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 merchant RAW novel - Chapter 94
차원상인 094화
어느덧 5월의 초여름 녹음이 깃든 도로 위를 달려 그들은 사당역 사거리 부근 한 골목 앞에 섰다. 허름하다 못해 칠이 벗겨진 벽이 온통 금으로 거미줄을 친 상태라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 삼층짜리 한 건물을 가리키며 임동수가 말을 하였다.
“이곳입니다.”
우현은 조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것이 주위 온통 술가게에, 노래방, 단란주점인지라 도저히 도장을 할 만한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거기에 도장이 있긴 합니까?”
“임대료가 싼 곳을 고르다 보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건물에 있는 도장에 누가 배우러 온다고…….”
우현은 이내 말을 멈추고 만다. 말해봤자 자신의 입만 아프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민망한지 임동수는 뒷머리만 긁적댄다. 그걸 보며 고개를 내젓던 우현은 그에게 앞장서라 하였다. 뒤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계단을 따라 막 삼층에 올라서려는데 난데없이 한바탕 호통이 인다.
“이놈아, 예순 넘은 애비를 언제까지 라면만 먹일 셈이냐? 이제 그만 좀 일어나서 계약 좀 따 오거라! 따와!”
“동수가 손님 데리러 갔으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럼, 다른 놈들처럼 손님 맞을 채비를 하던가? 뭔 놈의 운동을 새벽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하는 거야?”
뭔 일인가 싶어 서둘러 도장으로 가 슬쩍 안을 살피니 앙상한 뼈가 훤히 드러나 삐쩍 마른 몸에, 목이 늘어나다 못해 스카프처럼 축 늘어진 흰 런닝셔츠와 하와이언 반바지를 입은 한 노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바닥 위에서 줄넘기를 하는 녹색 추리닝 사내를 향해 움푹 들어간 두 눈을 부라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주위로 일련의 사람들이 정리 정돈을 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을 본 임동수는 ‘또냐?’라는 듯 표정을 지어간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고개를 숙이던 임동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팀장님과 작전장교님입니다. 손님입니다. 손님!”
한바탕 성을 내려던 노인, 고흥만은 손님이라는 말에 낯빛이 봄날에 개나리 보듯 활짝 핀다. 분위기까지 부드러워져 조금 전 악다구니를 쓰던 노인 맞나 하는 착각마저 든다.
“아이고! 의뢰를 하러 왔다고 하셨나?”
“아, 예…….”
“잘들 왔네. 그리 서 있지 말고 날 따라오게.”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당혹해하는 일행들을 이끌고 관장실로 향한다.
“범수, 형철아! 관장실 좀 치워라! 상용이, 넌 냉장고에 있는 음료수 좀 내오고! 뭐하느냐? 어서 뛰어가지 못해?”
“예에!”
서둘러 뛰어가는 두 사내들과는 달리 뭉그적거리는 고상용에 버럭 소릴 질러댄다. 이때만큼은 그도 어쩔 수 없는지 결국 줄넘기를 놓고 링에서 내려온다. 그런 그들을 보며 고흥만은 혀를 차댄다.
“하여튼 몸들이 꿈떠가지고는…… 쯧쯧쯧! 어디 밥이라도 해 먹겠어? 참, 난 상용이 아비 고흥만이네. 직책은 정보 및 작전 수립, 총무를 맡고 있네.”
“아, 그러십니까? 저는 의뢰하러 온 장우현이라고 합니다.”
그러냐며 주억대던 흥만은 슬쩍 우현의 뒤를 살핀다.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은 뭔가?”
“아, 이쪽은 제 의형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절 호위하는 사람입니다.”
“호위? 보디가드란 말인가?”
“그런 셈입니다.”
순간 눈살이 찌푸려진다. 보디가드도 있으면서 왜 왔냐는 눈치다.
심기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흥만은 슬쩍 뒤로 손을 뻗었다.
“대충 정리가 된 듯하니 안으로 들어가세.”
안내에 따라 관장실로 들어가려는데 발길을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전에 한판 했으면 하는데…….”
얼굴을 뒤덮었던 후드를 벗어 뒤로 넘기고 링 줄에 기대고 있는 녹색 추리닝의 사내, 고상용. 콧등을 찡그리던 티아가 나서려 하지만 그 전에 엘레토가 손을 들어 막아간다.
“뭘 원하는 거지?”
“동수에게 들었소. 격투라면 그 누구도 쉬이 이길 수 없다고 말이오.”
“내 주무기는 봉술이다.”
“맨손도 그에 못지않다 들었소.”
“어떻게든 싸우고 싶다는 것이군.”
“그렇소!”
씨익 웃어가는 고상용을 보던 엘레토는 링으로 다가선다. 우현이 불러보지만 괜찮다는 듯 고개만 숙여간다. 링에 올라간 그는 입고 있던 양복과 넥타이를 벗어서 한쪽에 두었다.
정리한 옷이 몹시 정갈한 것이 꽤 깔끔하다 여기겠지만 우현이 사준 양복과 넥타이가 너무 맘에 들어 혹시나 구김이 생길까 봐 정성을 들이는 것이다.
소매 단추까지 풀어젖히는데 고상용이 글러브를 건네온다.
“끼시오.”
“그쪽이 필요하면 껴.”
“정말 끼지 않을 것이오?”
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간다.
글러브를 보다 링 밖으로 던졌다.
자신 것도 함께 벗어서 말이다.
“그럼, 나도 필요 없소.”
엘레토는 고상용을 따라 링 중앙에 섰다.
둘을 지켜보던 우현이 슬쩍 티아에게 물었다.
“둘이 싸우면 어찌 될 것 같습니까?”
“솔직히 지금까지 본 사람들에 비해 마나량이 조금 많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엘레토를 상대하기엔 무리예요. 고작 해봤자 두세 수가 전부일 겁니다. 장난을 치지 않으시면 말이에요.”
흥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프랑스 외인부대 레종 에트랑제로에 있던 시절 배웠던 크라브마가(이스라엘 특공무술)가 이스라엘 교관도 인정할 정도로 극에 다다라 있다. 그런 그가 길어야 두세 수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대체 이놈들의 정체가 뭐야? 거기다 뭔 놈의 한국말은 이리도 잘해? 꼭 현지인 같잖아?’
한국말을 잘해서 더 기분 나빠진 흥만은 미간을 한껏 좁히고는 고개를 돌려갔다.
“하아!”
거친 기합소리와 함께 고상용의 앞차기가 날아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단전 밑, 아니 여차하면 낭심으로 파고들만한 위치다.
첫 공격부터 강수라니, 제법 놀랄 만도 하건만 엘레토는 그저 슬쩍 몸을 비튼다.
그것도 발과의 거리를 딱 한 치 정도만 둔 채로 말이다.
뒤이어 앞차기, 옆차기가 날아들지만 여전히 높이는 처음 찬 딱 그 높이다.
더 높이 찰 수 있음에도 그러는 것은 빈틈이 적고, 거리를 넓힐 수 있으며, 뒤이어 연계공격에 매우 용이하기 때문이다. 재차 날아드는 앞차기를 피해 엘레토가 막 뒤로 몸을 물리려는 찰라 뻗어진 발의 궤도 깎이듯 사선이 내려 꽂혀간다.
‘한마디로 앞전에 한 공격은 밑밥이라는 것이군. 제법이야.’
무표정한 얼굴로 흘낏 고상용을 보던 그는 허벅지를 노려오는 발길을 쫓아 시선을 내렸다.
퍼억!
살이 터지는 듯한 마찰음과 함께 고상용이 뒤로 물려진다.
조금은 어안이 벙벙한 낯빛을 한 채 연신 엘레토를 찾아갔다.
“왜 다쳤을까 봐 걱정이 되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그에 고상용의 눈빛이 싸늘히 식어 내린다.
조금 전 로우킥은 일반 킥복싱에서 쓰는 것이 아닌 전통 무에타이 수법이기 때문이었다.
본래 무에타이는 고대 태국의 무술로 당시 최강의 무기인 코끼리의 약점인 발을 적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탓에 무에타이의 발차기는 상대를 제압하기보다 쓰러트려 못 오게 하거나, 멀찍이 거리를 벌리는 쪽으로 선회해 발달이 되었다.
특히 로우킥의 경우, 킥복싱이나 여타 이종격투기에서 쓰는 발등 또는 발가락 밑부분으로 찍어 차는 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인체 중 제일 약하다는 정강이를 강화시켜 상대 허벅지를 강타함과 동시에 발등을 허벅지 뒷부분에 밀착시키는 방식인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 당해보면 허벅지 근육이 한순간에 찢겨져 나가 그대로 주저앉게 된다. 마치 채찍에 휘감긴 듯한 착각과 함께 말이다.
이것은 여타 이종격투기에서 보던 근육이 파열되어 무너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로우킥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선 고통이나 통증을 느끼는 기색 하나 없다.
오히려 조금 전 뭔 일 있었냐는 듯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다. 사람 복창 터지게 말이다.
하나, 그것도 알고 보면 나름 다 이유가 있다. 도베르만 왕실 기사단 시절 엘레토는 족히 30kg이 넘는 갑옷을 늘 입고 수련을 했다. 당연히 상체는 물론이고 하체 쪽까지 근력이 비약적으로 늘 수밖에 없다.
거기다 상체의 경우 방패같이 보호하기 위한 것이 많은 반면 하체 쪽은 방어할 것들이 부실했던 탓에 적으로부터 일순위 공격 타깃이 되었고 이를 이겨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그 결과 굳이 마나를 쓰지 않더라도 고상용의 로우킥쯤은 맞아도 아무렇지도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놀란 듯한 표정에 엘레토가 물어갔다.
“이것이 단가?”
비아냥이 섞인 조롱에 한순간 정신을 차린 고상용은 다시 한 번 로우킥을 찼다.
상황은 조금 전과 별다를 바 없지만 이번엔 발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낮춰 태클을 걸어갔다.
하나, 둘 사이의 거리가 좀 멀었던 것일까?
엘레토는 고상용의 뒷덜미를 잡아 눌러 바닥에 처박아버렸다.
너무도 볼썽사나워 보는 이가 다 민망할 정도이다.
하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벌떡 일어서서는 손날로 상대의 쇄골을 내리쳤다.
하나, 채 닿기도 전에 엘레토가 손목을 쳐냈고 고상용은 빈 공간을 내리꽂혀가는 손날을 회수하면서 반대편 주먹을 상대의 목젖을 향해 찔러 넣었다. 하나, 채 찔러 넣기도 전에 엘레토의 주먹이 날아와 어깨를 후려쳐갔다.
“크윽!”
신음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서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발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언제 다가왔는지 손바닥으로 무릎을 쳐 내린 엘레토는 반대 손을 들어 코앞에 들이밀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상대와는 달리 여유로운 기색의 그는 물끄러미 고상용을 보았다.
“계속할 텐가?”
고상용은 얼굴의 사정없이 구겨진다.
‘일전에 삼합회 사람과 붙었던 때와 비슷하군.’
4년 전, 삼합회 소속의 권법 고수라는 자와 붙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제대로 뭘 해보지도 못한 채 속절없이 당했었다.
그럴 것이 주먹으로 치려고 하면 축이 되는 어깨를 때려버려 못 내밀게 하고, 발로 차려면 하면 무릎 쪽을 강타 당했기 때문이었다. 양손, 양발을 이용해 짧은 단타를 연속으로 이어가는 크라브마가의 특성상 이렇듯 도중에 차단당하면 그 위력이 반감함과 동시에 커다란 허점을 드러내게 된다. 쉬이 답을 하지 못한 그와는 달리 상대는 이미 들었다는 듯 주먹을 풀고 밖으로 나섰다.
또다시 당했다 생각 때문일까?
가슴에서 뿜어지는 노기를 그대로 드러내간다.
“아직 안 끝났다!”
양복과 넥타이를 들고 막 우현에게 다가서려던 엘레토의 발길이 멈춘다.
슬쩍 뒤를 보던 그는 한 손을 들어 샌드백을 살짝 쳐갔다.
퍼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샌드백이 터지며 모래들이 허공으로 비상한다.
비 오듯 떨어져 내리는 모래 사이로 입을 쩍 벌린 주위 사람들이 보인다.
눈만 끔벅대던 우현은 슬며시 고개를 뒤로 돌려간다.
시선을 마주친 티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마나를 쓰면 저 정도쯤은 별거 아니죠. 괜히 일인군단이라고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