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 merchant RAW novel - Chapter 15
차원상인 015화
“다 짐이 부덕한 탓이니 경은 그만 고개를 드시오.”
“아닙니다. 소신의 잘못입니다. 죽여주시옵소서. 국왕 폐하!”
양 무릎을 꿇은 바딘 백작이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한 번도 아니고 다섯 번 연속 찧는다.
쿵쿵쿵쿵쿵!
그 소리가 바닥을 울리고, 방 안을 요동케 한다. 땅에 맞닿은 이마 밑으로 핏물이 마치 식물이 뿌리를 내리듯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신의 제일 충신이 저렇듯 피를 보게 한다는 것이 레조스 왕의 가슴을 멍들게 하다못해 찢어지게 만든다.
“그만…… 그만하시오!”
울음기가 깃든 목소리에 바딘 백작의 움직임이 멈춘다.
돌부처처럼 굳어버린 두 사람 사이로 차가운 적막이 깃든다.
하염없이 천장만 보던 레조스 왕의 손이 들렸다.
“파울 경! 바딘 경의 상처를 살펴주게.”
“알겠습니다. 국왕 폐하!”
한편에 말없이 서 있던 테로아니교의 성직자인 파울 남작이 바딘 백작에게로 다가가 힐을 시전했다. 아무리 신의 능력인 성력이라 한들 터진 생살이 아무는 그 고통까지 없앨 수는 없는 법이다. 바들바들 떨어대는 몸짓 위로 이가 바드득 갈린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워 참으란 말도 쉬이 뱉을 수 없었다. 막 치료를 마치고 물러서려는데 왕실 집사 중 하나가 황급히 들어왔다.
“바딘 백작님! 영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무슨 연락이더냐?”
바딘 백작보다 한발 앞서 레조스 왕이 물었다.
양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하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답하였다.
“영지 마법사가 이르길 전에 말한 릭 캐슬이란 자가 나타났다 합니다.”
“이 하얀 종이를 가져온 그자 말이더냐?”
“연락에 따르면 그렇다 합니다.”
혹시나 싶어 우현이 머물던 여관을 살피라 했던 것이 주요했나 보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레조스 왕은 홱 고개를 돌렸다.
“바딘 경!”
“부르셨습니까, 국왕 폐하!”
“이번엔 전과 같은 일이 없도록 꼭 그를 붙드시오. 내 말 알겠소?”
“지엄한 국왕 폐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아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한 번 바닥에 이마를 찧던 바딘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조스 왕은 가슴 한구석에 조그만 희망의 싹을 틔웠다.
“바딘 경! 부탁하네.”
이 말과 함께 말이다.
“내가 말한 곳이 저기야!”
마차 창 너머 소네스가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에는 고저택이 서 있었다. 저택도 저택이지만 시야를 넘어 저 멀리 펼쳐진 초록빛의 넓은 땅덩어리와 푸른 하늘은 그야말로 막힌 가슴을 뻥 뚫리게 한다. 눈만 끔벅대던 우현은 기막히다는 빛을 자아냈다.
“형님…… 참! 많이 넓군요!”
“얼마 전까지 이곳을 본가로 하는 상인이 썼던 거라 좀 커! 물품을 쌓아둘 창고도 여럿 있고 말이야. 돈이 많이 들긴 했지만 나중 일을 생각해 샀어.”
그래도 너무 큰 것 아니냐며 묻고 싶었지만 너무도 좋아하는 그에 이내 말머리를 돌리고 만다.
“근데 이 집은 무슨 돈으로 산 겁니까?”
“네가 준 돈 있잖아! 그걸로 샀어.”
“잠깐만! 제가 준 돈이라면…… 일전에 종이 계약할 때 받은 돈 말입니까?”
“어! 그 덕에 우린 또 빈털터리 됐어. 그러니 이번에 거래 잘 되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 길거리에 나앉으니까 말이야.”
우현은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힌다.
설마하니 그 돈을 모조리 저택 사는 데 쓸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제가 오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신 겁니까?”
“네가 왔잖아! 그럼 된 거지 뭘 또 생각해.”
“예에?”
진짜냐 묻는 그의 시선에 레이젠은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살다 살다 이런 무대포는 처음이다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들이 쓸 돈은 챙겨둬야 하지 않는가? 그걸 몽땅 다 집과 사람들을 사는 데 쓰다니……. 페릴 형제가 고맙게 여겨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6억 빚을 다 갚고 난 후에는 이곳을 더는 찾지 않을 텐데 그때가 벌써부터 걱정되기 시작했다.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가 더 생기는구나!’
더욱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며 다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너무 큰 저택에 부담감이 든다.
“그래도 조금 작은 걸로 사시지 그랬습니까?”
“아까 말했잖아. 일부러 샀다고 말이야.”
“일부러요?”
이때 레이젠이 둘 사이에 끼어 들어왔다.
“내가 그러라 시켰네.”
“큰형님! 왜 그러셨습니까?”
“종이 생산하는 곳도, 가져오는 곳도 없는데 매번 팔러 오면 백작이 이상타 여기지 않을 듯싶은가?”
“그럼, 이곳에 거짓 공장을 세워 그의 눈을 속이겠다는 말입니까?”
“물품의 출처와 자네의 정체를 숨기려면 그래야 하지 않겠나?”
순간 머릿속이 망치로 맞은 듯한 기분이 든다.
물건 파는 데 정신이 팔려 그 문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참 나! 허점투성이로군. 이래 가지고 뭔 물건을 팔겠다고 설레발을 쳤는지…….’
자신이 봐도 한심한 듯 고개를 내젓고 만다. 성문처럼 커다란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곳곳에 사람들이 청소를 하는 것이 보인다.
“말로이! 여기 상단주이신 릭 캐슬! 인사해!”
“안녕하십니까, 상단주님!”
“아……! 수고 많으십니다.”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이는 포일이라고 앞으로 문지기를 맡을 사람이야. 포일! 여기 와서 인사해. 상단주셔!”
소네스의 말에 따라 하나둘 마차로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그런 그들을 맞이해 답을 해주는 사이, 어느새 마차는 저택 앞에 도달했다.
문을 열고 나서던 우현의 낯 위로 훈풍이 불어온다. 약간은 한기도 섞인 것이 딱 한국의 가을 날씨 같다. 그럴 것이 알카인 왕국의 기후는 일 년 내내 온난한데 그중 하임이트 영지는 남쪽에 있어서 그런지 조금은 차 가을 날씨 비슷했던 것이다.
소네스를 따라 막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세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온다. 펑크족처럼 뾰족하게 세운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내를 선두로 한쪽 귀를 훤히 드러낸 금빛의 단발머리를 한 싸늘한 눈빛의 여인과 짧은 스포츠머리에 부리부리한 눈매에 사각턱, 온몸을 근육으로 두른 꼭 미국 프로레슬러 같은 거구의 사내가 그들이었다.
“오셨습니까, 대장님!”
한목소리로 외치는 그 세 명을 본 레이젠은 마부석에서 내려와 섰다.
“과거 도베르만 왕실 기사단에 있을 때 후임으로 있던 사람들이네. 내가 상단에서 일한다고 하니까 도와준다고 한달음에 달려와 줬네. 너무도 고맙게 말이야.”
말을 마친 레이젠은 한 발 나서서 먼저 우현을 소개하였다.
“이쪽은 이곳 상단의 상단주인 릭 캐슬이다. 인사들 올려라!”
그의 말에 셋은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저는 필리온이라고 합니다.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티아라라고 해요.”
“엘레토입니다!”
“모두 만나서 반갑습니다. 릭 캐슬이라고 합니다.”
우현은 셋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근데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성격에 겉모습을 맞춘 것인지 딱 한 번 봤을 뿐인데 그들의 성향이 짐작이 된다. 묘하게도 말이다.
“앞으로 이들은 나를 도와 상단의 경비 업무를 맡을 것이네.”
그러냐며 끄덕이던 우현은 다시 한 번 셋에게 말을 하였다.
“상단을 잘 부탁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상단이 별 탈 없이 굴러갈 수 있도록 힘껏 돕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그들과 일별한 우현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 큰 규모와는 달리 안은 곳곳이 텅 비어 있어 을씨년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살 만은 할 것 같았다. 청소 중인 사람들과 잠시 대면식을 가진 그들은 서재 겸 상단 회의실로 잡은 방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앞에 놓인 책상을 매만지던 우현에게 커피 탈 물과 잔을 가져오라 시킨 소네스가 말을 건넸다.
“자자! 화이트 그리핀 상단 이주 첫날인데 이대로 있으면 되나? 오늘 하루 코 삐뚤어지게 술을 마셔 보는 건 어때?”
“소네스 형님! 근데 화이트 그리핀 상단은 뭡니까?”
“명색이 상단인데 이름은 있어야지. 그리고 그리핀은 사자의 몸통에 매의 머리와 날개를 가진 천사들이 타고 다니는 말 중 하나야.”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기던 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이트 그리핀이라…… 맘에 드네요.”
“그렇지! 네 맘에 쏙 들지?”
“아주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감도 좋고, 천사들이 타고 다니는 말이라고 하니 상단 이름으로도 쓸 만은 하겠네요.”
소네스는 짝 소리 나게 손뼉을 치며 레이젠을 보았다.
“내가 그랬지? 분명 릭 캐슬은 맘에 들어 할 거라고 말이야.”
“아주 좋다고는 안 했다.”
“써도 된다는 건 어느 정도 맘에 든다는 거잖아.”
물끄러미 보던 레이젠이 슬쩍 시선을 돌린다.
그런 그를 본 소네스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피하는 거야? 지금 피하는 거 맞지?”
“안 그랬어.”
“피한 거 맞잖아!”
아웅다웅하는 둘의 모양새로 보아하니 상단 이름을 가지고 둘이서 싸운 모양이다.
못 말린다는 듯 내젓던 그때 하녀 노리엔이 뜨거운 물과 잔을 그들 앞에 놓았다.
막 커피를 타 마시려고 하려는데 사람 하나가 들어와 말을 건넸다.
“상단주님! 백작가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안으로 모십시오.”
한 차례 고개를 숙이며 나간 그는 바딘 백작과 펨 총관을 데리고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펨 총관님!”
“릭 캐슬, 이 사람아! 대체 어딜 갔기에 이리 보이지 않은 것인가?”
“잠시 집에 좀 다녀왔습니다.”
“그럼, 간다고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난 또 계약금 떼먹고 도망친 줄 알고 있었지 않은 가?”
순간 우현의 가슴 한편이 뜨끔해진다. 아마도 양심이라는 놈이 그러는 모양이다.
허나, 그는 별 내색 하지 않은 채 태연히 답을 했다.
“설마 그러겠습니까? 저는 절대 먹튀 짓은 안 합니다.”
“먹튀?”
“아! 먹고 튄다는 저희 왕국에서 쓰는 일종의 속어입니다.”
바딘 백작은 수염을 매만지며 되새긴다.
“먹튀라……. 거참! 간결하면서도 매우 직설적이구만.”
“백작님! 그걸 흔히 돌직구라고 합니다.”
“돌직구? 그건 또 뭔가?”
우현은 순간 아차 싶었다. 말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계속 속어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말조심 못한다고 자신의 주둥이를 한 대 후려치고 싶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꾹 참았다.
“가감 없이 솔직하게 말을 건네는 것을 말합니다.”
“돌직구라……. 아까 말한 먹튀보다 강렬한 것이 어째 좀 안 좋아 보이는군.”
“좀 그렇긴 합니다.”
진땀 빼는 우현을 대신해 소네스가 말을 건네왔다.
“근데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왕성에 있다가 자네가 왔단 소식을 듣고 놀라 얼른 게이트를 타고 왔지 않은가?”
게이트, 본 명칭은 텔레포트 게이트로 한순간에 원하는 곳으로 옮길 수 있는 일종의 워프 마법진이 새겨진 문을 말한다. 대륙에 통틀어 사십여 개뿐인 이것은 과거 마도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의 마법으로는 안타깝지만 만들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알카인 왕국에는 총 4개의 게이트가 있으며 그중 하나가 이곳, 하임이트 영지에 있다. 또한 전쟁 상황에 준한 경우가 아니면 그 누구도 쓸 수 없도록 왕명으로 정해져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