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 merchant RAW novel - Chapter 4
차원상인 004화
뒤뚱뒤뚱 뛰어오는 그를 본 레이젠은 혼자 타고 가기 미안했는지 속도를 늦춰 뒤따라오기 편하게 했다. 그래 봤자 힘든 쪽은 우현인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을 아직 안 했군. 난 페릴 레이젠이라 하네. 한때 도베르만 공국의 왕실 기사단이었던 이라네.”
‘도베르만 공국? 그건 또 어디 있는 나라야? 그리고 왕실 기사단 출신이라고? 그거 무술 잘하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 아니야?’
무협 영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엄청난 검술 실력을 보이더니만 그런 내력을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 상인으로 릭 캐슬이라 합니다.”
우현이라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었지만 왠지 그러면 멋대가리가 없을 듯싶어 평소 재미있게 본 미국 드라마인 캐슬에 착안해 릭 캐슬이라 지어버렸다. 그러냐며 끄덕대던 그는 우현이 걸친 신사복을 묘한 눈빛으로 훑는다.
“그나저나 행색이 좀 기이하군.”
“아, 신사복이라고 신사들만 입는 것입니다.”
“신사?”
“그게…… 젠틀맨이라 하여 어느 정도 직급이 높은 이들이 입는 것입니다.”
“직급이 높다라……. 그럼, 대충 어찌 되는가? 남작, 자작?”
순간 우현의 발걸음이 멈칫거렸다. 신사를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대충 둘러댄 터라 어찌 답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머뭇대는 그에 눈살을 찌푸리던 레이젠이 재차 물어왔다.
“직위가 어찌 되는지 물었네.”
‘젠장! 나도 모르겠다.’
거듭되는 말에 두 눈을 질끈 감고 답한다.
“왕족입니다.”
“진짜로 왕족인가?”
재차 확인해 오는 그에 고개를 주억댔다. 어차피 사실을 확인할 방법도 없는 데다가 직위를 묻는 것이 계급이 우선시되는 세상인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레이젠은 상대가 왕족이라는 사실에 당혹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왕족이니 이런 곳에서 맘 편히 누워 있었던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해가 된다고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다. 낯선 상대의 말을 덜컥 믿어주는 어수룩한 멍청이도 아니고, 왕족이라 하기에는 행동거지나 말투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의심 가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황무지를 빠져나갈 때까지 지켜봐야겠군. 정체를 캐묻더라도 안전한 곳에서 하는 것이 좋으니 말이야.’
잠시나마 장단을 맞춰주기로 한 그는 우현을 향해 사과를 건넸다.
“하대를 해서 미안하군. 설마하니 그대가 왕족일 줄은 몰랐네.”
“괜찮습니다. 어차피 오래전에 몰락한 왕족의 후손인지라 그리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왕족을 칭한 것이 맘에 걸리는지 몰락한 왕족이라고 부연 설명을 하였다.
그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듯 상대는 피식 입꼬리를 뒤틀었다.
“자네가 괜찮다고 하니 편의상 하대를 하도록 하겠네. 이해해 주게나!”
“그러십시오.”
고맙다는 듯 잠시 고개를 숙이던 레이젠은 어느 왕국에서 왔는지 물었다.
“코리아라고…… 이곳에서 먼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레이젠은 턱을 만지작댔다.
암만 생각해도 그런 왕국은 들어 본 적이 없어서였다.
“왕국이 제법 멀리 있는가 보군.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을 보니 말이야.”
“배를 타고 제법 멀리 간 곳에 있습니다.”
“잠깐! 자네 지금 배를 타고 왔다 했는가?”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순간 우현의 입이 꾹 다물어진다.
마치 먹이를 보는 매처럼 매서운 눈빛이 레이젠에게서 뿜어져 왔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테오른 황무지는 마르세우니스 대륙의 중남부 끝자락에 위치해 있기는 하지만 에워싸듯 둘러싼 산맥에 득실대는 몬스터들 때문에 바닷가 쪽으로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만약 그의 말대로 배를 타고 왔다면 한참 돌아서 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테오른 황무지가 어떤 곳인지 몰랐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주위 사람들에게서 풍문이라도 들었을 테니 말이다. 거기다 상인치고는 너무나 단출한 짐하며,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의구심을 더욱 키웠다. 자신의 속을 헤집는 듯한 그 날카로운 눈빛에 우현은 절로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뭔가 실수라도 한 모양이군.’
영업맨 생활을 통해 얻은 눈칫밥 때문인지, 상대의 눈가에 어리는 의심의 빛을 읽은 우현은 내심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태연한 빛을 띠었다. 못 먹어도 고라는데 기왕 하는 거짓말! 끝까지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묵묵히 바라보던 레이젠이 막 입을 떼려는 찰나 뒤쪽에서 돼지 멱따는 듯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 형님! 네시아가 많이 아픕니다.”
“네시아가?”
순간 레이젠의 안색이 변하는가 싶더니 마두를 돌려 마차 쪽으로 향한다.
마치 우현 따윈 언제 봤냐는 듯 말이다. 그런 그를 보는 우현의 낯에 왠지 묘한 빛이 깃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철옹성 같던 이가 눈동자가 불안한 것도 모자라 저리 안절부절못하는 걸로 봐서는 네시아라는 사람이 매우 귀중한 사람 같아 보이는데…… 혹시 아내가 아픈 건가, 아니면 딸이나 아들?’
상황 정리를 하던 우현은 슬쩍 가방을 살폈다. 어릴 적 맞벌이 부부였던 부모 탓에 동생들을 보살피는 것을 도맡아 하던 그였다. 한 번은 서연이가 두 살 때 고열이 심하게 나 등에 업고 울면서 병원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얼마나 아찔했는지 지금도 해열제와 감기, 몸살 약은 물론 체온계까지 다 챙겨 다니고 있었다.
가방에 약이 있는 것을 확인했으면서도 그는 발걸음을 마차 쪽으로 쉬이 옮기지 못했다.
자신이 간다 한들 네시아란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도망치자니 아까 본 몬스터란 것이 눈앞에 아른거려 미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복잡한 머릿속과는 달리 몸은 어느새 레이젠을 향해 있었다. 아마도 생존을 위해선 그가 필요함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그래! 길도 모르는 내가 몬스터들이 날뛰는 이곳에서 벗어나려면 저 레이젠이라는 사람이 꼭 필요해. 그러니 일단 마차로 가서 상황을 살피자!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든, 줄 수 없든 간에 나로선 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니 말이야.”
마음을 굳힌 그는 서둘러 주위에 떨어진 물품들을 챙겨 뒤쫓아 갔다.
한편, 마차 안으로 들어온 레이젠은 상황이 어떤지 물었다.
“소네스! 네시아는 어떠냐?”
후덕한 몸매와 얼굴에 아랍인들이 쓰는 터번처럼 긴 천을 이마에 칭칭 감은 한 사내가 새우 눈 같은 좁은 눈매를 찡그리며 답했다.
“전신에 열이 끓고 머리와 목이 아픈지 통증을 호소하고 있어.”
황무지에 들기 전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지라 걱정은 눈덩이처럼 커져 갔다. 누워 있는 열 살가량의 딸을 품에 안은 레이젠은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았다.
“네시아, 눈을 떠 보아라! 네시아야!”
연신 불러보지만 굳게 감긴 눈은 뜨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서, 정신 차려 보아라!”
애타는 마음만큼이나 부르짖는 소리 역시 애달파진다.
과거 아내가 병사로 명을 달리했던 터라 더욱더 그러하다.
“소네스! 힐이라도 써보아라! 어서!”
“형님! 고작 2써클 마법사가 뭔 힘이 있다고 힐을 씁니까?”
그랬다. 마법사라고 한들 다 힐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5써클은 되어야 할 수 있는 고급 마법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력을 다루는 사제와 마력을 쓰는 마법사와의 커다란 차이점이기도 했다.
“그럼, 방법이 없는 것이냐?”
“이 황무지에서 뭔 수가 있겠습니까? 있다면 어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 사제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밖에 없죠.”
답을 하는 소네스도 속이 타는지 연신 한숨만 내쉰다.
이렇게 애를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 사이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어 온다.
“밖에서 들으니 고열에다 목과 머리가 아프다 했는데…… 그것 말고 다른 건 더 없습니까?”
언제 왔는지 우현이 마차 안으로 올라온다.
갑작스러운 난입에 소네스는 짜증 어린 낯빛으로 막아섰다.
“넌 대체 뭐 하는 놈인데 끼어드는 거야?”
“제가 누군지는 접어두고 아이의 증상이나 말해주십시오.”
우현도 지지 않고 맞받아친다. 그런 그가 더 화를 치밀게 만들었는지 소네스에게서 살기 돋친 눈빛이 쏘아진다.
“아직도 이놈이…….”
“소네스! 그 사람 말대로 네시아의 증상을 말해주어라.”
“형님!”
버럭 소릴 지르는 소네스를 손을 들어 제지한다.
입을 다물면서도 여전히 우현이 맘에 안 드는 듯 쏘아보다 고개를 홱 돌린다.
“미약한 경련이 좀 있었고, 마치 전신이 얻어맞은 듯 통증이 있다고 해! 그리고 몸에 작은 두드러기가 있어.”
“아이가 몇 살이죠?”
“여섯 살이네.”
지켜보기 답답했는지 소네스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레이젠이 답해주었다.
‘전신이 얻어맞은 듯한 통증이야 근육통을 말하는 것일 거고, 두드러기는 열꽃을 말하는 걸 거야. 문제는 경련인데…… 미약하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경기를 일으킨 것 같고, 혹시 열성경련인가?’
열성경련이란 생후 9개월에서 5세 사이의 소아가 발열을 동반한 경련을 하는 것을 말하는데 뇌수막염, 뇌염과 같은 중추신경계의 감염에 의해 경련이 유발되었거나 평소에 경련성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서 발생하는 것은 열성경련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한, 열성경련은 부모나 형제가 열성경련의 병력이 있으면 일반인보다 3~4배 정도 높게 발생 빈도가 나타나 유전적 영향이 매우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모나 되어야 알 만한 내용을 우현이 알고 있는 것은 다 어릴 적 서연을 병원에 데려갔을 때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야 어려서 뭔 말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책을 찾아본 적이 있어 지금까지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근데 문제는 네시아란 아이가 앓고 있는 병이 단순 독감인지, 아니면 진짜로 열성경련인지 파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병이 아예 아닐 수도 있다. 이는 고작 책 몇 줄 읽은 자신이 아닌, 전문 소아과 의사들이나 아는 고차원적인 의술이기 때문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그가 답답한지 레이젠이 물어온다.
“네시아가 나을 방도를 알고 있는가?”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확신이 안 섭니다.”
“확신이 안 서?”
“아이들의 경우 면역 체계가 약해 조금만 아파도 이처럼 열이 많이 나기 때문에 쉬이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거기다 제가 의사도 아니고 말입니다.”
“의……의사?”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의 말에 나머지 두 사람은 갸웃댄다. 병을 낫게 하는 의사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지금 처음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리둥절한 그들을 뒤로한 채 우현은 여전히 네시아의 머릿속은 병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차피 아이가 앓고 있는 병이 뭔지 나로선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다음 일은 하늘에 맡기고 말이야.’
마음을 굳힌 그는 레이젠에게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