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160
160화
“언제까지 이렇게 유유자적 세월만 낚고 계실 겁니까?”
분풀이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천지를 뒤흔들 듯 우렁찬 목소리였다.
“아니, 이 녀석이 왜 소리는 지르고 지랄이야?”
용하의 성화에 인공은 잠시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지금 소리 안 지르게 됐어요? 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 일 안 할 거예요?”
“일? 무슨 일.”
인공은 어리둥절해서 장설을 바라보았다.
장설은 인공은 본 체도 하지 않고 처연하게 용하를 보며 말했다.
“누가 유유자적 세월을 낚겠다고 하더냐?”
장설이 되물었을 때 용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용하의 눈에는 지금 장설과 인공이 하는 행태가 그렇게 보였지만 증표로 삼기엔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입을 빼물고 있는 것이냐?”
고개를 깊이 숙였다. 조금 전 큰 소리를 낸 게 민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시가 급해진 만큼 할 말은 해야 했다.
“형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꾸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겨우 꺼냈다.
“조급해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더냐?”
“모르고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분타주가 된 이후, 무엇 하나 진척이 없습니다.”
“분타주가 된 게 얼마나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보름이 지났습니다.”
“달포라, 큰일을 위해 그 정도 시간도 투자할 수 없다는 것이냐?”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각성의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무림검도관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 이리 마음이 조급해서야.
‘이제 겨우 보름이 지났는데.’
조금은 부끄러웠다. 용하는 형형한 눈으로 장설을 바라보았다.
“왜 또, 무슨 할 말이 더 남았느냐?”
“형님, 오래 사셔야 합니다. 말씀드렸죠? 제 뜻을 펼치는 데 있어서 두 분 형님이 반드시 계셔야 한다는 거.”
“제발 좀 가달라고 할 때까지 살 것이니 조급해하지 말라. 그렇게 애태우지 않아도 다 때가 되면 싫어도 움직여야 할 것이니.”
“네, 형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날 이후 또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용하는 답답한 속내를 스스로 삭이며 기다려야 했다.
‘하, 왠지 조용히 늙어가는 기분인걸?’
방주와의 담판도, 정파의 장문인과의 협상도.
그리고 무림검도관도 의식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분타주 어른! 방주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방주 궁에서?”
용하는 눈이 번쩍 열렸다. 하지만 조금은 들뜬 가슴을 누르며 물었다.
“방주 궁에서 내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사람을 보낸 것이오?”
“방주 궁에서 온 사람에게 잠시 들라 하겠습니다.”
“그리하시오.”
마음은 조급했지만, 분타주가 지녀야 할 품위는 잃지 않았다.
한 홉의 숨을 쉴 만한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방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는데, 예상했던 무사의 모습은 아니었다.
용하는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방주 궁에서 왔다고 하셨소?”
“네, 그렇습니다.”
“내가 본 방주 궁의 사람들 모습과는 많이 다른 것 같소.”
“어떤 모습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방주 궁에는 무술 고수로 보이는 호위무사들과 어여쁜 하녀들이 오갔던 것 같소.”
“옳은 말씀이오. 하지만 저처럼 학문과 신물을 연구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방주 궁에서 온 자의 말에 용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그의 말 가운데 어떤 부분이 용하의 두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 걸까.
“학문과 신물을 연구하는 학자라고 하였소?”
“네, 그리 대답했습니다.”
용하는 눈을 아래로 뜨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게 과연 우연이란 말인가. 지금 저자가 하는 일은 내가 예전에 했던 일이 아닌가.’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개방에서 온 대신이라는 자가 분타주를 대하는 것도 그렇고, 방주가 분타주에게 학자를 보낸 것도 그렇고.
예전에 창의부흥원 원장으로 있을 때 기억이 빠르게 스쳤다.
‘나는 외부로 나가본 기억이 없다. 거의 용두방주와 소희 낭자의 전유물 같았는데.’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인공과 장설이 기록원으로 일했다는 사실 말이다.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형님들이 개방의 모든 사람을 평가해서 기록하는 일을 했는데.’
아무튼 용하로서는 방주 궁에서 보낸 사람 덕분에 많은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기억들은 앞으로 일을 펼쳐나가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방주께서는 무슨 연유로 예까지 사람을 보내신다고 하셨소?”
“그냥 대화를 나누라 하셨습니다.”
“그냥 대화를 나누라 하셨다?”
“네,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내심 설레었다. 개방의 아니, 무림의 누구 하나 대화가 통했던가. 용하가 할 말을 참아가며 상대의 대화 수준에 맞췄을 뿐.
‘학문과 신물을 연구하는 자라면 그나마 좀 대화가 통하지 않겠는가.’
“음, 나쁘지 않은 얘기요. 대화를 많이 나누면 치매 예방에 좋다 하지 않소.”
“분타주께서 치매라는 말을 어찌 아십니까?”
방주 궁에서 온 자는 다소 놀란 기색이었다. 그의 반응에 용하는 더 놀란 표정을 되물었다.
“아니, 그 말을 안다는 게 그리도 이상한 일이오? 음, 참으로 이상합니다. 치매라는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말이 아니오.”
“아닙니다. 그 말은 아직 세상에 알려진 바 없는 신조어입니다.”
“아니, 치매라는 말을 쓰는 나는 이상한 사람이고, 신조어라는 말을 쓰는 그대는 괜찮다는 것이오?”
“반응하는 걸 보니 두 말을 다 알고 계시는군요.”
“오호라, 그 말은 나를 떠본 거란 말이구려.”
“기분 나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용서할 일이 아니라 생각하오. 설명해 주시오. 나를 떠본 이유를.”
“그냥 학자의 습관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학자들은 누구나 합리적 의심을 합니다. 그래서 늘 질문을 던지고는 하게 됩니다.”
사실 열 살 이후로 검도만 해온 용하의 귀에 학자의 말이 다 들어올 리는 없었다.
‘합리적 의심이라.’
용하에게 이 말은 알고자 하는 자가 제공하는 타당성이라는 말로 들렸다.
괜한 오기가 생겼다. 갈 데까지 가보고도 싶고 궁금한 것도 많았지만, 그걸 다 해소한다는 건 시간 낭비였다.
‘지금은 무엇을 따질 때가 아니고, 이자에게 무엇을 얻어내야 할 때다.’
생각이 달라지자 눈빛도 달라졌다.
“아, 내 정신 좀 보게. 지금 이런 걸 따질 때가 아닌 것 같소. 방주께서 사람을 보낸 이유가 무엇이오?”
“아, 그건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많은 대화를 나누라 하셨습니다.”
“대화를 나누라. 그게 다였소? 그밖에 다른 얘기는 없으셨소?”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제 막 정해진 시간의 다 되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다 되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요?”
“공인인 제가 지켜야 할 일정 말입니다.”
“일정이라, 그런 게 있으셨군요.”
“네. 그럼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또 언제 볼 수 있겠소?”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아, 내일! 그럼 조심해서 가시오.”
개방에서 온 학자가 떠난 후 용하는 생각했다.
“사람 죽으란 법 없다더니, 하나둘 내 편이 생기는군.”
당장 용하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둘이었다. 하나는 이미 친구 사이가 된 무사와 다른 하나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금 전 대화를 나눈 학자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빨리 진행될 수도 있겠는걸.”
그날 밤 용하는 어스름한 달빛을 길잡이 삼아 장설의 집으로 향했다. 이제 막 인공의 집을 지나고 있었지만, 발길을 멈춘다거나 하지 않았다. 오늘은 왠지 장설과 단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였다.
“형님, 용하입니다.”
장설은 문을 열며 반겼다.
“이 시간에 웬일인가?”
“잠을 청할 수 없어 마실 왔습니다.”
“마실이라, 젊은 사람이 노인처럼 말하는군.”
“노인들과 지내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리된 것 같습니다.”
“거꾸로 됐구먼. 우리가 젊은 사람과 지내다 보니 젊어져야 하는데 말이야.”
“모르긴 해도 예전에 장설 형님을 알던 사람이 본다면 분명 그리 볼 것입니다.”
“정말 그리 생각하는 것인가?”
“저부터도 처음 장설 형님을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놀랍게 달려졌다는 걸 느끼는데요.”
“처음에 날 봤을 때 어땠었는지 궁금하군.”
장설은 자기 첫인상이 어땠는지 궁금해하는 기색이었다.
용하는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럼 무엇인 줄 알았느냐?”
“생김새는 제가 아는 어떤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골룸이라는 생명체 같았는데, 왠지 풍기는 성품은 도를 터득한 사람 같았습니다.”
“그래서 첫인상이 좋았다는 것이냐, 나빴다는 것이냐?”
“척 보면 모르세요? 모르면 위선이야, 도인처럼 보였던 거 전부.”
“내가 진짜 몰라서 물었을 것 같으냐? 다 알면서도 네 녀석에게 직접 듣고 싶은 건 무슨 조화란 말이더냐.”
“설레어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오는 길에 인공 형님의 집을 그냥 지나치고 형님께 왔다면 대답이 되었을까요?”
“잠을 못 이룰 만큼 설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용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이 장설의 눈에는 오만으로 보였다.
“어른이 물으면 바로 대답하는 게 예의이거늘.”
“네네, 압니다. 숨 좀 쉬고 대답하려고 했습니다.”
용하는 보란 듯이 두어 차례 심호흡하고는 다시 입을 뗐다.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 슬슬 일을 시작하셔야죠.”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사이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로구나. 그래 일을 시작할 명분이라도 생긴 것이냐?”
조금은 솔깃해하는 기색이었다.
“낮에 방주 궁에서 사람이 왔었습니다.”
“오, 그래? 와서 뭐라 하더냐?”
“특별한 말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전 기억이 떠올라서요.”
“예전 기억! 그래 어떤 기억이 떠올랐기에 이리 경망을 떠는 것이냐?”
“형님과 인공 형님이 개방의 사람들 평가해 기록하는 기록원으로 일했다는 것 말입니다.”
장설은 뜻밖이라는 듯 기억을 더듬는 기색이었다. 그리고는.
“오호라, 이제야 기억이 나는구나. 소희 낭자와 자네 호위무사를 하면서 부업으로 기록원을 했었지.”
“어쩌면 우리가 가진 패가 방주의 패보다 높을 수도 있습니다.”
의미심장했다. 장설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형님, 어떠세요? 신세계가 펼쳐질 것 같지 않습니까?”
“음, 왠지 그럴 것도 같구나. 인공과 내가 그때 기록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역시 형님의 통찰력은 여느 사람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통찰력이 남다르면 무엇하겠느냐? 그때 기록이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은걸.”
“기록 따위 없어도 됩니다. 적어도 형님들 기억 속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까?”
“오호라, 기억을 되살리면 된다. 그렇지! 기억을 되살리면 되지. 역시 젊은 피라 순발력이 대단하구나. 음, 그동안 신경을 안 쓰고 살아서 그렇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장설이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했다는 건 그들의 앞날이 희망적이라는 걸 대신했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인공의 집으로 가자꾸나.”
“거긴 왜요?”
“망설일 게 뭐 있느냐. 말 나온 김에 한시라도 빨리 시작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씀은 맞습니다. 하지만 모르긴 해도 인공 형님은 지금 술독에 빠져 있을 겁니다.”
“술독에 빠졌다! 그래서 더 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지금 술독에 빠져 있으면 혼쭐을 내야 하지 않겠느냐? 술은 기억을 되살리는 데 방해만 될 뿐이야.”
용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곧 무릎을 탁! 치며 일어섰다.
“역시 형님이십니다.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