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 merchant RAW novel - Chapter 35
차원상인 035화
아무리 거대 상단주라 한들 신분이 평민이라면 귀족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허나, 이번 일로 상단에 자체 병력이 생기고, 나중에 조바오니 공작으로 인해 귀족 신분까지 달 경우 상황은 백팔십도로 바뀌어버린다. 왕국 재정에 맞먹는 거대 상단을 가진 귀족의 힘이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었다. 이걸 빌미 삼아 역모라든지, 온갖 음모를 덧씌워 옭아맬 경우 우현은 속절없이 조바오니 공작의 손에 들어올 것이 뻔했다.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느냐? 어차피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났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라. 그러니 네가 준비하고 있는 일이나 신경 쓰도록 해라.”
일을 급진전시키긴 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나쁜 것도 아니기에 테온은 그냥 넘기기로 하였다.
“알겠습니다.”
주억대는 그를 본 조바오니 공작은 깜박했다는 듯 말을 건넸다.
“이참에 보르네오가에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들을 잃어 상심이 클 텐데 보듬어 줄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공작님의 말에 따라 준비해 놓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테온은 몸을 돌렸다.
어차피 더 할 말도 없는지라 돌아가 자신의 일이나 신경 쓰려는 것이다.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조반은 먹고 있던 사과를 바구니에 다시 얹어두었다.
“화이트 그리핀 상단이라……. 그것참! 제법 맛있게 영글 듯싶군그래!”
자신의 손에 잡힌 상단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점차 입가의 미소가 짙어진다.
제2-5장
마르세우니스 대륙 서북부.
1년 중 대부분이 눈이 온다 하여 설풍의 땅이라고도 불리는 이곳.
그중에서도 철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마르세유에 세워진 묵빛의 철옹성 하나.
무려 천여 년을 자랑하는 대륙의 유일한 제국이자 패자라 불리는 세투란 제국의 황성이다.
해도 저문 지 오래, 모두가 잠든 시간이건만 홀로 외로이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양어깨에 사자의 머리를 장식처럼 얹고, 그 안에 묵빛 갑옷을 입은 그는 굵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 위에 십자 형태의 관이 두르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보이는 뿜어지는 맹수를 닮은 듯한 눈빛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이다. 거기다 두툼하면서도 높은 콧대, 그리고 꽉 다문 입새 위아래로 수북이 드리운 수염까지 흡사 삼국지의 장비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드는 이 사람, 세투란 제국의 현 제왕이자, 최고 마법회인 제아르크 마탑주의 제자로 대륙에서 유일한 마검사인 헤베키 곤 테페라 베야크였다. 뒤에 자리한 거대한 용맹함의 상징이자, 모든 전사들의 어버이인 전쟁의 신 카샤르 석상을 병풍 삼아 앉아 있던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손에 든 흰 종이를 보았다.
“이것이 알카인 왕국에서 가져온 종이라 했나?”
“그렇습니다. 베야크 칸(세투란 제국에서 황제를 지칭할 때 칸이라 한다.)!”
검은 털옷 안에 녹색 상하의를 입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중년 사내.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히 넘긴 반백의 머리와 실눈처럼 좁은 눈매 밑에 자리한 좌우로 비수처럼 날카롭게 뻗은 수염은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한 치의 빈틈도 허용되지 않을 듯싶은 이 사람이 바로 제국 내 정보기관 국장인 카알 마드리드 테베코 백작이었다. 새하얀 종이를 만지작대던 베야크 칸의 시선이 천천히 쳐들렸다.
“내 알기로 알카인 왕국의 주 수출 품목은 밀과 철일 텐데…… 어떻게 이런 종이를 만들어 낸 것이지?”
“그 부분에 대해선 저희도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근 십 년간 내전을 치르느라 왕국 내 사정이 좋지 않은 데다가 종이를 개발할 인력조차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서 이런 종이가 나돈다? 오십 년간 애를 써도 이것의 반도 못 만드는 제국과는 다르게 말이야.”
전 왕인 도베르는 일찍이 종이의 중요성을 깨닫고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건 베야크도 마찬가지라 자신이 직접 챙기곤 했는데 그 수많은 공을 들인 것이 이제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치미는 분노 때문인지 주위로 마나가 급격히 요동을 쳐댄다.
드드드드!
순간 천장에 걸린 마법등들이 꺼지고, 그 밑으로 흙먼지가 떨어져 내린다.
진저리 치듯 들썩이는 황성만큼이나 테베코의 안색 역시 하얗게 질렸다.
창백하다 못해 입가에 핏기마저 내비치던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쿵!
“고정하십시오. 칸!”
바닥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어둠에서 회색의 로브를 몸에 두른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깊숙이 덮은 후드 좌우에 해와 달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고, 양 소매 끝자락을 은색으로 장식한 이들이 바로 마법의 기원이자, 대륙 최고 마법회인 제아르크 마탑 사람들이다.
그중에서 허연 수염을 가슴에 늘어트린 채 붉은빛이 감도는 마석이 박힌 갈색 지팡이를 쥐고 제왕 앞으로 나서는 이가 있었으니 현 제아르크 마탑주인 페페토였다.
“오셨소. 사부!”
어느새 마나 파동을 잠재운 베야크 칸은 슬쩍 목례를 한다.
그와는 달리 페페토는 허리를 숙여 답했다.
“화는 몸에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누그러트리십시오.”
“제국이 잘만 돌아간다면야 내 화낼 것이 어디 있겠소. 그나저나 이곳엔 어쩐 일이오?”
“종이 때문에 왔습니다.”
“사부도 이 종이 때문에 온 것이란 말이오?”
“아마도 그 종이는 엘프의 것이라 판단이 되어서 말입니다.”
“엘프들이 쓰는 종이란 말이오?”
“과거 엘카인 왕국은 하이엘프들의 서식지였습니다.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지만 그들의 문물은 아직 조금은 남아 있을 겁니다. 거기다 테베코 백작의 말에 따르면 왕국 내에서도 그 종이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하니 그들 스스로 개발한 것은 아니라 사료됩니다.”
“그러니까 우연히 하이엘프들의 문물을 얻은 이가 있다는 말이오?”
“지금으로서는 그게 제일 신빙성 있는 이론입니다.”
덥수룩한 수염을 매만지던 베야크 칸이 물었다.
“테베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대로 두고만 볼 수 없는 일 아닌가? 하이엘프의 유물이라면 더더욱 마법에 관련된 것이 많을 테니 말이야.”
“현재 물품을 파는 이는 알카인 왕국의 바딘 백작으로 한때 현 재상인 조바오니 공작에 맞서던 인물로 내란 중 권력 암투에서 밀린 후 현재 왕실 상단을 운용 중이라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태생이 권력가로 물품 개발에 힘을 쏟을 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말은 물품을 제조하는 이가 따로 있다는 것인데 그게 누구인지 도통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알아낼 수 없다는 말인가?”
“의심 가는 이는 있습니다. 바딘 백작령에 거주하고 있는 릭 캐슬이란 자로 현재 화이트 그리핀 상단의 상단주로 있습니다. 한데 이상하게도 영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음에도 대량으로 물품을 백작가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따로 물품을 제조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베야크 칸은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사부! 정보처에 제대로 돈 주고 있소?”
“원하는 만큼 주고 있습니다.”
“근데 어째서 하늘에서 물건이 뚝 떨어져 판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오?”
“그렇지 않아도 그 보고를 수상히 여겨 따로 조사를 해봤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결론은 하나뿐입니다. 물품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베야크 칸은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본다.
“물품 출처 하나 못 알아내는 꼴이라니……. 이거 내가 세투란 제국의 황제 맞나 모르겠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칸!”
쿠쿠쿠쿵!
바닥에 머리가 처박힌다. 노구의 페페토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 모습을 베야크 칸이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다 굳게 다문 입술을 틀었다.
“테베코, 넌 지금 즉시 알카인 왕국으로 가 화이트 그리핀 상단주를 만나라! 그래서 그곳에서 판매하는 종이의 판매권을 따 와! 아니면, 종이 제조 기법을 따 오든지! 그 전까진 모두들 내게 얼굴도 디밀지 마. 알았어?”
“칸의 엄명을 가슴에 새기고 떠나겠나이다.”
한 차례 바닥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테베코의 몸이 일으켜졌다.
“사부는 이 종이의 출처에 대해 알아보시오! 만약 하이엘프가 만들었다면 이것을 만들기 위해 쓴 마법이 무엇인지, 제국에서 만들 수 있는지까지 모두 다 알아보시오! 내 말 알아들었소?”
“칸의 명에 따르겠나이다.”
돌아서는 페페토를 뒤따라 모든 이들이 나서고 홀로 남은 베야크 칸에게서 마나가 넘실넘실 피어오른다.
“오십 년 들인 공을 이렇듯 허무하게 날릴 순 없지. 어떻게 해서라도 그 노고에 대한 보상은 받아야겠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쓰더라도 말이야.”
쾅!
굴러가는 발을 따라 주위로 뻗어 나가는 마나에 일순 궁전이 몸서리를 쳤다.
한밤중의 습격이 있은 지 어느덧 두 달여가 지났다. 그동안 화이트 그리핀 상단은 문을 걸어 잠그고 희생자들의 장례식과 추모제를 지내느라 바쁘게 지냈다. 특히나 보름 전쯤 영지성을 떠들썩하게 만든 상단의 장례 행렬은 하임이트 영지뿐만 아니라 온 왕국을 발칵 뒤집어 놨다.
그럴 것이 관을 둘러멘 상여꾼들 앞엔 새하얀 백의를 입은 우현이 상주로 자처해 나섰고, 뒤로 레이젠, 소네스, 그리고 열다섯 개의 위패를 든 유족과 함께 모든 상단 사람들이 상단을 나와 영지성을 한 바퀴 도는 그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엄숙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바딘 백작이 직접 영주관을 나와 허리를 숙였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그렇게 영주 성을 돌아 다시 상단으로 들어간다 싶더니 온 세상이 떠들썩하니 곡을 해댄다. 어찌나 슬프게 우는지 소리만 들어도 저절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모든 상단원들이 우는 가운데 열다섯 개의 관은 화장되었고 남은 유골을 담아 위패와 같이 저택 한편에 만들어 놓은 임시 사당에 모셔두었다. 임시 사당이라 한 것은 나중에 위령비 공원이 설립되면 옮길 예정으로 그 전까지 유족들이 희생자들의 넋을 추모할 곳이기 때문이었다.
추모제가 끝나자, 사람들은 이 일련의 행위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대체 어떤 이이기에 이렇듯 장엄하게 장례를 치르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한 상단 사람으로부터 일전의 사건으로 인해 죽은 희생자들, 특히 용병들을 위해 그리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사람들은 더더욱 놀랐다.
상단원이 다친 것도 아니고 단지 상단과 계약한 용병이 죽었다고 이리 크게 장례식을 치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상단주인 우현이 상단 사람들을 어찌 대하는지가 알려지면서 그를 칭송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개중에는 화이트 그리핀 상단 일이라면 자발적으로 발 벗고 나설 정도로 맹목적인 이도 있었다.
이렇듯 우현에 대해 칭송이 높아지는 것과는 반대로 보르네오 자작가의 위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끝없이 추락해갔다. 뿐만 아니라 몰핀 남작이 그렇게도 탐을 냈던 흰 종이라는 것에 대해 타국 상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화이트 그리핀 상단의 이름을 온 대륙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점점 높아지는 위상과는 달리 정작 상단은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함인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