의용군은 뜻만 거창할 뿐이지 실상은 형벌부대였다.
―인간을 포함한 아인종과 수인들은 땅을 내어주고 지원을 해주는 엘프에게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권리가 있으면 의무도 있는 법. 우리의 땅을 지키기 위해 일어서라. 너희에게 명예가 있다면.
지원이라고 해봐야 엘프들이 이주하기 꺼리는 황무지를 내어주고 아사를 면할 정도의 식량을 지원해 주는 정도지만 자치령에는 이를 반대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친위대가 나서서 조금이라도 에테르 감응력이 있는 자들을 추려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가족, 친구와 헤어지는 것은 다반사였고 대상자를 은닉해 주다가 일가 전체가 박살나기도 했다.
드리즈덴은 그런 행위가 아스테라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둘러댔다.
또한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이움이나 신성교국에도 밀사를 파견했다.
레오볼드와 바그란을 상대하기 위해선 인간들의 협조도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피를 우리만 볼 필요는 없지, 안 그런가?”
마침 자이움은 판그랄 대공 건으로 그를 적대하기 시작했고 신성교국과는 목적이 맞았다.
그쪽도 신격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그 신격이 신성교국의 편을 들어줄지는 미지수였다.
그리하여 아주 오랜만에 삼국이 모여 바그란의 위협에 대해 인식을 같이했다.
의기투합한 것까지는 아니고 실질적인 행동에 들어가기 위해선 많은 난관이 있겠지만 하여튼 첫 걸음을 내딛은 건 다행이었다.
드리즈덴은 신성교국으로 도망쳤을 델피나를 인도받길 원했지만 벌써 눈치를 채고 도망갔단다.
“쥐새끼 같은… 대체 뭘 보고 왔는지 한 마디 해주는 게 어렵나?”
녹턴의 권능을 가진 덕분에 보통 방법으로 그녀를 사로잡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참 동안 신성교국을 이 잡듯 뒤졌으나 그녀의 행적 대신 그림 쪼가리 몇 장만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 그림을 인도받은 드리즈덴은 보자마자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그림일 것 같나? 에키드나.”
“제가 보기엔 혼란에 빠져 아무렇게나 그려댄 것 같습니다.”
그림엔 군단타격함대와 플레이그 퀸의 전투장면이 담겨 있었지만 사전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그걸 추측하는 건 불가능했다.
“에테르 캐논으로 괴물과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델피나를 데려오는 건 불가능하다 이거지?”
“네. 신성교국에도 그녀의 자리가 없으므로 원래 자리로 돌아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다로 가진 않을 거야. 거기엔 돌파구가 없거든.”
레오볼드는 어떨까?
섀도우 엘프 전체와 그는 거의 원수지간이라 해도 무방하지만 사방이 적인 지금 상황에서 보면 의외로 손을 잡을 여지가 없지는 않았다.
노예가 되어 범죄를 저지르며 떠돌아다니던 인간들도 기어코 정착시켰으니까.
“바그란을 잘 감시하게. 언제 델피나가 튀어나올지 몰라. 그리고 발견하면 내게 연락하도록 하고.”
드리즈덴은 지도를 바라봤다.
엘브랑데와 자이움, 그리고 신성교국이 힘을 합하면 세계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레오볼드는 세계를 적으로 돌린 것이다.
그가 강하다고 한들 이런 상황에선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까다로워질 것이다.
군사뿐만 아니라 경제와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압박이 들어갈 테니까.
하지만 드리즈덴은 그가 이런 상황을 아주 많이 겪었다는 것을 몰랐다.
21세기 지구의 그 험악하고 복잡한 환경에 비하면 아스테라는 고요한 신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레오볼드는 그 신전에서 시끄럽게 구는 놈들의 머리를 쥐어박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 * *
바그란으로 돌아간 레오볼드는 엘브랑데의 동태와 국가 발전 계획, 그리고 통합 작업을 보고받았다.
엘프들의 행동은 아르마의 예상 내였고 국가 발전 계획은 많은 자금이 투입되어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그란의 어딘가에서 대대적인 공사가 시행되고 있으니 말 다했지.
그러나 통합은 아르마의 힘으로도 쉽지 않았다.
완전한 통합을 위해선 결국 땅이 중요한데 주인들이 그걸 내어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판그랄 대공령은 그렇다 쳐도 갈리스토는 예전의 바그란과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이 대부분의 땅을 점거하고 있고 왕가의 직할령은 일부에 불과했다.
레오볼드는 모든 땅을 아르마가 관리하길 원했다.
“에테르 혁명이 시작되면 땅 문제로 골치가 많이 아파질 거야.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금 소유권을 해결해야 돼.”
땅이란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한 것이며 지금보다는 나중에 더 중요성이 강조된다.
모든 땅을 레오볼드, 즉, 황제 소유로 해놓아야 관리가 편했다.
하지만 그걸 위한 난관이 장난이 아니었다.
“밀어버리면 피가 너무 많이 흐르겠는데…….”
갈리스토는 바그란의 두 배가 넘는 인구수를 자랑했고 귀족의 숫자도 많았다.
더군다나 레오볼드가 해왔던 영토통합 작업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수백 명의 귀족이 터를 잡고 살아온 터라 병력을 동원해 밀어 버리면 피가 너무 많이 흐를 것으로 예상되었다.
아르마는 다음의 방법을 권유했다.
“먼저 정확한 인구조사와 토지 측량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다음에는 화폐개혁을 통해 귀금속 본위제를 폐지하고 세금을 신설하는 거죠.”
“우리가 만든 화폐로 세금을 낼 수밖에 없도록?”
“네. 종이화폐로요.”
현 아스테라에서 종이화폐는 신용도 문제로 시도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데노바 등지에서 거금을 유통할 때 쓰는 어음이 전부였다.
사실 종이화폐가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경제 규모가 작아서 소량의 금은으로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마의 분석에 의하면 에테르 혁명이 시작될 시점부터 인구수가 폭발하고 경제가 크게 확장될 예정이었다.
그 전에 밑 작업을 해놓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레오볼드는 그녀가 제시한 로드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화도 충분히 재배되고 있으니 질 좋은 화폐 제작에는 문제가 없겠군. 문제는 기한인데…….”
“은행 설립과 병행해서 1년 동안 금은과 무제한 1:1 교환을 해주면 될 겁니다. 그 뒤에는 가산세를 붙여야겠죠.”
“귀족들의 재산 파악도 할 수 있고 땅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겠어.”
많은 땅을 가진 귀족일수록 세금에 부담감을 느끼게 되므로 결국 땅을 내어놓을 것이란 논리였다.
이쯤 되면 칼 안 든 강도나 다름이 없지만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선 효율적이었다.
레오볼드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신용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동등한 가치로 지급을 보증하고 바그란이 보유한 막대한 금과 기술을 내세우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좋아. 바로 시행해.”
이게 시행되면 아마 귀족들의 증오가 한 몸에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레오볼드에겐 익숙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