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10
10화
흙바람 휘날리는 드넓은 광야를 작은 생명체 하나가 지친 몸을 이끌고 걷고 있었다.
바람을 거슬러 서쪽 방향으로 걷느라 몸이 수없이 휘청거렸다.
생명의 정체는 다름 아닌, 21세기에서 차원 이동한 소드마스터 김용하였다.
얼마나 먼 길을 걸었기에 저 지경이 됐을까. 만신창이가 돼 버린 용하는 지금, 척박한 자연환경과 싸우며 정신력 하나로 버티며 각인했다.
온몸이 찢기고 문드러져도 설산을 찾아 흑룡의 입에서 여의주를 빼앗아 보현과의 거래를 성공시키고 말겠노라고.
흐려진 시야는 몇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어렵게 했다.
“설산아, 기다려라! 반드시 찾아가 흑룡의 입을 찢어 여의주를 빼앗아 올 것이다.”
처절한 울림이었다. 오로지 인공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걸음을 내디디고 있는 중이다.
다섯 개의 감각 가운데 하나인 시각에만 의지한 채, 출발할 때 뇌 속에 각인했던 서쪽 방향, 정확히는 서남 방향으로 눈 덮인 산이 보일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벌써 며칠째인가. 설산으로 이어진 광야를 해가 지는 방향만 바라보며 걷고 있다.
매일 똑같은 광경. 너른 평야와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처음엔 그 모든 게 신비로웠다. 지평선은 글자로만 보았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어! 말로만 듣던 지평선이네.’
난생처음 보는 지평선. 뭐든지 처음이라는 말은 육체에 생동감을 준다.
지평선을 처음 보았을 때, 아주 잠깐이었지만 맛보았던 청량감이 아직도 세포 구석구석에 남아 꿈틀거리는 듯하다.
21세기 작은 반도국 대한민국에는 지평선이 없다. 아니, 없어졌다. 신도시 개발 때문이다.
뜨겁게 달궈진 지평선. 그 위로 스멀거리는 아지랑이가 세상을 집어삼켰다. 아지랑이 탓에 모든 것들이 몽환적으로 보인다.
대륙의 한복판에서 볼 수 있는 건,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런 광경이 전부였다. 현실과 환상이 맞닿은 경계. 그 몽환적 세상.
아지랑이 때문인지, 동공이 초점을 잃어서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정상은 아닌 게 분명했다.
서서히 불안감이 엄습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었고, 그 때문인지 그나마 하나뿐인 지인, 인공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스님…….”
흩어졌던 정신을 가다듬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용하의 몸을 지배하는 건 오직, 해가 지는 방향. 그것뿐이었다.
인공을 다시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그 길을 타박거리고 있을 때였다. 지평선 가까운 곳에 엄지손가락만 한 생명체 하나가 어른거렸다.
용하의 시선을 사로잡은 의문의 생명체는 꿈틀거린다 싶으면 일렁거리고, 일렁거린다 싶으면 다시 꿈틀거리고, 그러기를 수차례나 반복했다.
“쳇, 하다 하다 이젠 헛것이 다 보이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간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차례나 눈을 껌벅거려 생명체의 움직임을 확인해 보려 했지만, 그것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흙바람이 시야를 덮어 버리기 때문이다.
답답해진 용하는 생명체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면 보이겠지.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허파를 짓누르는 듯한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더는 달릴 수 없었다. 이렇게 더 달렸다간 허파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헉, 헉!
입에서 숨쉬기조차 역겨운 단내가 났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급기야 의문의 생명체가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 사람이네?”
긴가민가했던 의문의 생명체는 분명 사람이었다. 눈에 비친 그가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은 필시 우주 생명체일 것이다. 등이 굽고 배가 볼록한 작은 우주 생명체.
생명체라는 사실만으로도 반가웠는데, 사람이라니. 용하는 다시 일어나 어금니를 깨물고 한달음에 달려 거리를 좁혔다.
우주 생명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장설이었다.
“어! 장설 어른이 아니십니까?”
장설임을 확인한 용하는 반가움이 앞섰다.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이런 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뉘신데 저를 알아보는 게요?”
패닉 상태인가? 아니었다. 장설은 지금 일부러 모른 체하는 게 분명했다.
“장설 어른, 벌써 잊으신 겁니까? 저예요, 저. 김용하! 일전에 아미산까지 길 안내를 해 주셨잖아요?”
장설은 기억을 더듬는 기색이었다. 이 또한 일부러 그런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이윽고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 가운데 어떤 것을 찾아냈는지, 앞니가 훤히 드러날 만큼 크게 입을 벌려 웃었다.
“기억나셨군요!”
이게 뭐라고, 고작 늙고 야윈 노화자 하나 만났을 뿐인데, 세상 모든 걸 다 얻은 것 같았다. 용하는 터져 나오는 기쁨의 웃음을 숨길 수 없었고, 장설은 얼떨결에 용하를 따라 크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 오늘은 어디로 가는 길이오?”
“원이라는 곳에 있는 옥룡산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옥룡산! 그곳엔 왜 가는 것이오?”
“그 설산에 흑룡이 산다고 들었습니다.”
“뭐라, 흑룡!”
웬일인지 장설은 경악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곧, 놀람을 가라앉히고 씁쓸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런 장설을 보는 용하는 어찌해야 좋을지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장설이 입을 뗐다.
“옥룡산에 흑룡이 산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 좀 더 들어 볼 수 있겠소.”
그 순간 용하는 장설이 자기 얘기에 관심을 보인다고 믿었다. 긍정적인 반응은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들고는 했다.
그래서였을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아미파 장문인 보현 태사와 거래를 했습니다.”
“뭐라, 보현과 거래를?”
이번에도 장설은 경악해서 물었다.
“네, 보현과 거래를 했습니다. 그런데 장설 어른께서 왜 그렇게 놀라시는 겁니까?”
“이 노화자가 놀라든 말든 그건 상관하지 말고, 거래 내역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이나 말해 보시오.”
“아홉 개 정파에 각각 아홉 개의 여의주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여덟 개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는 다름 아닌 설산의 흑룡이 물고 있는데, 그것을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흑룡의 입에서 여의주를 빼앗아 가져다주면, 보현은 무엇으로 보답한다고 하였소?”
“그것을 찾아다 주면 인공 스님이 주화입마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장설은 간헐적으로 한쪽 입꼬리를 씰룩거렸을 뿐, 처연했다.
“인공이라는 자가 주화입마에 들었소?”
“네, 어르신.”
“무공고수가 주화입마에 들었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보현이 한 사람의 죽음을 목도하며 장난을 친 게로군.”
들릴 듯 말 듯 입엣말로 중얼거리는 장설의 표정에 근심이 얼룩졌다.
“어르신, 갑자기 왜 그러세요? 조짐이 안 좋습니까?”
“주화입마는,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죽음을 뜻하는 말이오.”
“죽음이라니요? 그럼 인공 스님이 지금 돌아가셨다는 겁니까?”
“인공이란 자의 수양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으나, 현재로선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 같소.”
장설의 말에 불현듯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울먹이는 용하를 바라보는 장설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보현이 수작을 부리기로 작정했다면 이곳 중원에서 안 넘어갈 사람이 누가 있겠소.”
그 순간 용하는 장설에게 무슨 말인가 해야 했지만, 목이 잠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보현에게 농락을 당하다니…….”
장설이 혀를 끌끌거리며 한 말이 용하의 귀에는 왠지 비난의 소리로 들렸다.
그래서였을까, 용하는 마른침을 삼키며 반박했다.
“농락이라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인공 스님을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겁니다.”
“公은 스스로 어리석음을 자처하는 것이오? 설산에 흑룡이 살 리가 없지 않소. 용이란 원래 상상 속의 동물인데, 어찌 그것이 현존한다고 믿고 이 먼 길을 나섰단 말이오.”
장설의 말에 용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왜 그 생각을 진작 못 했을까.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이렇게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문득 떠올랐다.
“아, 이런 게 바로 가스라이팅이구나. 21세기 뉴스에서 OOO사건이라고, 보험금 노리고 남편 계곡에 빠져 죽게 한.”
황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가스라이팅에 대한 자료가 있는지 파일을 뒤져 보았다.
+가스라이팅]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스스로를 의심하게 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
“장설 어른!”
용하의 목소리에 반성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장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건 변명이 아니라, 제가 딱히 보현 태사에게 당한 건 아닌 듯합니다.”
“그렇게 고생 하고도 아직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이오.”
“그게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현 태사의 말에 제가 휘둘린 게 없어서 말입니다.”
장설은 매서운 눈으로 용하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건 또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알량한 변명이라 치부해 버리기엔 아직 풀어야 할 의문이 많았다.
“휘둘린 게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설산엘 가려 했으며 존재하지도 않는 흑룡의 여의주를 찾겠다 하였소.”
“그건 인공 스님을…….”
“公의 어리석음이 오히려 인공이란 자를 죽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진정 모르겠소?”
작은 체구에서 울려 퍼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용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사실 단 한 번도 스스로 의심해본 적이 없어서, 이런 걸 가스라이팅 당했다고 생각해 본 적 또한 없었다.
“예서 이럴 게 아니라, 서둘러 아미산으로 가야 할 것 같소.”
“설산은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이오? 걸려도 아주 단단히 걸려들었구먼. 엉뚱한 생각 말고 서두르시오.”
용하는 장설의 손이 잡아당기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림에서조차 되는 일이 없다니. 이곳에서도 후기 인생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 * *
조금 전 걸었던 바로 그 길과 들판이다. 마치 기억을 거슬러 오르는 것 같았다.
혹시 달라진 게 있다면, 홀로 걸었던 이 길을 지금은 둘이 걷고 있다는 것이다. 장설과 용하.
“장설 어른!”
“말을 아끼시오.”
“벌써 몇 시간 째 우리 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이렇게 삭막하게 걸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말을 아끼란 말은 체력을 아끼라는 말이오.”
“체력?”
“그렇소. 얼마나 걸어야 할지 모르니, 체력을 아껴야 아미산까지 갈 수 있을 것 아니오.”
장설의 말이 금방 가슴에 와닿았다. 대리 뛸 때가 문득 떠올라서였다. 대리기사란 모름지기 운전 못지않게 배터리 관리를 잘해야 한다.
“체력 관리! 중요하죠.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꾹 참아 보도록 할게요.”
장설은 한 차례 눈길을 주었을 뿐 고개만 끄덕였다. 체력 관리였다.
조금 전 입에 단내가 나도록 긴 언덕을 넘었다.
같은 모양의 언덕을 몇 개 더 넘고 나서야 다시 평지를 만날 수 있었다.
체력이 갑작스럽게 떨어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마치 모바일 RPG에서 상대에게 무차별 공격을 받아 파워가 눈에 띄게 떨어지듯.
구부정한 작은 체구. 장설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용하의 관심은 장설에게 쏠렸다.
대체 저 어른은 몸에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에너자이저라도 심었나? 갑자기 증폭하는 궁금증.
한번 물어볼까. 아냐, 괜히 또 잔소리만 들을 거야. 바로 그때였다.
“무슨 생각이 그리도 많은 게요?”
장설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야, 지금 말한 거야?
“생각이 많으면 인생이 고달픈 것이오. 그러니 상대에게 교묘하게 조작이나 당하고, 스스로 의심이나 하고. 결국 자신감은 물론, 판단력마저 잃고 이렇게 헤매는 게야.”
그 순간 용하의 뇌리에 번쩍 스치는 말이 있었다.
가스라이팅!
“그만하시지요. 체력 관리. 그거 하셔야 하잖아요.”
“체력이 남아돌 것 같아 하는 말이오.”
“체력이 남아돌다니요?”
“그렇소. 이제 거의 다 왔소이다.”
머릿속에 온갖 잡념이 난무하는 통에 눈앞에 보이는 아미산을 그냥 지나칠 뻔했다.
“이런! 장설 어른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칠 뻔했습니다.”
용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 나왔다.
“이제 어찌할 생각이시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강직한 장설의 말은 심장에 비수를 꽂는 듯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보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일에 쫓기기만 했지, 무엇 하나 신중하게 생각하고 움직인 적이 없었다.
지금 장설은 앞으로 어떤 작전을 펼칠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좀 굼떠 보이더라도 신중하게 생각하고 합당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아님.
“인공 스님과 준비해 온 계획이 있어서 함부로 발설할 수가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시간을 좀 벌던가.
“나는 급할 게 없는 사람이외다. 무엇이든 괜찮으니 행동 개시 전에 언급만 해 주시오. 모르는 일이잖소?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있을지.”
장설은 오랜 여정으로 체력이 고갈됐던지, 자리에 벌렁 눕자마자 두어 차례 코를 골아 대고는 곧 잠들어 버렸다.
장설이 잠든 것을 확인한 용하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밤을 꼬박 새워서라도, 이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반드시 알아내고 말 테다.”
원래 밤이 이렇게 짧았던가. 아직 장설의 물음에 대답이 될 만한 작전이 머릿속에 그려지지도 않았는데, 동이 트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니 스마트폰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한번 빠져들면 헤어날 수 없는, 가짜여도 진짜라고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가스라이팅 같은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