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 merchant RAW novel - Chapter 8
차원상인 008화
상대는 귀족 중에 귀족인 백작. 필요하다면 죽임도 불사하는 이이니 말이다.
하나둘 자리에 앉고 하녀 한 명이 차를 가져와 앞에 내려놓았다.
“먼 길을 온 듯하니 식기 전에 한 모금씩들 하게나!”
일제히 잔을 드는 페릴 삼형제를 따라 마시던 우현의 낯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풀잎 향이 진하다 못해 독해 이건 차라기보다는 왠지 사약을 받는 것 같다.
진저리를 치던 그때 기분 좋게 차를 마시던 바딘 백작이 물어왔다.
“내 일전에 공국에서 봤던 그 페릴 레이젠이 맞는가?”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고개를 숙이는 레이젠을 손을 쳐들어 막는다.
“어허! 왕실 기사단까지 했던 사람이 어찌 머릴 숙이는가? 그러지 않아도 되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바로 세우자 바딘 백작이 되묻는다.
“근데 이곳까지는 어인 일인가?”
“사정이 있어 기사단은 그만두었고 지금은 물품을 팔러 다니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상인이 되었다는 소리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자리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게. 백작가는 자네 같은 인재는 언제든 포용할 의사가 있으니 말이야.”
“말씀만 해도 감사합니다.”
고맙다는 듯 레이젠이 고개를 숙인다.
빙그레 웃던 바딘 백작은 시선을 옆으로 돌린다.
“여기 같이 온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쪽은 제 동생 소네스이고, 요 옆에 있는 사람이 종이를 가져온 사람이자 저희 상단의 상단주입니다.”
바딘 백작의 시선이 소네스를 거쳐 우현에게로 향한다.
그렇지 않아도 모든 관심이 종이에 집중되고 있는 바 대체 누가 이걸 가져왔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상단주라 하였는가? 처음 보는 듯한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릭 캐슬이라 합니다.”
“어디 왕국 소속인지 물어도 되겠는가?”
“저 멀리 있는 섬나라로, 말씀드려도 잘 모르실 겁니다.”
“그런가?”
이곳에 오기 전 백작이 던질 예상 질문에 대해 소네스에게서 언질을 받아서 그런지 우현은 별 무리 없이 답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왕국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이 못내 걸린 듯 눈살을 찌푸리던 바딘 백작이 종이를 치켜들었다.
“그나저나 이걸 보낸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우현은 기다렸다는 듯 굳게 다문 입술을 벌렸다.
“실은 전 서남부의 섬나라 출신으로 우연히 다른 섬나라 왕국과 거래를 하다 그곳의 왕족들만이 쓴다는 이 종이를 얻게 되었습니다. 일단, 어렵사리 대륙으로 가지고 오긴 했는데 막상 판로가 보이질 않던 중 레이젠 형님이 백작님에게 파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여 이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소네스로부터 서남부에 섬나라가 많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그곳이라면 사칭을 한다 해도 들킬 위험은 없을 듯싶어 이리 말을 한 것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바딘 백작은 우현에게 물었다.
“왕국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코리아라 하는 곳입니다.”
“흐음…….”
미간이 사정없이 좁혀든다. 그 어디에서도 들어보거나, 본 적이 없는 왕국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남부에 위치한 섬나라가 워낙 많은 터라 그중 하나이겠거니 하며 별 의심이 넘어갔다.
“그러니까 자네의 말 요지는 내게 종이를 팔려고 왔다는 것인데 물량은 대충 얼마나 있는 가?”
“이천오백 장 정도 있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페릴 형제는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어헤쳤다.
생각 외로 적은 양에 실망하던 바딘 백작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다른 건 없는가?”
“종이 말고 주방용 칼이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칼 세트를 꺼내 놓지만 소네스와 마찬가지로 별 반응이 없다.
종이처럼 뛰어난 것을 보다 보니 별로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소네스에 이어 바딘 백작까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영업맨으로서의 자존심이 구겨졌다 여긴 탓인지 재차 봐 달라 하려던 그때 대뜸 가격을 물었다.
“전부 다 해 얼마인가?”
“가격 말입니까?”
“그래, 어서 말해보게.”
잠시 생각에 잠기던 우현의 시선이 들렸다.
“금화 삼백 냥(대륙의 주화 체계는 아이언, 실버, 골드, 금괴로 되어 있으며 백 단위로 끊어진다. 즉, 1실버는 100아이언으로 한국으로 따지면 100원이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골드는 만 원이며, 금괴는 하나당 300골드로 알기 쉽게 삼백만 원짜리 자기앞수표라 생각하면 이해가 편할 것이다. 참고로 일반 가정의 한 달 생활비는 골드 세 닢으로 3만 원이다.)입니다.”
순간 페릴 형제의 고개가 돌아갔다.
특히 소네스는 기겁하다 못해 입만 뻥끗댄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큰 금액을 부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절로 살펴지는 눈치 속에 바딘 백작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이 들어온다.
“크흠! 이 정도의 물량으로 그리 많은 금액을 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상인의 기쁨이란 물건의 가치를 알아주는 자에게 파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그 말은 나에게 이 물건의 가치를 금화 삼백 냥으로 보는지 묻겠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백작님!”
순간 바딘 백작의 입가에 미소가 낀다.
과거 정계에 입문하기 전 상행을 다닐 때 이런 적이 많았다.
가진 건 기백과 배짱뿐이라 이렇듯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거래를 성사시키곤 했다.
그때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런 것일까? 이런 우현이 싫지 않고 오히려 더 좋았다. 거기다 이 종이만 계속해서 팔 수 있다면 금화 삼백 냥보다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터라 그리 큰 손해도 아니라 할 수 있었다.
그저 미소만 그리는 그와는 달리 우현의 등줄기는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그간의 영업을 통해 최대 금액을 부르고 줄여나가는 것이 다반사라 이렇듯 크게 부른 것이 옳다 믿었다. 한데 묵묵히 웃고만 있는 상대를 보고 있자니 왠지 너무 많이 부른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제길! 못 먹어도 고라 했다! 쭉 밀고 나간다.’
어차피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
더욱이 할 줄 아는 거라곤 전혀 없는 자신으로서는 더욱 그러했다.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많은 돈을 벌어둬야 앞으로 살아감에 있어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재차 마음을 굳힌 그는 바딘 백작을 보며 굳게 다문 입술을 벌렸다.
“솔직히 말해 여기 종이 다섯 묶음이면 적어도 금화 백오십 냥은 됩니다. 칼까지 포함하면 금화 이백 냥은 족히 넘습니다. 거기다 이 먼 곳까지 오느라 들인 운임까지 곁들인다면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딘 백작은 펨 총관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고개를 주억대더니 잠시 방을 나가 작은 함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그 함을 건네받은 그는 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금괴일세. 금화 삼백 냥은 족히 되지.”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져 간다.
허나, 바딘 백작은 금괴 위에 얹기만 하게 할 뿐 놓지는 않았다.
왜 그러냐며 바라보는 우현의 낯에 두려움이 깃든다. 왠지 영화나 소설에서 봤던 돈을 주는 척하다 상대를 죽이는 광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겨우겨우 진정시키며 조심히 말을 건넸다.
“왜…… 그러십니까?”
“사실 난 여기 물품들의 대금이 금화 삼백 냥이라 여기지 않는다네, 고작 해봐야 금화 열 냥이 최고겠지. 그럼에도 내가 굳이 이 금괴를 주는 이유를 아는가?”
“모르겠습니다만…….”
“나와 독점 계약을 맺었으면 하기 때문일세.”
“독점 계약이라면 어떤 것을…….”
“이후, 왕국 내 모든 종이 판매는 나를 통해서만 한다는 계약을 맺는다면 내 이 금괴를 주겠네.”
‘역시 상단을 운영한다고 하더니 거짓말은 아닌가 보군.’
상대의 원하는 것을 주되, 그보다 더 큰 이득을 얻으라.
이건 과거 김 팀장에게 들었던 말이다. 한데 이것을 실제로 겪을 줄이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았다. 어차피 다음에 또 팔 수 있을지도 모르는 데다가 일단 한몫 챙겨 이곳에서 생존할 궁리부터 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단, 3년간(여건상 계속 거래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계약 기간으로 반년이나 1년은 너무 짧은 듯해 대충 3년이라 함.)입니다. 그 이후엔 알카인 왕국 내 독점권을 철회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재계약은 안 되는 건가?”
“그건 상황에 따라 정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3년이라……. 좀 짧은 듯하지만 그리하세. 참! 그 전에 계약서를 써야겠군.”
A4 용지 두 장을 꺼내 한 장은 자신이 쓰고, 다른 한 장은 백작에게 건넸다.
우현은 종이를 받기 무섭게 소네스에게 주었다. 어차피 자신은 이곳 글씨를 모르니 대신 그더러 쓰라고 한 것이었다. 물론 자기가 서기냐며 소네스가 투덜대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서로 간에 계약서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간만에 좋은 계약을 했네.”
“저 또한 그렇습니다.”
건네받은 계약서를 소네스가 웃으며 갈무리하는데 돌연 바딘 백작이 조그만 가죽 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가는 길에 이것도 가져가세.”
“이것이 무엇입니까?”
“아까는 물건 값이고 이건 계약금이네.”
우현은 휘둥그레 눈을 뜨며 바딘 백작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약금도 주신단 말입니까?”
“금괴야 물건을 판 것에 대한 대금이고, 이건 지금 계약한 것에 대한 계약금일세. 물론 아까처럼 금괴를 주는 것은 아닐세. 그러기엔 아까 준 대금이 너무 많으니 말이야.”
뒤늦게 가죽 주머니의 의미를 안 우현은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닐세. 아무쪼록 이번 일을 계기로 자네와 길게 거래했으면 좋겠네.”
“저도 그러길 빌겠습니다.”
둘은 또 한 번 서로를 보며 웃었다.
이렇게 우현은 차원을 넘어 첫 거래에 성공하였다.
“우와아! 역시 백작은 백작이야! 금괴에다, 계약금까지. 죽인다 죽여!”
거처로 잡은 여관방에 들어오기 무섭게 소네스는 환호성을 친다.
그처럼 큰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 또한 기쁜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런 그들을 살피던 네시아가 고개를 갸웃대다 대뜸 물었다.
“작은아버지! 왜 그렇게 좋아해? 아버지와 아저씨는 왜 웃고?”
“그야 돈 벌었으니까 그렇지!”
“돈? 얼마나 벌었는데?”
“많이! 아주 많이 벌었다.”
“우와! 정말?”
“그래, 진짜다! 진짜!”
네시아를 들어 올려 목마를 태운 소네스는 연신 웃으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평상시 같으면 미친놈이라며 핀잔을 주겠지만 오늘만은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 듯싶어 레이젠도 그저 바라만 본다. 그들을 보며 웃던 우현은 슬며시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쥐었다. 손에 묵직한 맛이 느껴지는 것이 제법 많은 돈이 있는 듯했다.
“캐슬! 계약금으로 얼마 준 거야?”
네시아를 바닥에 내려놓은 소네스가 다가오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