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 merchant RAW novel - Chapter 11
차원상인 011화
“여기지?”
사십 분 가까이 걸려 천호동 박유범이 사는 아파트에 겨우 도착한 그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십이 층으로 갔다. 재빨리 복도를 걸어 1221호 문 앞에 선 그는 서둘러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누구요?”
벨이 울리기 무섭게 문이 열린다.
한데 이상하게도 웬 낯선 사내가 안에서 나온다.
분명 이 시간엔 사모님이 자신을 맞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검은 셔츠의 삼십 대 중반의 그는 우현을 한 차례 훑어본다.
“거, 이 집엔 무슨 일이요?”
“그러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반문을 하는 그를 재차 살피던 사내가 답을 했다.
“내가 이 집 주인이오만…….”
“집주인이시라고요? 제가 알기로 이 집 주인은 박 유 자 범 자 쓰시는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정말이냐고 묻는 그에 사내는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그럴 것이 지난 삼 개월간 심심하면 들려오던 이름이 바로 박유범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 사람 찾는 것이오? 모르오! 난 절대 모르니 딴데 가서 알아보도록 하시오.”
한바탕 성을 내며 문을 닫는 사내를 황급히 붙잡았다.
“저어! 일 년 전 이 집에 왔을 때 분명히 그분이 계셨…….”
“거참! 일 년 전이든, 이 년 전이든 내 그 사람 모르니 그만 귀찮게 하고 가시오!”
단호하게 내뱉던 그는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을 세게 닫았다.
“그게…… 저…….”
당황한 우현이 문고리를 잡았지만 문은 이미 닫힌 지 오래였다.
이에 그는 문 옆에 있는 초인종을 재차 눌렀다.
딩동! 딩동!
“누구시오!”
“죄송하지만 박유범 씨를 아시면 좀 알려주세요!”
“또 당신이야?”
“제가 급해서 그렇습니다. 부탁입니다.”
“몰라요! 몰라! 자꾸 귀찮게 하면 경찰에 전화할 테니 그리 아시오!”
통보하듯 말을 하고는 문을 탁 닫는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사라져버린 박유범만큼이나, 희망 또한 꺼져 간다.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발길을 돌리려는데 옆집 문이 열리며 할머니가 나왔다.
“박유범이라면 주유소 소장이었다는 사람 말하는 거요?”
조금 전 대화를 듣고 있었던 모양인지 우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우현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화색을 띠며 황급히 물었다.
“아, 예! 맞습니다. 그분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맞는다는 말에 할머니는 혀를 차댔다.
“쯧쯧쯧! 보아하니 자네도 그 사람에게 빚 받으러 온 듯싶은데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야반도주한 사람을 어떻게 찾아? 그냥 돌아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졌다.
힘이 빠져 덜덜 떨리는 무릎을 부여잡은 채 마른 땅처럼 갈라진 입새를 벌렸다.
“야…… 야반도주라고요?”
“그래! 넉 달 전에 야반도주했어. 그것도 지 자식과 아내는 팽개치고 혼자 말이야.”
“호…… 혼자서 도망쳤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2년 전에 도박 빚을 크게 졌다고 하던데…… 아마 그것이 문제가 된 듯싶더구만.”
‘그럼, 내가 보증 선 것은 사업 때문이 아니라…… 도박 때문이었다는 말인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우현은 허망한 눈빛을 보였다.
고개를 내젓던 할머니는 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혼자 몰래 도주하자마자 삼 일 뒤 집이 차압됐다고 하더군. 아내와 딸은 길거리에 나앉았다고 하는데 나도 소문으로만 들어서 잘 몰라. 그러니 빚 받을 생각 말고 돌아가는 것이 좋을 거야. 괜한 힘 빼지 말고…….”
말을 마친 할머니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에 혼자 남은 우현은 꺾이는 무릎을 주체하지 못하고 벽을 잡고 주저앉고 만다.
“마, 말도 안 돼! 박…… 소장님이…… 절대…… 그럴 리 없어.”
평생 은인이라 여기며 살아왔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서 그런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 온몸을 휘감는다. 멍하니 넋을 놓고 복도에 한참을 앉아 있던 그는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복도를 걸어간다. 잠시 후, 아파트를 나온 우현은 차에 몸을 실었다. 막상 키를 꽂기는 했지만 시동은 걸지 않았다. 키를 돌릴 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린 채 의자에 기대고 있던 그의 손이 운전대를 쳤다.
빵!
“젠장!”
절벽 끝에 내몰린 듯한 압박감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 이내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였다.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던 그때 품 안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누가 전화했는지 확인도 안 한 채 휴대폰을 꺼내 귓가에 대었다.
“매너 없이 전화는 왜 끊으시오!”
순간 눈이 번뜩 뜨였다.
“누, 누구십니까?”
“헤리엇 론 박상철이오.”
“아, 예……. 근데 어쩐 일로…….”
“내가 전화를 한 건 한 달 내에 육억 오백만 이십만 원 중 반을 납부하지 않으면 강제 추심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요.”
“반이면…….”
“삼억 정도 되오.”
“삼억…….”
엄청난 금액에 숨이 턱턱 막힌다.
입만 뻐금대는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상철은 자기 할 말만 이어갔다.
“참!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도망칠 생각일랑 안 하는 게 좋을 것이오. 딴 건 몰라도 당신 쌍둥이 여동생들 확실하게 인생 조져 줄 테니 말이오. 그러니 잊지 마시오! 한 달이오, 한 달!”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제……엔장!”
휴대폰을 쥔 손이 부르르 떨었다.
결국 치미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미친 듯이 두들겼다.
“으아아아아!”
거칠게 뿜어지는 한줄기 외침과 함께 말이다.
빚보증 사건이 있은 후, 우현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살았다.
회사에 출근해서도, 티비를 보면서도, 밥을 먹을 때도 멍하니 있다.
그저 멍 때리다 하루가 다 갔다고 할 만큼 그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덧 일요일이 되었다. 이날도 멍만 잡다 보영이 차려준 저녁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다 밖으로 나와 버린다. 답답한 속으로 인해 더는 집에 있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걸어 그가 도착한 곳은 동네 놀이터. 고작 갈 수 있는 곳이 여기뿐이라는 사실에 왠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털썩 그네에 앉은 그는 고개를 들어 멍하니 시커먼 하늘만 바라본다.
“이젠 애들에게까지 손을 쓰는 건가?”
아까 식탁에서 들었던 동생들의 대화 중 최근 말없는 전화가 오고, 집에 올 때 누군가 쫓아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매일 아침 자신에게 안부 전화가 오고, 이틀 전엔 집 앞까지 찾아와 아침 인사를 건넸다.
황급히 그들을 보내 동생들 눈엔 띄지 않았지만 언제 찾아올지 걱정이 되어서 밤에 잠도 잘 안 온다.
“이제 이십 일 남았나? 어떻게 하지?”
오늘 하루 동안 이 질문만 수십 수백 번을 더 했다.
허나,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깊은 한숨과 침묵뿐이다.
암만 생각해도 별 뾰족한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받은 금괴라도 있었다면 좋을 텐데…….”
바딘 백작과 거래 후 받았던 것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금괴 하나가 그리 큰 힘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갑갑해져 오는 맘에 우현은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막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는데 손에 든 라이터가 낯익다.
“이거 할머니가 준 거 아냐?”
손수레를 끌어주고 받았던 모래시계가 새겨진 이상한 라이터.
사실 빚보증 사건이 터지기 무섭게 우현은 라이터를 연신 켜댔다.
하지만 불똥은커녕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할머니를 찾아 온 동네를 샅샅이 뒤졌다. 대륙에 놓고 온 금괴라도 가져올 수 있을까 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그녀의 거처를 아는 이가 없었고, 그저 안 보인 지 며칠 됐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때마다 절망만 안겨줘 방에 던져버리고는 쳐다보지 않던 것이 오늘은 웬일인지 손안에 들려 나왔다. 다시 호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으려던 우현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눈덩이처럼 부풀려져 라이터를 코앞에 디밀게 만들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야. 한 번!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켜보는 거야.”
꿀꺽 마른침을 삼키던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어느새 부들부들 떨리는 손목을 부여잡은 채 조심스레 켜 간다.
타탁!
시뻘건 불 하나가 위로 솟구친다.
그러나 주위 정경은 변함없이 여전히 똑같다.
“그러면 그렇지.”
실의에 빠져 가던 그때 주위가 일그러진다 싶더니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설마 싶어 창밖을 보자 시골 장터를 보는 듯한 정겨운 모습이 들어온다.
“다…… 다시 온 건가?”
물고 있던 담배마저 떨어트린 채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이때 침대에 놓인 가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금괴!”
허겁지겁 집어 드는데 돌연 방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삐거덕!
순간 놀랐던 것일까? 그만 들고 있던 라이터를 다시 켰고 어느새 주위는 동네 놀이터로 변했다. 그리고 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비추는 환한 달빛만이 그를 마중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건가?”
너무도 짧은 찰나의 순간.
혹시나 싶어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살폈다.
허나, 채 1분도 지나지 않았다.
“하긴 그곳에 오래 있지도 않았지.”
시간을 체크하는 것 자체가 우습게 여겨진다.
막 휴대폰을 넣으려는데 문득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이 보였다.
그제야 자신이 가방을 들고 왔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서둘러 열었다.
일순 눈이 부신다 싶더니 누런 금괴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금괴다!”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치던 우현은 가방을 품에 안은 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지나가던 여고생이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을 정도이니 대충 알 만할 것이다.
차츰 흥분이 가라앉고, 다시 그는 그네에 앉았다.
아직도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그래! 세상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어! 나, 장우현! 이 정도에 포기할 사람이 아니지. 까짓 육억! 꼭 갚고 만다. 갚는다고!”
버럭 소리 지르는 우현의 눈동자에 희망의 불꽃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