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1
1화
武林劍道館
개방(丐幇)에 검도관을 알리는 현판이 걸렸다.
묵묵히 현판을 올려다보는 사내의 눈이 예사롭지 않다. 바로 뒤에 반보 간격을 두고 성큼 다가서는 2인의 검객 눈에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김 관장, 그간 고생 많으셨소.”
“별말씀을요. 다, 두 분 사범님 덕분입니다.”
2인의 사범에게 공을 돌리는 사내는 다름 아닌, 무림검도관의 초대 관장 김용하다.
김용하는 고개를 반쯤 돌려 2인의 검객을 바라보았다.
인공과 장설.
인공은 포천 주금산 인공사 주지이고, 장설은 무림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만난 노화자다. 그러니까 인공은 초대 관장인 김용하와 함께 사패산터널 속에서 정체 모를 광채에 휘감겨, 이곳 무림으로 차원 이동한 인물이라는 말이다.
2인의 사범에게 향했던 시선을 다시 현판 쪽으로 옮기는 김 관장의 눈에 감회가 새롭다.
‘이룰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현판이 걸리다니.’
* * *
우여곡절 끝에 개방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길을 안내했던 남채화가 강요하듯 수차례나 한 말이다.
“명심하셔야 합니다. 이곳 개방은 아홉 개의 정파와 어깨를 나란히 한 지 오래입니다. 지금은 서역에서 들여온 앞선 정보력 덕에 기존 정파보다 오히려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무림의 어느 누구도 이 말에 토를 달거나 하지 않습니다.”
“알겠소.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집어치우고, 어서 개방의 방주를 만나게 해 주시오.”
개방까지 오는 길도 순조롭지 않았지만, 이곳에 오면 모든 게 일사천리로 해결될 줄 알았던 생각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남채화가 하는 꼴로 보아 개방의 새 주인이 된 방주라는 자를 만난다는 건 더 험난할 것으로 예고됐다.
과연 만날 수 있을까. 새로 추대되었다는 개방의 방주. 그를 만난다는 게 더는 낙관적일 수만은 없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차 무너져 내리는 기대감. 용하의 기대감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 비로소 운명처럼 새 용두방주를 만날 수 있었다.
운명과도 같은 만남에서, 얼핏 중성적으로 느껴지는 음색 뒤에 숨겨진 흐느낌으로, 용두방주가 던진 첫 말은 자기를 찾아온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그것도 베일에 가려진 채 말이다.
‘뭐야? 수렴청정도 아니고…….’
거침없이 치고 들어오는 그의 질문이 적잖이 거슬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말문을 닫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할 말은 해야 했다.
적이 빈정은 상했지만, 대답 못 할 이유는 없었기에 더욱 당당하게 답했다.
“방주! 저는 이곳과는 다른 세상에서 왔습니다.”
“무어라!”
방주의 목소리는 얼핏 노기에 차 있었으며 다소 놀라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방주의 이러한 반응은 실은 위장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흥분을 가라앉히고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굽힐 이유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
“돌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단순과 무식이 무기가 돼 줄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간이 떨려 용두방주를 독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애초에 결심했던 바가 있었다. 절대 배려니 양보니 하는 말들은 생각하지 말자.
내 뜻대로 그냥 불도저처럼 밀어붙일 것이다. 몇 번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고집스럽게 버티자, 용두방주는 난감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안타깝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것 같소.”
“아니, 상관있습니다. 제가 구하고자 하는 답을 가진 자는 이 무림에서 오직 한 사람…….”
아직 말을 채 끝내기도 전이었다. 용두방주는 무엇이 그리도 급했던지, 내가 하려던 말을 가로채며 물었다.
“오직 한 사람이라… 그가 과연 누구일까요?”
베일에 가려진 방주의 두 눈이, 지금 용하를 향해 있을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용하는 눈을 들어 베일에 가려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방주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용두방주,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내가?”
“네, 그렇습니다. 부디 제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아니오! 그런 일이라면 그만하시오. 더 이상 들을 이유가 없을 것 같소.”
“방주!”
이때까지만 해도 용하와 인공은 같은 생각이었다. 무슨 수를 쓰든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어차피 돌아간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그 지옥 같은 곳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은 했지만, 앞으로 남은 일을 생각하면 진저리가 쳐졌다. 그 지긋지긋한 세상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풍부한 자원을 간직한 이곳 무림에, 최첨단 검도 체육관을 하나 열고 싶어졌다.
그래서 지금은 담판 지을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용기를 냈다.
“정 그러시다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방주는 썩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심사를 떠보듯 입을 뗐다.
“부탁이라?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한번 들어 보겠소. 허나!”
“방주께서 믿든 안 믿든 저는 특별한 재주가 있습니다.”
남들이 뭐라든 상관없었다. 무조건 특별하다는 것을 강조해야 했다. 결코 과장되거나 기만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말은 아니었다.
살상이 난무하는 무림에서 문파를 뛰어넘어 타인에게 검도를 가르칠 수 있다는 건, 분명 특별한 재주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용하의 말에 방주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그렇다고 의구심을 아예 떨쳐 버린 건 아니었다.
“특별한 재주라, 그것이 대체 무엇이오?”
“방주께서 어찌 들으실지 모르겠으나, 저에게는 검술을 가르칠 줄 아는 남다른 재주가 있습니다.”
그저 평범한 말이었지만 용두방주에게는 가볍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는 다름 아닌 이곳이 무림이기 때문이다.
무림의 협객은 자신의 무공이나 절기를 쉬이 노출하지 않는다. 그런데!
용두방주의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런데 작은 궁금증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구심을 베이스로 스멀거리는 엉뚱한 궁금증.
“검술을 가르친다?”
“네, 그렇습니다.”
“그것도 생면부지인 타인에게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대답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갈수록 태산이구먼.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 생각하시오?”
이번에도 여전히 노기에 찬 목소리였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조금 전과는 달리 알 수 없는 깊이가 느껴졌다. 무림에서 말하는 검(劍) 그리고 검술(劍術).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면 용두방주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다.
“허락해 주십시오.”
“무엇을 말이오?”
“검도 체육관을 열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런 건 차려서 무엇에 쓰겠다는 게요?”
“돈을 좀 벌어 볼까 합니다.”
“무어라, 검도 체육관을 차려서 돈을 벌겠다?”
“네, 그렇습니다.”
“몇 문(구리동전)이나 벌 것이라 생각하시오?”
“몇 문?”
때가 아님을 알면서도 한쪽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본능적으로 날을 세웠다.
“음, 표정을 보아하니 내 말에 심사가 뒤틀린 모양이군. 무엇이 그대를 그토록 예민하게 했는지 말해 보시오.”
“문이라니요? 검도를 우습게 보시는 겁니까? 아님, 내가 우스운 건가요?”
따지듯 들이대는 꼴이 같잖아 보였던지, 뚫어져라 바라보는 용두방주는 대단히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누구를 우습게 생각하지는 않소. 나 역시 동냥아치 거지로 시작해 지금 이 자리까지 온 사람이니 격을 따지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시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용주방주의 생각은 얼핏 용하가의도한 대로 움직였다. 이럴 때일수록 더 자신감 있게 그를 대해야 했다.
목소리에 조금의 떨림이 있어서도, 심장 한구석에 약간의 울림이 있어서도, 작은 몸짓 하나도 상대가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되었다. 이를테면 옅은 경련을 일으킨다거나 불필요한 행동을 한다거나 하는.
“방주께서는 제가 그깟 구리동전 몇 푼 벌자고 목숨을 담보로 무림 제일 개방의 대장과 지금 담판을 짓는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조심하려 해도 경직된 몸에서 좋은 목소리가 나올 리 없었다. 용두방주는 무표정하게 바라보았고, 그것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저렇게 사람을 빤히 바라보면 어쩌라는 거야. 혹 개기는 거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에라 모르겠다. 죽이 되든 밥이 되는 한번 질러나 보자.
“문이 아니라 은자로 받을 생각입니다.”
“무어라, 은자!”
용두방주의 눈동자에 선홍색 핏발이 섰다. 그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노기 가득한 목소리로 심장을 짓눌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오!”
해 보지도 않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다니.
“아니!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곳 무림에는 아홉 개의 정파에 전해 내려오는 자기들만의 비급과 개방의 타구봉법만이 존재할 뿐이오. 다시 말해 아홉 정파의 사람들과 개방의 일원만이…….”
흠,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그래야 각자 자기 위치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이런 광경은 수도 없이 봐 왔다. 지금 이 모습은 21세기 현대 문명이 절정을 이루었을 때와 별다를 바가 없다.
이런 순간 해결책이 무엇인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버릴 건 과감히 버리고 취할 건 반드시 취한다.
“방주 대인!”
서둘러 용두방주의 말문을 막았다. 더 들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대로 물러설 방주가 아니었다. 그 역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단호했다.
“그만하시오! 있을 수 없는 일로 시간 낭비 하고 싶지 않으니, 그만 돌아가시오.”
“방주 대인! 저는 부모형제의 곁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이곳까지 왔습니다. 남채화가 아니고선 이곳 개방까지 온다는 게 쉽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방주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저에게 이대로 돌아가라니, 그건 지나친 처사입니다.”
“무어라! 지나친 처사?”
용두방주의 두 눈은 당장에라도 쏟아질 듯 부리부리했고, 그의 눈동자에 투영되는 나는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였다. 핏빛으로 물든 무림. 강자만이 살아남는 이곳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개방의 우두머리 용두방주의 표정에 드리워진 강한 의구심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 놨으니, 퇴로를 생각해서라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 주어야 한다.
그릇된 생각이 아니었기에 곧, 어금니를 질끈 깨물고 결연히 입을 뗐다.
“네, 지나친 처사입니다. 무조건 안 된다고 고집부리지 말고, 제게 증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설령 실패하더라도 개방이 손해 볼 일은 없지 않습니까.”
입을 굳게 다문 용두방주는 그제야 구미가 당기는지 마른침을 삼키며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만약 용하의 말대로 검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자가 정말 무림에 존재한다면 개방의 모든 남채화를 협객으로 만들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렇게만 된다면 무림의 아홉 정파는 개방의 발아래 놓이게 된다.
* * *
“정말 여기 눌러앉을 작정인 게냐?”
무거운 인공의 목소리가 심장을 짓눌렀다. 어쩔 수 없이 대답을 미룬 채 뒤돌아서서 운기조식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쉽게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아직 뜻이 확고하지는 않은 모양이군.”
확고하지 않다는 인공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말을 아낀 채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렇게 인공에게 거리를 두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용두방주와의 거래 때문이었다. 방주는 소희 낭자와의 정약결혼을 제시했다. 영특한 사람.
그의 제안은 탁월하고도 현명한 처사였다.
옛말에 죽 쒀서 개 준다는 말이 있다. 즉 평생을 공들인 개방을 통째로 이방인에게 넘기는 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렇게 용두방주와의 단판이 일단락 지어지는 듯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인공은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만에 하나 이곳 무림에 검도관이 생긴다면 아마도 한차례 피바람이 불 것이다.”
“피바람이라니, 그게 다 무슨 말씀입니까?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 아닌가요?”
“뭣이라, 환영?”
인공은 한 차례 비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개방은 그렇다 치고, 아홉 개의 정파는 어찌할 생각이냐?”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안 그래도 자기들과 대등해진 개방이 눈엣가시일 텐데, 그런 개방에 검도관이 생기고, 구걸이나 하던 남채화들이 검술을 익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이 가만히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인공은 몸서리부터 쳤다.
“그 문제를 고민 안 해 본 건 아닙니다.”
“그런데?”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유가 있어서 한 말에 인공은 서운한 기색을 내비추었다. 아마도 나중에, 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서운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운해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뒤로 미룬 이유는 고민의 대상이 되는 인물 때문이었다.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해서.
용하는 인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투영된 보잘것없는 작은 생명체가 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무림으로 오기 전 21세기를 살아온 한 인간의 30년 남짓한 세월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때 왜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