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 merchant RAW novel - Chapter 6
차원상인 006화
“그게…….”
순간 말이 막히고 만다. 명색이 상인이니 팔 물건이 있어야 할 텐데…….
대체 뭘 내놔야 할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이었다.
‘급한 대로 상인이라 한 것이…… 내 목숨 줄 죄는 거 아니야?’
이맛살에 점점 골을 깊게 새겨 가던 그때, 소네스의 옆에 놓인 것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책 같아 보이지만 종이라고 하기엔 그런 것이 아무래도 가죽으로 된 듯싶었다.
‘저거 혹시 양피지 아니야?’
그러고 보니 중세 시대에는 종이가 있긴 했지만 워낙 귀해 대부분 양피지 같은 가죽이나, 나무껍질을 엮은 것에 글을 썼다 들었다. 순간 자신의 가방에 있는 A4 용지를 떠올린 우현은 슬쩍 양피지로 엮은 책을 가리켰다.
“소네스 형님! 혹시 이거 양피지입니까?”
육포를 꺼내 막 파이어 마법을 하려던 소네스가 끄덕댄다.
“어, 근데 그건 왜 묻는 거야?”
“종이를 쓰지 않는 듯싶어서 물었습니다.”
눈살이 꿈틀거린다. 조금은 빈정 상했기 때문이다.
“타국에서 와서 이곳 현실을 몰라서 그리 묻나 본데 종이는 매우 귀해! 왕족이나 돼야 구할 수 있는 거라고.”
“그렇습니까?”
우현의 입가에 감도는 미소를 보곤 설마 하는 빛을 띠었다.
“혹시 너 종이 있는 거야?”
“예, 형님!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왕족들만 쓰는 종이가 있습니다.”
“어디 한번 봐봐!”
마탑에서 수련했던 소네스는 종이가 얼마나 구하기 힘든지 잘 안다. 대륙에서도 부자 중에 부자라 칭하는 마법사들이 모인 곳인데도 종이로 된 책 한 권 가지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현은 그 귀한 종이를 팔 생각이라고 하니 어찌 호기심이 동하지 않겠는가?
반짝거리는 그의 두 눈 위로 우현이 가방에서 꺼낸 A4 용지 한 묶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종이인 거야?”
보통 종이라 하면 길게 잘라 둘둘 말아 판다. 한데 우현이 내놓은 것은 부피도 그리 크지 않고, 물건을 싸고 있는 이상한 재질과 그 위에 쓰인 괴상망측한 글씨까지. 도저히 종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싶었다. 실망한 듯한 빛의 소네스에 우현은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보고 기절이나 하지 마라!’
득의양양한 얼굴로 포장지를 슬쩍 뜯었다.
순간 속살을 보이듯 새하얀 빛의 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본 소네스는 물론이고 네시아까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와아! 새하얗다!”
“이…… 이게 종이란 말이야?”
“그렇습니다. 한번 만져보십시오.”
종이 세 장을 빼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종이를 만지작대던 네시아에게서 탄성이 인다.
“우와! 이게 종이예요? 너무나 부드러워요!”
“나도 마탑에서 종이를 몇 번 봤는데 이렇듯 부드러운 종이는 처음이야. 거기다 크기도 쓰기 좋게 적당한 것이 좋군, 아주 좋아!”
소네스 역시 놀란 듯 연신 신기해하였다.
‘약을 칠 땐 타이밍이 생명이라고 했지?’
선배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우현은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형님, 이건 왕족에게 바치는 진상품 중에 특품으로 저에게만 할당된 것입니다.”
“호오! 이 정도라면 충분히 특품이라 할 수 있지.”
그래서일까? 혹시라도 때가 탈까 봐 그들은 조심조심 만졌다.
그들을 보며 남몰래 조소하던 우현에게 소네스가 말을 걸어왔다.
“근데 종이는 이게 다야?”
“아닙니다. 더 있습니다.”
가방에서 네 묶음을 더 꺼내 늘어놓았다. 아까 것과 포장지가 똑같은 것이 굳이 까보지 않아도 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종이가 때를 탈까 봐 두려워 그런 것도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근데 종이가 너무 적은데…….”
“이번이 첫 거래라 이 정도만 가져왔습니다. 괜히 많이 가져왔다 안 팔리면 제 손해 아닙니까?”
“하긴 그렇기도 하지.”
물량이 적다는 말에 우현은 첫 거래라서 그렇다고 하였다.
혹시나 자신이 진짜 상인이 아님을 눈치챌까 봐 그런 것이었다.
조마조마한 그의 속과는 달리 소네스는 의심 따윈 전혀 없는 듯하다.
“그럼, 물건은 종이 하나뿐인가?”
“아닙니다. 이것도 있습니다.”
그는 서둘러 주방용 칼 세트의 포장지를 뜯었다. 중세 시대에 뭔 칼 세트냐 하겠지만 귀족들이란 원래 허영과 허세의 대명사라 들었다. 그런 그들이라면 충분히 살 것이라 여겨져 일단 내놓기로 하였다. 뭐, 안 팔리면 어쩔 수 없고 말이다.
“요리사들이 쓰는 주방용 칼입니다.”
종이와는 달리 그다지 회가 동하질 않는지 대충 훑어본다. 마법사인 탓에 그런 것인데 우현은 그런 그를 보며 영업맨의 본능이 발동했는지 떠나는 시선을 잡았다.
“형님, 그러지 마시고 자세히 보십시오. 아주 좋은 물건입니다.”
성능 시연을 하려고 막 칼을 빼 들려는데 소네스는 손을 들어 막았다.
“됐고! 판로는 정했어?”
“예에……. 그게 아직…….”
“정하질 못했다는 거네.”
“그렇습니다만…….”
입꼬리를 끌어 올리던 소네스는 일어나 밖으로 갔다.
잠시 후, 마차가 멈추고 레이젠이 안으로 들어왔다.
“웬 칼인가?”
자리에 앉으려다 바닥에 놓인 칼들을 보고 물어온 것이다.
“요리사들이 쓰는 주방용 칼입니다.”
“주방용 칼?”
날카롭기 그지없는 칼날하며, 가볍디가벼운 무게와 손에 착 달라붙는 그 느낌까지 단순히 주방용 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좋았다. 그렇다고 무기로 쓰자니 검신 두께가 얇은 것이 싸울 때 쓰기에는 그리 좋지 않을 듯싶었다.
“무기로는 그래도…… 주방용이라면 괜찮을 듯싶군.”
살피던 칼을 내려놓은 레이젠은 옆에 놓인 종이를 살피며 물었다.
“소네스, 왜 오라고 한 것이냐?”
“형님! 예전에 바딘 백작과 만난 적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흐음! 만난 적이야 있지. 근데 그건 왜 물어보는 것이냐?”
소네스는 슬며시 고개를 쳐들며 입꼬리를 틀었다.
“무릇 판매를 할 땐 그 물건에 맞는 이를 찾아야 하는 법 아니겠어?”
“그걸 아는 사람이 이번 상행에선 쪽박 찼느냐?”
순간 소네스의 낯이 붉게 물들었다. 사실 페릴 형제가 황무지를 건너고 있었던 것은 이웃 왕국인 쎄아프 왕국이 수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밀을 사 들고 팔러 간 것이었다.
허나,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한가?
쎄아프 왕국은 수해를 입었음에도 밀 농사는 풍년이 들었다. 결국 갑자기 많아진 밀로 인해 값은 폭락했고, 그나마 판 것도 사기를 당하면서 알거지로 돌아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거야, 때를 잘못 맞춰서 그런 거지.”
“내 전 재산을 날려놓고 할 소리냐?”
“형! 나도 알거지거든!”
“됐다. 네 말을 들은 내가 바보지.”
홱 돌아서는 그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쳐든다.
물론 휘두르진 못한 채 홀로 분을 삭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백작이나 좀 만나게 해줘!”
“백작을?”
난데없는 말에 레이젠의 고개가 되돌려진다.
“형은 보고도 몰라? 이 물품들, 형이나 내가 살 물건으로 보여?”
“그럼, 이것들을 백작님께 팔겠다는 거냐?”
“당연하죠. 특히 종이 같은 것은 제값 받으려면 그 수밖에 없어.”
아까 봤던 종이를 떠올리며 레이젠은 맞는다는 듯 끄덕인다.
“하기야 이런 건 우리같이 돈 없는 이에겐 사치나 다름없지.”
“그러니까 백작을 만나야 한다는 거지. 대신…….”
소네스의 시선이 슬쩍 우현으로 향한다.
“팔면 소개비 2할이다. 어때?”
“자, 잠깐만요! 소네스 형님 말은 제 종이를 백작님께 팔자는 말씀이십니까?”
“너, 팔려고 종이 가져왔다며? 그럼, 팔아야지. 묵혀서 뭐 해?”
“그렇긴 그렇습니다만…….”
잠시 머뭇대던 우현의 두 눈이 번뜩 뜨인다.
이곳에서 자신이 어떻게 생존해 나갈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난 레이젠 형님이나 소네스 형님처럼 무술이나 마법 따윈 못하지만 상인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야. 영업맨으로서의 경험이 있으니 말이야. 그러니 돈을 벌자. 그리고 그 돈으로 여동생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예기치 못하게 자신의 생존법을 깨닫게 된 우현은 뛸 듯이 기뻐했다.
허나, 주위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 변화에 그저 고개만 갸웃거렸다.
“이봐! 캐슬, 뭔 생각 해! 소개비 2할이라고…… 2할!”
“아! 잠깐 딴생각 좀 했습니다. 근데 2할은 너무 많습니다.”
순간 제정신이 든 우현은 본능적으로 깎고 본다.
그간 영업하면서 몸에 밴 습관 때문이다.
많다는 말에 소네스는 기가 차다는 듯 말을 하였다.
“이런 물건이면 족히 금화 백 냥은 받을 거라고! 근데도 2할이 많아?”
순간 주위 사람들의 입이 쩍 벌어진다. 그럴 것이 금화 백 냥은 일반 백성들은 평생을 모아도 가질 수 없으며, 용병인 그들도 안 먹고 안 쓰고 죽어라 이십 년은 모아야 그 정도 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위 반응으로 보아 금화 백 냥이 아주 많은 금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쉬이 물러날 우현이 아니다. 본래 흥정이란 맞붙어야 제맛이기 때문이었다.
“소네스 형님! 1할이면 생각해보겠습니다만…… 2할은 많습니다.”
여전히 1할을 고수하는 그에 소네스의 이맛살이 좁혀든다. 맘 같아선 2할을 고집하고 싶지만, 네시아를 살려준 것도 있고, 금화 열 냥이면 이번 상행에 든 돈을 만회하고도 남기에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괜히 우현을 자극해 다른 이와 거래하겠다고 나설까 봐 신경도 쓰였고 말이다.
“좋아! 수고비는 1할로 하지.”
“저도 거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두 사람은 약속의 증표인 양 악수를 건넨다.
“그럼, 일단 여관에 여장을 푼 후, 백작가로 출발하자고! 자네 옷도 좀 갈아입고 말이야.”
슬쩍 자신의 흙투성이인 검은 정장을 살피던 그는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근데 소네스 형님! 처음 백작을 만나는데 깨끗하게 입는 것이 좋겠죠?”
맞는다는 듯 동의를 표하던 소네스의 시선과 마주친 레이젠은 한 차례 주억댔다.
“알겠다. 여관으로 향하지!”
말을 마친 레이젠은 마차를 나서 마부석에 올랐다.
이렇게 우현의 첫 상행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제1-3장
“이제 곧 영주관이야.”
설명하듯 소네스에게 네시아가 쀼루퉁한 입술을 삐죽댄다.
“작은아빠! 벌써 그 말만 여섯 번째거든요.”
“그걸 또 세고 있었어?”
“같은 말만 반복하니까 그렇죠!”
그랬다. 꼭 무슨 앵무새처럼 ‘이제 곧 영주관이다!’란 말만 되풀이한 지도 벌써 여섯 번이 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장미 넝쿨이 둘러진 영주관 담벼락을 따라 걸어간 지 벌써 사십여 분이 지났건만 도통 정문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이게 저택인지, 아님 성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네시아의 핀잔에 맘이 상한 듯 소네스가 고개를 돌리던 그때 한 무리의 병사들과 함께 거대한 철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멈추시오!”
외침에 따라 레이젠은 마차를 세웠다. 그러자 거무튀튀한 빛의 투구에 가죽 옷, 낫에 삐죽한 창날을 덧댄 것 같은 창과 둥그런 방패를 지닌 병사들이 마차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