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161
161화
“인공, 안에 있는가?”
밥상 위에 정갈하게 젓가락이 놓이듯 장설의 목소리는 밤하늘의 운치를 더했다.
“안에 있으면 어서 나와 객의 흥을 돋우기 위해 노래 한가락 부르거라.”
그제야 방문이 열리며 인공이 부스스 모습을 보였다.
“아니, 형님. 이 시간에 웬일이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 있다마다. 다 늙은 네 녀석과 내가 이제야 사람 구실 좀 하게 되었다.”
“아, 이 형님은! 뭘 또 그렇게 자기 비하 발언을 하시고 그럽니까?”
“비하 발언!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세상엔 유효기간이라는 게 있어. 자네와 나는 유효기간이 지났어. 지나도 한참 지났지. 그런 우리가 아직 무엇인가 할 일이 남았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 줄 아느냐?”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흠, 일단 한걸음 물러서자. 저렇게 자신감이 충만한데 건드렸다가 괜히 나만 봉변당하지.’
“아 네, 형님~ 무엇이 그리 좋은지 한번 들어나 봅시다.”
“뭣이라, 한번 들어나 봅시다! 예끼 인석아, 한번 들어나 보겠다는 녀석에게 내가 얘기해 줄 것 같으냐?”
“형님, 내리사랑이라 하지 않습니까? 어여삐 여기셔서 한 번만 말씀해 주시구랴.”
말마따나 유효기간 지난 노인의 애교에 장설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허,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내 너에게 떡을 줄 터이니 잘 받아먹도록 하라.”
“어이구, 형님~ 감사합니다.”
장설은 용하가 했던 말을 처연하게 꺼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절제된 감정으로 인공을 흡입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인공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어떠냐, 이래도 노래 한가락 부르기가 아까운 것이냐?”
“아닙니다. 밤새라도 부르라면 부를 것입니다.”
인공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죽으라면 죽는시늉 정도는 망설이지 않을 것 같았다.
“밤이 깊었으니 노래는 됐고 우리가 기록원으로 일할 때를 기억해 내보거라.”
“그때 기억이라면 지금도 생생하죠. 내 인생의 리즈 시절이었는데.”
“뭔 시절?”
난생처음 듣는 말에 장설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그 순간을 도마뱀이 혓바닥을 길게 던져 개구리를 낚아채듯 빠르게 알아차린 용하가 판을 뒤흔들었다.
“형님,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건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 세상을 주름잡던 시절이 있다는 게 중요하죠.”
“네 녀석이 왜 끼어드는 것이냐? 난 그, 리즈 뭐? 그 말이 궁금해서 묻는 것인데.”
“네, 그 리즈시절이라는 말이 바로 주름 잡던 시절이라는 뜻입니다. 인공 형님 고향이 혹시 어디세요? 아마 그 지역에선 그런 표현을 쓰나 봅니다.”
인공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던지 바로 알아차리고 맞장구를 쳤다.
“그게 고향에서 쓰던 사투리는 아니고, 우리 동네 좀 노는 애들끼리 통하던 말인데, 나도 예전엔 잘나갈 때가 있었다. 침 좀 뱉던 시절이 있었다. 뭐, 그런 뜻으로 폼 한번 아니, 무게 한번 잡아봤습니다.”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겠구나. 그래, 그 리즈인가 뭔가, 그 시절 기억나는 걸 한번 조곤조곤 읊어보도록 하라.”
“네, 형님. 개방 초입에 있는 허름한 집, 박 씨네 말입니다. 그 집 둘째 아들이 운동신경이 좋아 무사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주변에 누구 하나 자기 아들놈에게 무술을 가르쳐주려 들지 않는다며 하소연하지 않았습니까?”
장설은 잠시 기억을 더듬는 기색이었다.
“오호라, 그것을 기억하는구먼. 그때 자네가 그 아이에게 무술을 가르치겠다고 선뜻 나서려 드는 걸 내가 말렸던 기억이 나는데.”
“맞습니다, 형님. 제가 철없이 오지랖을 떨 때 형님이 말려주셨습니다.”
“장설 형님! 이런 순간 무엇인가 머리통을 확 휘어 감지 않습니까?”
“머리통을 휘어 감다니, 인석아 내 머리가 네 녀석 대가리쯤 되는 줄 아느냐?”
“형님도 참, 대가리가 뭡니까, 대가리가?”
“그러는 네 녀석은 어른한테 머리통이 뭐냐, 머리통이?”
“아니, 그럼 머리통을 머리통이라고 그러지. 머리통 님이라고 합니까?”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들자 장설은 울화가 치밀었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렇게 잘났으면 잘난 것들끼리 잘 해봐. 난 이만 갈 터이니.”
“아이고, 형님도 참! 별걸 다 역정을 내시네. 거, 대화라는 게 그렇잖습니까? 그냥 조곤조곤 대화만 나누면 지루하기도 하고 또 졸리기도 하고! 그래서 추임새 좀 넣은 걸 가지고.”
“뭐라! 추임새?”
“그렇습니다, 형님. 제가 장설 형님께 무슨 억한 감정이 있어 언짢아하실 걸 뻔히 알면서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듣고 보니 좀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장설은 금세 누그러졌다.
“앞으로 말조심하거라. 이번엔 내가 너그럽게 용서하겠다.”
“아이고, 형님. 감사합니다.”
세 명의 의형제는 죽이 척척 맞았다.
“그래, 내 머리통을 휘어 감았다는 게, 대체 무엇이냐?”
“무림검도관이요.”
“무어라, 또 그 소리!”
“역정만 내시지 말고 제 얘기를 좀 차분히 들어보십시오.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검도를 배울 수 있다면, 검(劍)이 곧 법(法)인 이 험난한 무림에서 누구나 제 목숨 하나쯤은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는 여느 때와 달리 설득력이 강했다. 조금 전 큰소리를 냈던 장설이 수그러들더니,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자네가 말하는 무림검도관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느냐?”
“무림검도관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라면, 여기 무림의 사람들 말씀입니까?”
“당연한 걸 왜 자꾸 묻는 것이냐? 그러면 여기 말고 어디 또 다른 곳에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냐?”
“아, 죄송합니다. 제가 머릿속이 좀 복잡해, 자꾸 형님 심기를 건드리게 됩니다. 이점 널리 헤아려 주십시오. 형님!”
“상황이 머리가 복잡할 만도 하니 용서하겠다. 그럼 어디 묻는 말에 다시 대답해 보아라.”
“형님, 죄송한데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새겨듣고 그 생각은 접도록 하겠느냐?”
“아뇨, 그럴 순 없습니다. 잘못된 건 바로 잡으면 되는 일인데, 어찌하여 자꾸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기꺼이 무림검도관 건립을 밀고 나가겠다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그 말은 기꺼이 무림검도관 건립을 추진하겠다는 뜻이군.”
장설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무림에서는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부류의 연합체를 무림맹이라 한다.”
“무림맹?!”
용하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검도관 주인인 자네를 바라보는 사람들 눈에는 자네가 무림 맹주로 보일 것이야.”
“무림 맹주?!”
용하의 미간에 두 겹 세 겹 주름이 접혔다.
생각보다 일이 커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그래, 형님 말씀도 일리는 있어. 아직 시간 많으니까 좀 더 생각해 보고 다시 거론하자.”
인공의 두 사람 사이에 과열된 공기를 식히고 나섰다.
“알겠습니다. 그럼 형님은 예전 기록원으로 일했을 때를 최대한 많이 기억해 내십시오.”
“그리할 테니 너무 속 끓이지 마.”
“그렇게 되살린 기억을 토대로 글로 남겨주십시오. 기록으로 말입니다.”
“하, 이 나이에 내가 또 책상머리에 앉아야 한단 말이냐.”
“책상 앞에 앉아본 적 없잖아요. 이참에 기회라 생각하고 앉아보십시오.”
“알았다. 한동안 머리가 뜨끈뜨끈하겠구나.”
“고맙습니다, 형님!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이 은혜는 제가 원수로 갚겠습니다.”
“뭐야?”
세 사람은 껄껄껄 웃었다.
그날 이후 인공의 말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평소 외향적이고 활달했던 것과는 달리 매사에 학구적이고 침착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간혹 골똘히 깊은 사색에 빠져 있을 때면 혹 입적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될 만큼 말이다.
“형님, 쉬엄쉬엄하십시오.”
정말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예상대로 다른 사람의 말 따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장설 형님, 제가 괜한 부탁을 한 것 같습니다.”
“어찌하여 그리 생각하느냐? 인공의 건강이 염려되는 것이냐?”
“네, 그동안 인공 형님과 알고 지내면서 저렇게 고도의 집중력을 보이는 건 처음입니다.”
“처음 본다니 당치않구나!”
“당치않다니요?”
“인공은 부처를 섬기는 자가 아니더냐?”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부처를 섬기는 자는 늘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매일 부처님께 기도드려야 하는데, 그 모든 행위가 고도의 집중력에서 발로한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냐?”
그제야 용하는 스스로 편협돼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형님! 저는 그저 학구열을 말씀드렸던 겁니다. 누가 봐도 인공 형님이 학구파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제야 장설도 조금은 공감하는 기색이었다.
“녀석에게 저런 능력이 있다는 건 사실 기대 이상이야.”
“그죠, 그죠, 형님도 인정하시죠? 저는 말이죠, 인공 형님 같은 사람은 지난 일에는 아예 관심도 없을 줄 알았습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괜히 연연하는 것 같은. 그래서 사내답지 못하다고 여기는.”
“아무튼 저 녀석 덕분에 우리 팔자가 바뀔지 모르는 일이니 기다려보자꾸나.”
“형님도 예전 호위무사 시절이 그립습니까?”
“왜, 아니겠느냐? 인공이 그러지 않더냐. 그 시절이 자기 인생에서 한가락 하던 때라고.”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너, 이 녀석! 또 그 무림검도관인가 뭔가 거론하려는 거지?”
“무림검도관을 비하하는 발언은 삼가십시오. 앞으로 이 무림은 기, 승, 전, 무림검도관! 기, 승, 전, 무림검도관! 이런 세상이 될 것입니다.”
결코 소일 삼아 하는 소리로 들리지는 않았다.
“그래, 무엇이 됐든 동생들 잘 둬서 늘그막에 호강 한번 해보자꾸나.”
“네. 형님! 제가 반드시 해드릴 겁니다. 호강에 겨워 몸서리치도록 말입니다.”
“말이라도 고맙구나. 그런데 난 말이다. 영 마음에 걸려.”
“마음에 걸리다니, 무엇이 말입니까?”
“그 무림검도관이라는 거 말이다.”
“그런 걱정도 하지 않게 해드릴 겁니다.”
“녀석, 넙죽넙죽 대답은 잘하는구나.”
장설의 눈에는 용하가 그저 어린 동생으로만 보였다.
과연 얼마만큼의 결과를 내줄 것인가. 인공이 기억을 되살려 그것을 기록으로 내놓기만을 기다리는 시간은 조바심과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하품 나오게 했던 지루하고 긴 시간도 어김없이 같은 방향으로 흘렀다.
―으아아악!
마침내 인공이 기지개를 쭉 켜며 방에서 나왔다.
“형님!”
“인석아!”
인공을 본 용하와 장설은 경악해서 소리쳤다.
“형님! 세상은 아직 무사하죠?”
“그럼 인석아. 세상이 무사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으냐?”
“형님은요?”
“세상이 무사하면 나 또한 무사하지 않겠느냐?”
“고맙습니다. 무탈하게 계셔주셔서. 용하 너는 어찌 지냈느냐?”
마치 먼 곳으로 여행이라도 다녀온 사람 같았다.
“형님! 저, 죽는 줄 알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형님 일 마치기만을 기다리다 목 빠져 죽는 줄 알았습니다.”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구나. 그 입이 살아있는 걸 보니.”
그때였다. 장설이 슬금슬금 인공 쪽으로 다가가서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녀석이 기대가 크던데, 어떻게 욕먹는 일 없게 잘한 것이냐?”
“들어가서 보십시오.”
기고만장한 게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어디 한번 기다린 보람이 있는지 보자꾸나.”
용하와 장설이 방으로 들어가고 한 시진 남짓 시간이 흘렀다.
인공은 조금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며 구시렁거렸다.
“이토록 꼼꼼히 살핀다는 건,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는 것이렷다!”
인공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