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137
137화
개방(丐幇).
무조건 그곳으로 가야 한다. 그것만이 살길이다.
용하의 두 눈은 용암처럼 들끓었다.
그 광경을 예의주시해 온 장설은 생각했다.
‘무서운 녀석이다.’
결의에 찬 용하를 보는 장설은 간담이 서늘해, 더는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검이 곧 법인 이곳 강호 무림에서 누군가에게 검을 가르친다는 건 곧 살상을 가르친다는 것인데, 그 사실을 알고 저러는 건지 모르고 저러는 건지, 원.’
속내를 숨기려 무던히도 애썼지만, 결국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명심하여라! 조식 전까지 잠깐 눈을 좀 붙일 것이니, 쥐 죽은 듯 조용히들 있거라.”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일정한 톤의 목소리였다.
“네, 알겠습니다.”
반면 용하와 인공은 나름 예를 갖춘답시고 각지게 대답했다.
결의를 보여주려고 한 행동에 장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 순간 용하와 인공이 장설의 표정을 봤더라면, 아마도 기겁하고 나자빠졌을 것이다.
“어리석은 것들 같으니.”
장설은 입엣말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형님! 장설 형님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게, 고 며칠 새 속이 눈에 띄게 좁아지셨네! 아주 밴댕이 속이야, 밴댕이!”
조금은 경망스러운 인공의 말에, 용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의식이나 심경에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의식이나 심경에?”
“네,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감정이 저렇게 무뎌질 수 있었겠습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장설 형님은 그냥,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일 뿐이야.”
“그냥 노인은 아니죠. 장설 형님은 세상을 달관한 초인이시죠. 사물을 대하는 눈이 남다르시잖아요. 누구처럼 경망스럽지 않고 말입니다.”
말끝에 얼핏 장난기가 묻어났다.
“아니, 이 녀석이!”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용하가 빈정거린 걸 인공 본인이 먼저 알아차리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용하의 장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녀석이라뇨,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누구처럼 촐싹거리지 않고, 라고 하려다가 고상한 말로 경망스럽다고 한 건 줄이나 아세요.”
인공은 약이 바짝 올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하지만 용하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은 21세기가 아닌, 14세기 강호 무림이니까.
“형님, 곧 개방으로 가게 될 텐데, 저를 이렇게 대한 거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어이구, 답답해. 남의 속도 모르고……. 만약 그걸 모른다면 내가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것 같으냐?”
“당하고만 있지 않으면요?”
“요절을 내도 열 번은 냈을 것이다. 인석아!”
“인석아? 음, 그것도 차곡차곡 기억해 두죠, 흠.”
“아니, 용하야. 아니, 김용하 씨. 다 알겠는데 공과 사는 분명히 하셔야지. 지금은 사적인 자리 아닌가, 음. 그러니…….”
“흠, 그 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으세요? 형님 말씀대로라면 창의부흥원과 그 예하부서인 호위대는 한시도 쉬지 않고 연중무휴 빡세게 돌려야겠네요.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인공은 뜨거운 입김만 토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지금 입을 연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명을 재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공은 마른침을 꿀떡꿀떡 삼켜가며 울화를 눌렀다.
“개방으로 갑시다!”
용하의 말에 인공은 몸서리를 쳤다.
“아, 안돼! 이, 이번에 다, 다른 데로 갈 거야.”
“다른 데, 어디요?”
용하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을 때였다. 인공은 말문이 막힌 채 그저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용하의 눈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며 매서운 눈매로 바뀌었다.
“아이참, 왜 자꾸 그래~ 에이, 용하… 씨! 우리 지금 시간 여행 온 거 아냐? 원래 여행이란 게 두루두루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히자는 게 목적 아냐. 내가 뭐 다른 뜻이 있어서 그랬겠어? 힘들게 온 여행인데 지난번에 못 가본 데, 음! 그런 데로 좀 두루두루 견문을 넓히면 안 될까?”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는 발언이었다.
“음, 역시 능변가세요. 형님은 차라리 21세기에 남아서 총무님하고 장학재단이나 운영하는 게 체질에 맞았을 것 같네요.”
용하의 말에 웬일인지 인공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보게, 용하!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제가 뭘요?”
“내가 어디로 봐서 장학재단이나 꾸려갈 사람으로 보이는가?”
“제 눈에는 그게 딱! 인데요.”
“뭐, 뭐야? 자, 자네 지금! 21세기에서 보였던 나의 활약상을 모두 잊은 것이야?”
“형님도 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걸 잊었다면 배은망덕이죠.”
“그, 그걸 아는 놈이 말을 그따위로 했단 말이야?”
인공은 분을 못 이겨 거의 실성 직전이었다.
“형님, 진정하십시오. 형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우리는 개방으로 가야 합니다.”
“왜 그렇게 개방을 고집부리는 거야?”
“형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내, 내가?”
용하의 말에 인공의 낯빛이 얼핏 우쭐한 기색이었다. 조금 전 얼굴을 붉게 물들였던 울분은 온데간데없고 형형해진 눈으로 용하를 바라보았다.
“네, 형님이 지난번 여행에서 제게 일깨워준 말 있잖아요.”
인공은 분을 삭이며 지난 기억을 더듬는 기색이었다.
‘대체 이 녀석에게 뭐라고 했기에, 녀석이 저렇게 확신에 차서 대드는 걸까?’
그렇게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인공이 마침내 무릎을 탁! 쳤다.
“아~ 아!”
“이제 기억났어요?”
“킥킥, 이 인공이란 사람의 안목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니까.”
대체 무엇을 떠올렸는지, 인공은 자아도취의 늪에서 헤어날 줄을 몰랐다.
“그때 이 몸이 남채화에게 미남계를 쓴 덕분에 개방으로 갈 수 있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탁월한 선택이었어.”
인공의 생색에 용하는 후덥지근하게 한숨을 토했다.
“뭐, 뭐라고요? 누구에게 무슨 계를 썼다고요?”
인공의 헛소리에 기가 차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인공은 그의 타는 속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뻣뻣했던 남채화에게 길을 안내하게 한 사람이 나라는 걸 몰랐던 거야?”
인공의 능청은 하늘을 찔렀다. 정말 그렇게 믿고서 저러는 건지, 남의 속을 뒤집어놓으려고 작정을 할 건지.
사람이 참을 수 있는 인내의 한계란 대체 어디까지일까. 용하는 어금니를 깨물어가며 참고 또 참았다.
그런 용하의 노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공은 너무 실감 나게 물었다.
“정말 몰랐던 거야?”
그러고는 고개를 내저으며 컵라면 남은 찌꺼기까지 홀짝 들이마시듯 승부수를 던졌다.
“이해할 수가 없네. 그 잘난 창의부흥원 원장께서 어떻게 그걸 몰랐을까?”
마침내 용하는 가슴을 움켜쥐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형님, 제발…….”
짓궂게 장난만 치던 인공이 뒤늦게 상기된 얼굴로 용하를 부축했다.
“용하야! 아니, 나의 사랑하는 아우야.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아직 식전인데 대체 무엇을 훔쳐 먹었길래 속을 부둥켜안고 쓰러지는 것이냐.”
아플 새도 없었다. 용하는 겨우 진정하며 힘없는 소리로 애타게 당부했다.
“형… 님…. 제발… 그 입 좀…….”
겨우 몇 마디 입을 뗐지만, 용하가 숨을 쉬는 걸 확인하자, 상기됐던 인공의 얼굴색이 제 모습을 찾았다.
“형님! 형님… 제발… 제발 부탁입니다. 사람이 세 치 혀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뭐, 살인! 세 치 혀로?”
인공은 고개를 갸웃했고, 먼발치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주모는 기특하다는 기색으로 용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린 것이 철부지 어른을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야.”
모르는 건지, 못 들은 체하는 건지. 아무튼 인공은 주모가 구시렁거리는 것 따위는 개의치 않고 용하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이것 봐, 김용하! 우리 계획이 성공하든 못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네는 여기 무림에서 살고, 나는 21세기로 보내줘.”
“형님만 21세기로요?”
“그래, 나만 21세기로 보내란 말이야.”
“왜요? 가려면 같이 가는 거고, 남으려면 같이 남는 거지. 그러는 게 어디 있어요?”
“내가 보기엔, 자네는 여기가 궁합이 맞고 나는 21세기가 궁합이 맞는 것 같아서 그러지.”
틀린 말도 아니었다. 21세기의 김용하는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무림에만 오면 갑자기 무슨 복이 터져서인지 로또라도 맞은 것 같았으니까.
“하긴. 21세기로 돌아갔을 때 말입니다. 형님 덕분에 승승장구했습니다.”
“후후, 이제야 네 녀석이 말귀를 좀 알아들은 모양이구나. 그럼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형님 대접 좀 하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내 말이 무슨 뜻인지.”
“형님! 저한테 대접받고 싶으세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요즘 네 녀석 하는 꼴을 보면…….”
인공은 하던 말을 멈추고 울먹였다.
“형님, 갑자기 왜…….”
용하 또한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고 어리둥절했다.
“더는 바라지 않을 테니, 제발 사람 취급이라도 해줘.”
“네―에?”
용하는 두 눈을 치켜뜨며 격앙된 목소리를 냈다.
“사람 취급이라뇨, 누가 들으면 저를 패륜아로 알겠습니다.”
“그 말은 격하게 아니라는 것 아니냐?”
“당연히 아니죠. 제가 형님을 그렇게 막대한 적 있습니까? 노망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을…….”
“알았다. 네 말이 진심이라면, 그만한 정성이 있었겠지. 미안하구나.”
한순간도 고마운 마음을 저버린 적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용하는, 입만 벌렸다 하면 저도 모르게 정떨어지는 소리만 지껄였던 것 같다.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혹 이런 걸 두고 정이라고 하는 것인가.
“그래서 말인데요, 형님!”
말투나 태도로 보아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왜,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눈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웃는 것이냐?”
“수작 아니고 아부입니다.”
“무어라, 아부! 너무 솔직하니까 의심이 가는구나. 대체 뭘 얻으려고 아부를 하는 것이냐?”
“아, 그게 말입니다…….”
조금 전과는 다른 목소리였다. 뭐랄까, 정말 무슨 수작이라도 부리려고 그러는지, 나직하고 은밀한 목소리였다.
“장설 형님 말입니다. 나이 탓인지 고집이 세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 형님이 유독 고집이 세지. 그 나이 또래 다른 노인들을 보면, 도인이라 할 만큼 너그러운데 말이야. 그 형님은 사춘기를 잘못 넘겼나, 좀 세더라고.”
“형님, 그거 왠지 디스로 들리는데요.”
“디스! 왜? 여기 너하고 나밖에 없는데 무슨 소리야?”
“거, 제가 말입니다. …제가 제삼자잖아요.”
“아, 그래서 그게 디스야?”
“그럼요. 심하면 제삼자 허위사실 유포니, 뭐니 해서 처벌받아요.”
“아, 그래? 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우리 장설 형님이 고집이 센 게 아니고, 집념이 매우 강하신 거더라고. 용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처벌받는다는 말에 인공은 금세 말을 바꿨다.
“형님, 과거로 거슬러 온 만큼 퇴화라도 한 겁니까? 생각도 그렇고, 처세도 그렇고, 말발도 그렇고… 영 수준 미달인데요.”
말꼬리에 얼핏 헛웃음이 배어났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나이가 젊어졌는데 퇴화라니… 회춘이다, 인석아.”
그 순간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용하의 표정이 청량감이 엿보였다.
“아, 형님! 퇴화도 회춘도 아니고요. 지금 형님의 변화는 아기로 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본능 이외에 아무런 지능도 없는 간난 아기 말입니다.”
“뭣이라, 아무런 지능도 없는 간난 아기? 그러는 넌! 나와 별 거부감 없이 소통하고 있는 넌 무엇이냐?”
“아, 그건……. 저는 지금 형님의 어리광을 받아주고 있는 거죠.”
인공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 나 도저히 너하고 상종 못 하겠다.”
“상종 안 하셔도 됩니다. 형님은 그냥 제가 하자고 하면, 목숨 걸고 절 도와주면 됩니다.”
“왠지 가방모찌 취급당하는 것 같구나.”
“엥! 너무 실감 나게 모르는 체하시네. 형님 가방모찌 맞아요.”
그 순간 인공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기세로 쏘아붙였다.
“설마설마했는데, 네 녀석이 지금까지 나를 능멸하고 있었던 것이냐?”
“형님! 너무 열 내지 마십시오. 가방모찌도 능력입니다.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거든요. 그리고 막말로 저 아니면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다니, 뭘 말이냐?”
“언젠가 21세기로 가야 할 거 아닙니까? 저 없으면 어떻게 가시려고요. 트럭 운전은 할 줄 아세요? 조광연 박사와 무선 통신 가능하세요? 첨단 장비들 다룰 줄 아세요? 음…….”
숨도 안 쉬고 몰아붙이고도 또 무슨 할 말이 남았는지 입꼬리를 꼼지락거렸다.
“알았다. 알았으니까 인제 그만!”
인공은 새파랗게 질려 손사래를 쳤다.
“형님! 입씨름은 이 정도 하시죠. 제가 형님한테 감정 없는 거 잘 아시잖아요.”
“감정이 없으면, 지금까지 나를 가지고 논 것이냐?”
“가지고 논 건 아니고, 시간 죽이기 딱 좋잖아요. 주모가 아침밥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만 하려고 했는데, 이쯤에서 그만둬야겠네요. 재미없어서.”
어떻게 저런 말을 이렇게 쉽게 내뱉을 수가 있을까. 인공은 죽일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 용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