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 merchant RAW novel - Chapter 51
차원상인 051화
순간 우현의 고개가 휴대폰에서 떨어진다.
서연이도 한 기차 통 삶아 먹는데 우리는 그 정도를 뛰어넘은 듯하다.
‘뭔 여자가 이렇게도 목소리가 큰지…….’
내젓던 그때 우리의 말이 들려온다.
“야야! 너 또 여자가 목소리 크다고 구시렁대고 있지?”
뜨악하던 우현은 서둘러 휴대폰을 입가에 댄다.
“서, 설마 그러겠어?”
“말 더듬는 게 어째 수상한데?”
“수상하긴……. 그보다 왜 전화한 거야?”
“왜…… 했냐고?”
“그래, 왜 전화했어?”
“그러니까 그게…… 나, 나 배고파! 밥 사줘!”
순간 맥이 탁 풀린다.
“그것 때문에 전화했냐?”
“저번에 네가 그랬잖아. 나 백조라고 하니까 밥 정도는 사줄 수 있으니 전화하라고! 그러니까 밥 좀 사줘.”
그러고 보니 저번에 차에서 무슨 일 하고 지내냐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알바하다 쫓겨나서 지금은 백조라고 하길래 언제고 배고프면 전화하라고 했던 것이 생각난다.
“근데 오늘은 좀 그렇고 내일 보자.”
“내일? 크리스마스이브? 언제?”
“저녁때쯤에 전화해. 데리러 갈게.”
“약속했다?”
“그래, 약속했다. 그럼, 나 지금 좀 바쁘니까 나중에 통화하자.”
“조심해서 일하고 내일 저녁때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우현은 한숨을 푹 내쉰다.
한바탕 치도곤을 당한 듯 온몸이 다 아파온다.
“어째 나이 먹을수록 더 독해지냐?”
혀를 내차던 그는 차에 올라타서는 창고로 향했다.
“누나, 아직도 배고프세요?”
바닥에 널린 십여 개의 빈 그릇을 보며 최 매니저가 물었다.
통화를 마치고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던 우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헛소리하지 말고, 저번에 말한 대로 스케줄 빼놨겠지?”
“오늘 오후부터 크리스마스 이후 다음 주까지 빼라고 해서 다 밀어두었습니다.”
“그래, 잘했어! 말자야! 말자야!”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코디 이말자가 서둘러 뛰어온다.
“언니, 부르셨어요?”
“내일까지 20대 중반 고아 자취 백조 콘셉트로 옷 좀 뽑아봐! 헤어 디자이너에겐 그에 걸맞은 스타일을 생각해서 연락해달라고 전하고 말이야.”
“20대 중반의 고아에, 자취 백조 콘셉트요? 이번 드라마 콘셉트는 재벌 2세 차도녀 스타일에 쿨한 모습이 강한 캐릭터로 알고 있는데…… 언제 또 바뀌었데요?”
“그건 아니고 개인적인 일 때문에 그러니까 그렇게 좀 준비해줘. 알았지?”
갸웃대던 코디 말자는 물어왔다.
“내일 언제까지 준비해야 하는데요?”
“아침까지! 오후에는 나가봐야 하니까.”
“촉박하네요.”
절로 이맛살이 좁혀 들어간다.
그런 그녀를 달래듯 조금은 나긋하게 말을 해간다.
“힘들겠지만 잘 준비해줘. 참! 이번엔 리얼리티가 아주 중요하니까 그 점 명심하고…….”
“리얼리티라…….”
잠시 생각에 잠기던 코디 말자의 두 눈이 번뜩인다.
“언니! 내 친구 중에 고아에, 알바만 전전하는 애가 있는데 괜찮으시면 걔 옷을 입어보는 건 어떠세요?”
“네 친구 옷을 입으라고?”
“예! 체구도 얼추 비슷하고, 제 생각에는 리얼리티가 확 사는 게 아주 딱일 것 같은데 말이에요.”
좋은 생각이라는 듯 우리의 고개가 끄덕인다.
“근데 정말 걔한테서 빌릴 수 있겠어?”
“의상비조로 돈 조금 주면 가능할 거예요.”
“여배우 가오가 있지. 조금이 뭐야? 넉넉하게 준다고 해! 대신 입조심 시키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알았어요.”
코디 말자가 막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려는데 돌연 우리가 막았다.
“근데 걔 보통 어떻게 하고 다니지?”
“옷 입는 거 말하는 거예요?”
우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거 말고 헤어스타일이나, 코디법 같은 것 중에 특별한 거 있냐는 말이지.”
“특별한 건 없는 걸로 아는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알아봐! 알았지?”
“예, 언니!”
주억대는 그녀를 보던 최 매니저가 슬쩍 물어왔다.
“근데 누나 왜 스케줄 빼라고 하셨어요? 이번에 들어온 드라마는 맘에 든다고 빨리 촬영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사정이 좀 있어?”
“뭔데요? 혹시 남자 생겼어요?”
“남의 사생활은 건드리는 거 아니라고 했지?”
“이전과 너무 다르니까 하는 말이죠.”
우뚝 멈춰 선 우리는 매보다도 더 날카로운 눈매를 치켜뜬다.
“최 매니저! 너, 나와 꽤 오래 일한 듯싶다.”
순간 최 매니저는 뒷골이 오싹해짐을 느낀다.
우리를 두고 흔히들 일일단사라 하는데 이는 함께한 매니저들이 그녀의 지랄 맞은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하루 만에 사표 쓰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현재 최 매니저는 일한 지 두 달째가 되지만 오늘내일 하는 상황인지라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헤헤헤!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별 뜻은 없습니다.”
어느새 양손을 비비며 꼬리를 흔들어댄다.
그 모습에 조금은 풀렸는지 목소리가 좀 수그러든다.
“잊지 마! 내 말 한마디면 네 목이 댕강한다는 거!”
“그럼요. 잘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최 매니저의 얼굴엔 미소가 한가득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젓던 우리는 이내 일어섰다.
“졸려서 좀 잘 테니까 그리 알아!”
편히 쉬시라고 막 거실을 나가려던 그때 발걸음을 멈췄다.
“아! 내일 밖에 나가는 거 언니에겐 비밀이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맘이 놓이는지 세웠던 발을 옮겼다.
안방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던 최 매니저가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누나, 왠지 봄바람 난 거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나 역시 동감!”
서로를 보던 둘은 어느새 주억대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침대에 대자로 누운 우리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띤다.
“단둘만의 데이트라…….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거, 기분 좋은데?”
뒹굴뒹굴 침대 위를 구르던 그녀는 문득 옆에 놓인 작은 서랍장에서 사진 하나를 꺼냈다.
이젠 바래다 못해 누렇게 떠버린 그 사진 속에는 세 아이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중 맨 왼편에 자리한 한 소녀를 우리는 연신 매만졌다.
“나라도 같이 만났으면 좋을걸…….”
문제를 일으켜 다른 시설로 간 우현과 열여섯 살 때까지 시설에 있었던 그녀와는 달리 나라는 셋 중 유일하게 친족이 데려갔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으니 지금쯤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 생각되지만 그래도 어릴 적 유난히 울보였던 그녀를 떠올리면 가슴 한편이 먹먹해진다.
혹시나 몰라 배우가 된 후, 1년에 한 번씩 시설에 가서 나라의 소식을 물어보지만 그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심부름센터를 이용해볼까도 싶었지만 괜히 나라네 가족들에게 분란만 만들 듯싶어 꾹 참았다.
“나라야! 잘 지내지. 나도 잘 지내. 참! 만세 만났다. 네가 잘 따르던 만세 말이야. 어릴 때는 독기 가득해서 무섭고 그랬는데 지금은 키도 훤칠하니 제법 잘생겨졌어. 그래서 사람은 다 커봐야 아는가 봐. 나라야! 보고 싶다. 너도 그렇지?”
사진을 가슴에 올린 그녀는 물기 가득한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하면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듯 말이다.
제3-1장
“약속 장소가 여기쯤일 텐데?”
회사원 퇴근 시간인 오후 6시, 때마침 크리스마스이브라 사람들로 붐비던 봉천동 사거리 횡단보도 근처에 선 한 여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눌러쓴 모자 밑으로 늘어트려진 감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얼굴 반을 뒤덮은 검은 뿔테 안경에, 후줄근한 후드 점퍼, 청바지, 스니커즈를 신은 이 사람, 바로 고우리였다.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고, 구겨 신은 스니커즈를 질질 끄는 모양새가 어느 누가 봐도 딱 백조, 그 자체다. 크리스마스이브라 한껏 들떠 있던 행인들도 한심하다는 빛을 띨 정도로 말이다.
‘주위 반응으로 보아하니 제대로 리얼리티를 살리려나 본데…….’
여인은 남몰래 실소를 흘린다. 그럴 것이 지금 그녀는 20대 초반 고아에, 자취 백조 콘셉트를 위해 혼신(?)의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이 진짜 백조로 보는 듯하다. 디테일함을 살리기 위해 어제저녁 감지 않은 푸석한 머리를 긁적대던 그때 낯익은 차 한 대가 앞으로 온다.
“우리야!”
“오호! 만세냐?”
고우리는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는 신발을 질질 끌며 차에 올라탔다.
차에 앉기 무섭게 구겨진 스니커즈를 벗고 맨발을 조수석 앞 서랍 위로 올렸다.
나름 백조라는 콘셉트를 살리기 위해 맨발에, 그것도 반쯤 벗겨진 패티큐어의 양 엄지발가락을 까닥대는 그녀를 보며 우현은 기가 찼다.
“지금 앉은 자세, 뭐냐?”
“왜? 편하기만 하구만!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오라이!”
“야야! 지금 그 말이 나오…….”
“입 지퍼 닫고 운전이나 하셔!”
무좀이라도 있는지 발가락 사이를 손가락으로 비비다 냄새를 맡는다.
어이없어하는 우현에 고우리는 비비던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왜? 냄새 안 나! 오기 전에 씻었어! 한번 확인해봐!”
“야야! 더럽게 뭔 짓이야? 됐다! 내가 백조인 널 두고 뭔 말을 하리.”
“백조, 백조 하지 마라! 듣는 백조 기분 나쁘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운전대를 돌려 간다. 막 사거리에서 우회전해 가던 그는 슬쩍 말을 건넸다.
“근데 옷이 왜 그래?”
난데없는 옷 지적에 고우리의 몸이 멈칫댄다.
혹시나 걸렸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답을 하는 모습이 퉁명스럽기 그지없다.
“뭐가?”
“옷 좀 단정하게 입지.”
“내 옷이 어때서? 편하게 잘만 입었구만!”
되도 않는 지적질은 말라는 듯 눈을 흘긴다.
“아니, 네가 백조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동생들 보는 자리에서 그리 입는 건 좀 아닌 듯…….”
“뭐? 동생들? 네 여동생들 본다고?”
너무 놀란 나머지 고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하고 만다.
그런 것도 모른 채 우현은 전방만 주시한 채 운전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친구 부모님 중에 내가 친부모처럼 여기는 분들이 계셔. 그분들이 오늘 동생들과 같이 식사를 하기로 약속을 잡았는데 때마침 네가 전화했길래 오랜만에 집 밥 좀 먹으라고 불렀지.”
“잠깐! 여동생들이랑 같이 친부모로 여기는 분들 댁에 간다는 거야?”
“그렇지!”
그렇다는 말에 고우리의 울화통이 뒤집어진다.
“야! 그런 게 있으면 미리 이야기해야지. 지금 이야기하면 어떻게 해?”
버럭 소릴 질러대는 그녀에 우현은 깜짝 놀랐다.
“나 운전 중이야! 갑자기 고함을 치면 어떻게 해?”
“지금 그게 중요해?”
“그럼, 뭔가 중요한 건데?”
반문을 하는 그에 이내 고우리는 고개를 돌리고 만다.
더 말 섞어봤자 좋을 것 없다 여긴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완전히 콘셉트 잘못 잡은 건데 어떻게 하지?’
그랬다. 우현의 말대로 여동생과 친부모처럼 여기는 분들이 계신 자리라면 자신이 한 백조 콘셉트가 아닌 청순한 여인 콘셉트가 어울렸다. 이건 콘셉트를 잘못 잡다 못해 아이돌 발연기에 버금가는 테러리스트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