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 merchant RAW novel - Chapter 169
차원상인 169화
“알겠네. 준비토록 하겠네.”
우현은 이 말을 끝으로 자신이 가져온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이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알 수 없었다.
영지를 지키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만들기로 한 이 무기들이 훗날 대륙을 뒤흔들 단초가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 ‡ ‡
“국왕 폐하의 말씀에 따르겠나이다.”
“국왕 폐하 말씀에 따르겠나이다.”
한 차례 외친 귀족들은 서서히 내전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들을 쫓아 걸음을 옮겨가던 테온의 귀에 한 귀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예상 밖이로군! 난 도망친 레조스 왕이나, 바딘 백작을 죽이는 것에 중점을 둘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나도 그렇다네. 설마하니 곡식과 돈을 풀어 백성들의 맘을 얻어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랬다. 조바오니 공작이 왕에 취임하자마자 한 것은 왕국의 복잡한 정세를 가라앉히기 위해 왕실이 갖고 있던 곡식과 돈을 풀어 백성들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게 뭘 그리 놀랄 일이냐 하겠지만 알고 보면 생각보다 큰일이다.
정국이 불안할 경우 대부분 왕들은 그저 조세를 낮추는 것으로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하지만 알고 보면 이것이 다 귀족들의 배를 불려주는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이 조세를 낮춘다고 한들 귀족들이 백성들에게 걷는 세금은 절대로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즉, 걷는 양은 같은데 왕실에 납부해야할 세금이 줄어드니 오히려 귀족만 이득을 보는 그런 상황이 되는 거였다.
그래서 조바오니 공작, 아니 신왕이 불안한 정국을 논할 때 내심 기대를 했었다.
한데 왕실이 갖고 있던 곡식과 돈을 직접 풀 줄이야. 이는 그 누구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확실히 정치판에서 오래 버텨온 사람답게 상대의 맘을 훔치는 방법을 제대로 아는군.”
“괜히 정치판의 귀신이라고 하겠어? 다 이런 재주가 있으니 그런 것이지.”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귀족들은 내전에서 멀어졌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테온은 슬쩍 고개를 돌려 조바오니 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확실히 백성의 마음을 헤아릴 줄은 아는 것 같군요! 잘만하면 성군이 되겠어요.”
피식 웃는 그의 곁으로 상의에 붉은 견갑을 두르고, 검붉은 마석이 달린 지팡이를 든 날카로운 눈매가 아주 매서운 사내, 한때 올레도 백작이라 불리던 아크리가 다가왔다.
“다녀왔습니다.”
끄덕이던 테온은 멈추었던 발걸음을 옮겨간다.
“둘은 어찌 보내고 있던가요?”
“바딘 백작은 왕위를 되찾아야 한다며 강하게 의견을 내세우지만 레조스 왕은 이번 일로 충격이 큰지 그저 탄식 속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하긴 한평생 왕으로 늙어 죽을 줄 알았던 그가 이런 일을 당했으니 깊은 절망감 속에 빠지겠지요.”
“그렇다 해도 좀 상태가 심합니다.”
한껏 찌푸려진 아크리의 눈살이 상황이 얼마나 안 좋은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걸 보며 피식 웃던 테온은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본다.
“두려움에 집어삼켜진 모양인데 내버려 두십시오. 그런 자일수록 나중에 부려먹기 좋으니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근데 조바오니 왕은 어쩌실 겁니까?”
“좀 더 두고 봐야겠지요. 정권이 바뀐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또다시 바뀌는 건 이번 일에 우리가 개입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가 될 겁니다. 그래도 계획한대로 준비는 해두십시오. 그래야 언제가 됐든 우리가 원할 때 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주억거리며 물러서려는 그의 발목을 돌연 잡아간다.
“참! 하임이트 영지에선 별 다른 기미는 없습니까?”
“특별하게는 없고 그저 조용히 피해 복구에 집중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긴 왕국 정세가 좋지 않은데 괜히 이목 집중은 좋지 않겠지요.”
“그들 역시 그리 생각하는 듯 보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잘 살피십시오. 피해 복구를 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일을 꾸미면 우리로서는 당해내기 힘드니 말입니다.”
“하임이트 영지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알아보라 시키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아크리는 뒷걸음 쳐 물러간다.
그런 그와 일별해 홀로 걸어가던 테온의 시선에 저 멀리 시퍼런 하늘이 들어온다.
“거참! 하늘 한번 맑고 좋네.”
마치 자신의 기분과도 같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제7-7장
우현이 공식 석상에 나선 지 이틀이 지났다.
아침부터 분주하던 영주관의 문이 열리고 관을 둘러멘 상여꾼들이 앞으로 나선다.
그 앞에 나선 새하얀 백의를 입은 우현을 비롯해 고흥만, 레이젠, 소네스 등을 비롯해 용병길드장까지 영지 일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이 뒤에 따라붙는다.
이뿐만 아니라 수백 개의 위패를 든 유족과 인근에 있던 백성들마저 뒤에 줄지어 늘어서기 시작한다.
모든 이들이 정렬을 해가자 맨 앞에 깃발을 들고 있던 이가 큰 소리로 외친다.
“생행(生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으로 나아가는 긴 행렬.
살아생전 머물던 곳을 살피는 것이기에 장례 행렬은 영지성을 따라 한 바퀴 돌아간다.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들려오는 곡소리는 인근 영지민은 물론 용병들까지 불러 모았고 점점 행렬은 길어졌다.
이렇듯 영지의 모든 사람들이 동참한 가운데 장례 행렬은 영지성을 돌아 다시 영주관으로 들어갔다.
이렇게만 하는데도 무려 반나절이란 시간이 걸릴 만큼 장례행렬은 너무나도 엄숙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영주관이 들어가자마자 온 세상이 떠들썩하니 곡을 해댄다.
미처 행렬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은 영주관 주변에 자리를 잡고 울기 시작한다.
어찌나 슬프게 우는지 소리만 들어도 저절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 울음 속에서 사망자들의 관이 화장되었고 남은 유골을 담아 위패와 함께 들고 위령비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한쪽에 만들어진 커다란 저택으로 들어간 그들은 책장처럼 만들어진 공간에 유골이 담긴 항아리를 놓아두었다.
이와 함께 또 한 번 크나큰 곡소리가 세상에 울려퍼졌다.
상단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인지 잘 알기에 그 누구하나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일이 끝날 때까지 고개만 숙였다.
모든 유골 항아리가 안치가 되자 사람들은 세인트 월로 모였다.
그곳에 새겨진 사망자들의 이름을 어루만지며 또다시 울음을 터트린다.
이제 울만큼 울었을 텐데 이름을 보기 무섭게 얼굴에 두 줄기 눈물 자국을 그려냈다.
이미 해도 저물어 짙은 어둠이 대지에 가라앉는데도 그 누구하나 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울고 또 울며 죽은 들의 넋을 하염없이 기리고 또 기리었다.
‡ ‡ ‡
“추모제가 끝났군요!”
어느덧 밤을 지나 새벽으로 넘어가고 있건만 우현은 그저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본다.
정확히 말하고 위령비 공원이 있는 곳을 향해서 말이다. 곁으로 다가선 고흥만이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이정도 했으니 다들 잘 갔을 거네.”
“그러길 바라야죠. 그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죽음일 것이니 말입니다.”
우현은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인다.
특별히 추앙하는 종교는 없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래야할 것 같았다.
잠깐 동안의 기도가 끝나자 고흥만은 다시 말을 건넸다.
“참! 제국과의 협상은 잘 마무리 됐네.”
“조건은 어찌 됩니까?”
“처음부터 무조건 들어줄 생각으로 왔는지 별 잡음 없이 넘어갔네.”
다행이라는 듯 끄덕이던 우현이 말을 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공표는 언제쯤 한다고 합니까?”
“내일 아침에 마법통신으로 대륙의 모든 왕국으로 보낼 거라고 하네. 또한 전왕인 레조스 왕을 지지함과 동시에 알카인 왕국의 정세에 개입 것을 천명할 것이라 하네.”
“성국 쪽은 제국 측의 공표 후에 보호 요청하실 겁니까?”
“그래야겠지. 그러는 편이 우리에겐 좋을 테니 말이야.”
답을 하던 고흥만의 시선이 쳐들려진다.
“근데 이쯤에서 넘어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 중원이든, 현대든 말이야!”
순간 우현에게서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솔직히 말하고 지금 기분이라면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그를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가야만했다.
그것이 상인으로서 우현이 해야 할 행동이었다.
설령 그 자신은 참담한 기분 속에 살아간다고 해도 말이다.
마음을 다잡은 우현은 몸을 돌려 고흥만에게로 향한다.
“지금 갈 생각입니다. 제가 할 일은 이곳 말고도 많으니 말입니다.”
“그래, 갈 준비는 다 됐고?”
“소네스 형님을 말해 대충 해두었습니다.”
“그거 다행이구먼!”
끄덕이던 고흥만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가기 전에 이것 좀 봐 주게!”
“이게 뭡니까?”
“그간 상단에 집중하느라 영지 지휘 체계가 부실하기에 이참에 바로 잡을 생각이네. 이건 그걸 위한 것이고…….”
지휘체계까지 들먹이는 걸로 봐서는 중요한 것 같아 살펴보니 현재 영지를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 옆에는 관직이 쓰여 있었는데 최고 백작에서 남작까지 골고루 분포가 되어있었다.
“이거 관직 임명서 아닙니까?”
“그동안 영지를 위해 고생을 한 사람들이니 그 정도는 해줘야지.”
“하지만 제가 아무리 후작이래도 백작 직위는 부여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지금처럼 정국이 어수선할 때 얼렁뚱땅 해치우자는 것일세. 그편이 나을 테니 말이야.”
현재 직위가 있는 사람은 총 다섯으로 고흥만이 백작, 레이젠과 소네스가 자작, 남궁운혜와 헤일러가 남작으로 이루어져있다.
영주인 우현 자체가 영지보다는 상단에 중심을 두다 보니 중요 인원만 관직을 내리고는 그만둔 것이었다.
그러고는 그에 대해선 잊어버렸는데 막상 고흥만에게서 관직 임명서를 받고 보니 얼추 지휘체계가 잡히는 것이 매우 좋아보였다.
특히나 이번 영지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는데 귀족 직위까지는 받지 못하더라도 공적에 대한 보상만은 확실하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들고 있던 종이를 건네며 우현은 씨익 웃었다.
“이대로 진행하십시오. 제가 보기에 괜찮을 성 싶으니 말입니다.”
“다행이군. 자네 맘에 들었다니 말이야.”
“생명을 걸고 싸운 이들인데 적절한 보상을 해줘야겠죠.”
“그건 맞는 말일세.”
종이를 품에 넣고 막 발걸음을 돌리던 고흥만의 신형이 멈춰 세워졌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우현은 뭔 일이 있는 가 싶어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깜박 잊고 말 못한 것이 있네.”
“그래요? 혹시 중요한 것입니까?”
“중요하다기 보다는 남궁세가 사람들이 장원을 만들게 허락을 해 달라 했네.”
“남궁세가가 말 입니까?”
“그렇다네.”
우현의 이맛살이 좁혀든다.
조금 전까지 남궁운혜와 대화할 때도 그런 말은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