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 merchant RAW novel - Chapter 14
차원상인 014화
‘일단…… 시간을 버는 수밖에는 없겠군. 손에 새겨진 모래시계가 다 채워지면 이들이 막는다 해도 도망갈 수 있으니까 말이야. 어차피 거래야 이곳이 아니라도 충분히 할 수 있잖아? 안 그래?’
힘들게 가지고 온 물건을 팔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어찌할지 결정을 내려서 그런가 한결 마음이 편해진 것이 여유가 생겨난다.
“형님! 죄송하지만 목이 말라서 그런데 뜨거운 물 한 컵하고 잔 두 개만 가져다주십시오. 아, 스푼도 같이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레이젠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전개상 당혹해야 할 그가 이렇듯 당당하게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뭔가 속셈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일단 그의 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사람 부르면 될 것을 굳이 나보고 가라고 해!”
레이젠의 시선을 본 소네스는 입술을 삐죽이며 나갔다. 잠시 후, 앞에 스푼과 뜨거운 물이 담긴 컵이 놓이고 우현은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 앞부분 지퍼에서 삼각형으로 접인 종이를 꺼냈다. 조심히 풀어 컵에 넣고는 스푼을 젓다 살짝 맛을 보았다.
‘흐음! 이 맛이야. 역시 믹스 커피가 최고란 말이야.’
그랬다. 종이에 싸여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믹스 커피였다. 저번 영주관에서 먹은 차에 충격을 받은 그는 대륙에 있을 동안 마실 믹스 커피를 챙겼었다. 물론 비닐에 싸여 있는 것을 보고 뭐라 할까 봐 일일이 종이에 싸는 노력이 필요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혼자 먹기 그래서 세 잔을 타 건네자 소네스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이게 뭐야?”
“커피라고 합니다.”
“코……피?”
“커피!”
“커……피! 그래, 커~피란 게 뭔가?”
“일종의 차 같은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귀족들이 먹는 것이죠.”
한 차례 끄덕이던 소네스는 혹시나 맛이 이상할까 싶어 조심조심 살짝 혀만 적실 정도의 양만 마셔 본다. 근데 약간 쌉싸름하면서도, 달짝지근하고,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조금은 쓴 묘한 맛이 입안을 감돈다. 거기다 향도 그리 나쁘지 않다. 아까와는 달리 한 모금 크게 입에 넣었다.
“으흠! 좋은데…… 형님도 드셔 보십시오. 맛이 제법 괜찮습니다.”
머뭇대던 레이젠은 재촉에 살짝 맛을 봤다. 그의 말대로 맛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이 먹을 만은 하였다. 조금은 흡족한 표정의 둘을 본 우현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셋은 잠시 동안 커피를 즐겼다. 제일 먼저 다 마신 우현은 잔을 침대에 놓았다.
“제 정체에 대해 물으셨습니까?”
말문을 여는 그에 레이젠은 마시던 잔을 옆으로 치웠다.
“솔직히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했었네. 사실 자네가 있던 곳은 테오른 황무지의 중앙 부근이었네. 그곳까지 가려면 어느 방향에서 오든 기본 일주일이 걸리지. 만약 자네가 말한 대로 배를 타고 왔다고 한다면 인근에 있는 항구에서 황무지까지 한참을 돌아서 가야 하니 시간이 더 걸리지. 그런 상황에서 여행자의 기본인 음식과 식수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라…….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 이상 그리할 수는 없거든! 자네가 입은 복장이나 종이 또한 좀 수상하고 말이야.”
‘그럼, 아예 처음부터 믿질 않았던 거야?’
왠지 서글퍼지려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형 동생 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에 배신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처 불편한 심기를 표하기도 전에 레이젠이 제차 물어온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동대륙 사람인가?”
‘동대륙? 이건 또 뭐지?’
그간 대륙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들었지만 동대륙이란 말은 처음 듣는다.
한껏 좁혀진 미간 때문인지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여긴 레이젠은 주억댔다.
“과거 대륙이 동서로 나뉘기 전, 동대륙 사람들은 하늘을 날고, 이삼 일 만에 대륙을 돌았으며 텔레포트를 습관처럼 쓴다 해서 난 자네가 그쪽 사람이 아닐까 했는데 역시나 맞구만!”
우현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부터 대충 그쪽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고서클의 마법사라면 모를까 마나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가 흔적 하나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쥐도 새도 모르게 가방만 들고 또다시 사라졌다는 것이 이 생각을 더욱더 강하게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이런 속내를 모르는 우현은 어째 살아날 구멍을 만들어주는 듯해 슬쩍 발을 담가 본다.
“제가 동대륙 사람이라면 형님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혹시 절 죽이기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순간 놀란 듯 레이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난 특별히 어찌한다는 생각는 없네. 오히려 난 이 관계가 지속되길 내심 바라고 있네.”
“이 관계가 지속되길 바란다는 말은…….”
“자네와 같이 물건을 팔고 싶다는 말일세. 어차피 자네도 상행을 계속하려면 거처도 필요할 것이고, 도둑이라든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야 할 것 아닌가? 그걸 우리가 돕겠다 이 말일세.”
조금은 의아한 빛을 띤다. 지금까지의 분위기로 보아 필히 자신을 이용해 먹으려 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믿기지 않았던 우현은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왜 그러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이젠 더는 돌아다니기 힘들기 때문일세.”
“혹시 네시아 때문입니까?”
“그렇다네. 동생 놈이야 둘째치더라도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젠 정착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저번에 받은 것이 있으니 한동안 괜찮겠지만 재물이라는 것이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때를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거라곤 싸우는 것뿐이지 않나? 그렇다고 덩그러니 애만 두고 혼자 용병 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백작님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자리가 필요하면 오라고 말입니다.”
우현은 저번에 바딘에게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레이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이야 백작이 상단을 운영하고 있지만 언제 정계로 뛰어들지 모르네. 권력 암투야말로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무서운 것! 그런 위험 속에서 애를 키우고 싶지는 않네. 그리고 앞날이 기대되는 자넬 두고 굳이 백작에게 갈 필요도 없고 말이야.”
하긴 첫 거래로 금괴 하나를 뚝딱 얻어낸 우현을 버리고 백작가로 가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인 듯싶다.
“거기다 이곳 알카인 왕국은 내전이 끝난 지 채 5년이 되질 않는다네. 왕궁의 금고는 바닥을 기고 있고, 영토는 황폐해 농사도 잘 지을 수 없네. 그야말로 피폐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상황에서 자네와 한 거래는 한줄기 빛과도 같은 걸세. 다른 왕국도 그럴 것이고 말이야. 아마도 그들은 어떻게든 자네의 물품에 대한 비밀을 캐려 들 것이야.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자넨 나와 손잡을 수밖에 없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그동안 물건 파는 데만 신경을 쓰느라 그로 인해 자신을 덮칠 위험 따윈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레이젠의 말이 맞다! 돈을 벌기 위해 앞으로 가져올 물건들은 이곳에서는 쉬이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다. 대륙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것을 독점하려 나설 것이고 그로 인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어.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맞는다며 끄덕이던 우현은 시선을 들어 레이젠을 보았다.
“좋습니다. 계속 같이 하도록 하죠.”
“잘 생각했네.”
“저야말로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리를 숙이는 그를 보며 레이젠은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묵묵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소네스가 잔을 들어 보였다.
“혹시…… 그 커……피라는 것 한 잔 더 줄 수 없어?”
“왜 그러십니까?”
“알게 모르게 당기는 것이 더 마시고 싶어서 그래.”
순간 우현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 커피를 파는 거야!’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도 커피라면 사족을 못 쓴다.
거기다 자신이 한 것처럼 종이에 싸서 팔면 그리 문제 될 것은 없을 듯하다.
“한 잔이 뭡니까? 형님 원하시는 대로 말씀하십시오. 제가 다 드릴 테니 말입니다.”
“오호! 고마워! 그렇지 않아도 달달한 것이 당겼는데 말이야.”
소네스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선다. 커피를 타서 먹을 뜨거운 물을 받으러 나간 것이다.
‘고마운 것은 저입니다. 이렇듯 새로운 상품을 제시해주시니 말입니다.’
입가에 가득 미소를 지으며 우현은 하염없이 그가 간 곳을 바라본다. 훗날, 대륙 역사상 최고의 히트 상품이라고 할 수 있는 커피는 이렇게 탄생되고 있었다.
순백색의 흰 옷 위로 금박의 띠를 두르고, 금빛 양털이 깔린 청옥빛 의자에 앉은 한 청년.
에메랄드를 비롯해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금색 왕관을 턱까지 오는 노란 단발머리 위에 얹은 그는 가느다란 눈썹 밑에 자리한 푸른 에메랄드빛 눈동자, 좁고 오뚝한 콧날, 깎이듯 날선 턱 선까지 전체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에 가까운 매우 중성적인 외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린 흰 종이를 보며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참으로 신기하오! 내 일찍이 세투란 제국에서 만든다는 종이를 써본 적이 있소. 크기, 모양도 제각각인 데다가 투박하고 빛깔도 거무죽죽한 것이 일반 양피와 비교해 별다른 게 없었소. 한데 이것은 북부에서 내린다던 그 눈처럼 하얗지 않소? 이걸 만든 이는 대체 어떤 재주를 가졌기에 이런 종이를 만든단 말이오?”
“소신도 볼 때마다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탄성을 연신 흘리던 청년, 레조스 왕의 시선이 바딘 백작에게로 향했다.
“참! 그자는 아직 찾지 못한 것이오?
“죄송합니다. 국왕 폐하!”
조아리는 그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맨 처음 바딘 백작이 이 종이를 가져왔을 때 레조스 왕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종이가 이렇게 새하얀 것도 그렇거니와 한두 장도 아니고, 무려 이천오백 장이란다. 물론 쓰기엔 턱없이 모자라지만 이것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축복이라 할 수 있었다. 근데 이런 놀라운 종이를 팔러 온 사람이 백작령에 머물고 있단다. 레조스 왕은 곧바로 왕성으로 데려오라 했지만 우현이 여관에 도착하기 무섭게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병사를 시켜 인근은 물론 황무지에, 엘케이노 산맥, 테이페 산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흔적조차 없다고 한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때 해괴한 소식이 들려왔다. 여관에 두었던 우현의 가방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혹시나 싶어 뒤져보았지만 그림자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그 뒤로 종종 모습을 봤다는 이가 나타났으나 그때마다 허탕을 치는 바람에 이젠 봐도 귀신을 본 거라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일의 경과를 지켜보던 레조스 왕은 허망한 빛을 띠며 바딘 백작에게 왜 영지에 두고 왔느냐며 책망하기도 하였다. 허나, 그의 존재가 알려져 자칫 타국으로부터 압박이 들어오거나, 승상 조바오니 공작의 손에 들어갈까 두려워 그러했다는 말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지금 왕국의 힘으로는 타국은커녕, 승상 조바오니 공작조차 상대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왕국에 큰 도움이 될 인물을 놓쳤다는 생각에 바딘 백작은 쉬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