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 merchant RAW novel - Chapter 17
차원상인 017화
“좋습니다. 형님들! 대신 술은 딱 한 잔입니다.”
“한 잔이든, 두 잔이든 일단 마시는 게 중요하지. 안 그러우?”
“네 말이 맞다! 맞아!”
세 사람은 서로를 보며 한바탕 웃었다.
6억의 빚을 없애기 위한 우현의 상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제1-7장
“포포리 상단 종이 이백 장이요?”
“그렇소!”
“사십 골드입니다.”
돈을 건네고 서기에게 계약서를 받은 상인이 물품을 받으러 떠나자, 곧바로 다른 이가 돈을 들고 서기에게로 다가선다.
“크레인 상단 종이 사백 장이오!”
“팔십 골드입니다.”
계약서를 건넨 서기는 줄을 선 상인들에게 외쳤다.
“팔천 장 남았습니다. 조기 매진이 우려되니 어서 빨리 구매하십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에 상인들이 모여든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그곳을 지켜보는 우현의 얼굴에 흐뭇한 표정이 깃든다.
“순조롭게 판매가 진행되는가 보네.”
기분 좋은 듯 내뱉던 그는 발길을 돌렸다. 얼마 전부터 판매를 시작한 커피 판매 현황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바삐 움직이는 일꾼 사이를 걸어 영주관 뒤편으로 향했다.
그러자 창고 한편에 멀뚱하니 서 있는 소네스가 보였다.
서둘러 그에게 다가선 우현이 물었다.
“형님! 오늘도 반응이 영 아닙니까?”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젓던 그는 한쪽을 가리킨다. 딱 봐도 어제와 똑같은 높이로 쌓여 있는 커피가 지금껏 한 개도 팔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준다. 그와는 달리 건너편은 구매한 종이를 상인들의 마차에 실기 위해 가져가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상반되다 못해 극과 극의 모습이다.
“하아!”
길게 늘어지는 한숨 속에 우현의 어깨가 축 늘어진다. 오늘로 바딘 백작과는 다섯 번째 거래, 커피 판매는 세 번째 총 십이 일째 판매 중이건만 잘 나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잘 팔리지 않았다. 그나마 매번 50~60봉 정도는 나가긴 하는데 그것도 다 바딘 백작이 사는 것으로 제대로 팔린 것은 전무하다 할 수 있었다. 하염없이 커피를 보다 우현은 슬쩍 시선을 소네스에게로 돌렸다.
“커피 팔지 말까요?”
“커피 포장하는 사람들까지 들여놓고는 이제 와서 그만둔다는 거야?”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열 명이나 사람을 모집해 일 시켜 놓고선 그만두라는 것도 문제인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한숨만 내쉬는데 바딘 백작이 그 곁으로 다가왔다.
“상단주, 잘 지냈는가?”
“예! 백작님도 안녕하십니까?”
“나야 늘 그렇지. 그래, 커피는 좀 팔리는가?”
“생각보다 잘 안 나갑니다.”
“아마 그럴 게야. 사람들은 아직 커피란 것이 뭔지 모르니 말이야. 허나, 이제 곧 진가를 알고 사러 오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니 좀 더 참아보게.”
애써 달래보지만 이미 상한 속을 아우르기엔 많이 늦은 상태였다.
좀 더 노력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상단으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차원을 넘어갔다.
어차피 돌아가야 하긴 했지만 속상한 맘에 한바탕 성을 낼 듯싶어서 그런 것이다.
손수레를 제자리에 두고 천으로 덮던 우현은 손을 들어 어느새 젖은 이마를 훔쳤다.
“이젠 더위까지 속을 썩이네!”
중복이 지난 8월 중순이건만 어찌 된 일인지 예전보다 더 더운 듯싶다.
한껏 찡그려진 눈살 위로 손바람을 일으키던 그는 더는 안 되겠다는 듯 발길을 돌려 차로 향하였다. 운전자 석 문을 열기 무섭게 후덥지근하다 못해 아주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온다. 찜 가마가 되어버린 차 안을 보며 한숨을 내쉬던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차에 올라타 서우네 금은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도로가 휑한 것이 달릴 맛이 나겠건만 어찌 된 일인지 도통 속도를 내질 못한다. 잠시 후, 금은방 앞에 선 그는 차에서 내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 우현이냐?”
“몸 건강하셨어요?”
인사를 건네며 가방에서 종이 대금으로 받은 금괴가 담긴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누가 볼까 얼른 받아 챙긴 서우 아버지는 급히 안으로 가 금고에 넣었다.
뒤돌아 나오는 그에게 우현이 물었다.
“아직도 금괴 거래하자는 사람이 없습니까?”
“현재까지는 없구나!”
“그렇습니까?”
순간 둘 사이에 적막감이 깃든다. 첫 주 금괴를 판매한 것 빼고는 근 한 달간 아무도 찾는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첨엔 좀 숨이 트일 것 같았는데 이젠 반대로 점점 더 빚에 대한 압박감이 거세진다. 답답한 듯 목을 매만지는 그에 서우 아버지는 슬며시 어깨를 토닥인다.
“조만간 거래가 이루어질 것이니 너무 염려 마라.”
위로하는 그에 애써 미소를 짓는다.
“그럼, 저 가볼게요.”
“조심해서 들어가거라!”
밖으로 나선 우현은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커피 판매 부진에, 무더운 날씨, 금괴 판매 부진까지. 연이어 쓰리 아웃을 당한 우현은 저녁 식사도 거른 채 방에 콕 박혀 그저 한숨 속에 밤을 지새우고 만다. 사실 커피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종이만 열심히 팔아도 별문제는 없다. 하지만 자신이 처음으로 준비한 것이고 전직 영업맨이 이렇듯 판매에 부진하다는 것이 자존심을 많이 상하게 했다. 새하얗게 밤을 지새운 그는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홀로 텅 빈 방에 누워 있는데 웬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에 다니던 회사 직속 상사였던 김 팀장에게 온 것으로 잠시 얼굴 좀 보자는 것이다.
맘 같아선 무시하고 싶지만 그래도 영업사원 시절 적잖이 도움을 받았던 터라 거부하기도 좀 그랬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우현은 대충 옷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차를 몰아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는 막 차문을 나서려는데 음악 소리와 함께 전형적인 행사 톤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드니 내레이터 모델로 보이는 여성이 주위 오가는 사람들에게 컵 하나씩을 쥐여 주고 있었다.
“시음회 하나 본데?”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시선을 거두려는 그녀들 사이로 낯익은 사내 하나가 보인다.
“팀장님?”
간만에 봐서 그런가? 반가운 나머지 서둘러 차를 나선 우현은 있는 힘껏 소리쳤다.
“팀장님! 김 팀장님!”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김 팀장은 컵을 나눠주던 것도 잊고 주위를 살폈다.
“이쪽이에요. 이쪽!”
“어? 우현이 왔냐?”
그제야 우현을 본 김 팀장은 환히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인다.
곁에 있는 내레이터 모델들에게 갖고 있던 것을 건네고는 황급히 우현에게로 뛰어왔다.
“오는 데 힘들었냐?”
“아니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잘 지내긴……. 온통 지뢰밭투성이라 죽겄다, 죽겄어.”
앓는 소리부터 해대는 그에 우현은 여전하다며 웃는다.
둘은 인근 편의점 앞에 설치된 간의 탁자에 앉았다.
“목마르면 마실래?”
“사주시는 거야. 저는 항상 오케이죠!”
“넌 어떻게 된 게 거절을 모르냐?”
고개를 내젓던 김 팀장은 캔 커피 두 개를 사 와 건넸다.
“잘 마시겠습니다.”
받아 든 캔 커피를 따서는 시원하게 한 모금 마신다.
목이 많이 말랐는지 단숨에 넘어가는 커피가 달디달다.
“참! 말 편히 할게. 이젠 회사 부하도 아니니 말이야.”
“저 신경 쓰지 마시고 그렇게 하세요.”
우현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인다.
김 팀장은 캔 커피를 내려놓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 뿜어내는 그를 보던 우현은 깜박했다는 듯 물었다.
“근데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네가 그만두고 남은 사람들이 네 거래처를 나눠 맡았는데 그중 몇 개를 나도 맡았거든. 그 바람에 난 생전 한 번도 안 해본 커피 시음회까지 하게 됐다.”
“커피 시음회요?”
“효신실업 알지? 거, 왜 커피 자판기에 넣는 커피 믹스를 만드는 중소기업 말이야. 그 회사가 이번에 아이스커피 사업에 진출했는데 인지도 때문인지, 아님 브랜드가 약해서 그런지 아직 반응이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직접 거리로 나서서 홍보키로 했지.”
우현도 효신실업이라면 예전부터 담당했던 곳이라 잘 알고 있었다.
‘사 개월 전에 사장이 깜짝 놀랄 일이 있을 거라고 하더니 이것 때문이었구나!’
당시 연신 입가에 미소를 그리던 사장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상념에 잠겨 있던 그때 김 팀장이 담배를 비벼 끄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뭐 하는 거라도 있어?”
“그게…… 아는 분 일 좀 돕고 있어요.”
“그래? 그럼, 빚은? 좀 갚았어?”
순간 우현의 시선이 돌아간다.
“어, 어떻게 아세요?”
“총무과 임 대리에게 들었다. 미란이하고 난 입사 동기거든…….”
“그……러세요?”
김 팀장은 바닥에 내려놓은 캔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왜 말하지 않았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해줬으면 큰 도움은 못 되어도 조금은 거들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괜히 폐 끼치는 거 같아 미안해서요.”
“언제는 폐 안 끼쳤냐? 별걸 다 걱정한다.”
맘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삐죽인다.
그 모습에 우현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보고 있던 김 팀장이 호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내민다.
뭔가 싶어 봉투 안을 살피자 백만 원짜리 수표 다섯 장이 보인다.
“이, 이게 뭡니까?”
“동료 몇이 십시일반 모은 거다. 서로들 사정이 안 좋아 많이는 넣지 못했지만 그래도 받아둬라.”
“받을 수 없습니다. 팀장님!”
우현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재빨리 봉투를 건넨다.
하지만 김 팀장은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얼마 안 되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 둬!”
“하지만…….”
“사람 성의 무시하는 거 아니다.”
나직이 말하는 그에 우현은 이내 입을 다물고 만다.
푹 숙인 고개 밑으로 눈시울이 점점 촉촉해진다.
김 팀장은 그걸 모른 척하며 손에 든 캔 커피를 비웠다.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벌써 사람들이 널 보고 싶다고 하더라.”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쳐들어본다.
그걸 보며 피식 웃던 김 팀장은 말을 이었다.
“넌 모르겠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이 네 도움을 받았거든……. 그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제가 도움을 줬다구요?”
“과거 최 대리가 영업이 안 되어 힘들어할 때 네가 발로 뛰어 판매해줘서 겨우 할당량 맞췄잖아.”
“아!”
기억이 난다. 햄버거를 파는 신생 업체였는데 당시 벌레가 나왔다는 루머가 떠돌아 영업이 잘 되지 않아 최 선배가 힘들어했었다. 때마침 아이까지 출산한 직후라 어려움은 더욱 컸다. 그걸 본 우현은 몰래 서울의 식품 도매업자들은 찾아다니며 그 대신 영업을 했다. 이상이 없다는 걸 증명하려 생으로 먹어 보이기까지 해서 그런지 조금씩 판매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힘겹게 할당된 판매량을 맞출 수 있었다. 나중에 이것을 전해 들은 최 선배가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며 밥이나 한 끼 하자고 했지만 우현은 아이 백일 선물을 미리 당겨서 준 것이라며 거절했었다. 이후로도 몇 사람이 그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넘긴 적이 있었던 터라 보증 빚에 회사를 관둔 우현을 두고 몹시 안타까워하였다. 이에 최 선배가 앞장서 돈을 모아 건네자 했고 오늘 이 자리를 만들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