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164
164화
“혹시 내가 그를 알거나, 그가 나를 아는 건 아닐까?”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 뚜렷이 잡히는 건 아니었지만 자꾸 겹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예전에 용두방주의 눈에 쏙 들어 부와 권력을 동시에 잡았을 때처럼 이번에도 운이 좋아 그렇게 된다면 아무런 의심 없이 그저 감사하며 남은 삶을 살 것이다.”
누군가 올 것 같은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방주 궁에서도 발길을 끊었어. 매일 오던 학자들도 얼굴을 보이지 않고 말이야. 하긴 이제 알아낼 거 다 알아냈으니 더는 올 리가 없지.”
조금 있으면 하루의 해가 가장 높은 곳에 도착한다. 그런데 용하의 집에 누구 하나 발길을 들여놓는 사람이 없었다.
“형님들도 얼굴을 안 비추네! 개방의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기 전에 꼭 들리시던 분들인데.”
그때였다.
“분타주 어른! 개방에서 들라 하십니다.”
“개방에서!?”
전동킥보드 시전 이후 아무런 소식이 없어 연락이 끊긴 걸로 알았는데.
‘이번엔 또 무슨 일로 불시에 사람을 보낸 걸까?’
조금은 의심스러웠지만 반가움이 앞섰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낸다거나 하지 않았다.
“곧 나갈 터이니, 기다리시오.”
용하는 일부러 더 차분하게 아니, 오히려 더 차갑게 말했다.
들뜬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약간의 노력이었다.
방주 궁으로 갈 준비를 끝낸 용하는 바로 나가지 않고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방주 궁에서 나온 사람이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지금쯤 어떤 반응이 와야 하는데.”
너무 조용해서였을까, 내심 불안했다.
“혹시 그냥 간 걸까?”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럴 리는 없어. 왜? 방주 궁에서 자기 임의로 온 게 아니니까. 그자는 방주가 내린 명을 받들고자 여기까지 왔으니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는 일은 있을 수 없지.”
혼자 중얼거리며 좀 더 시간을 끌었다. 그때였다.
“분타주 어른! 아직 멀었습니까?”
용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아니, 일부러 느긋하게 능청을 떨었다.
“새털처럼 많은 날, 급할 게 무엇이 있겠소.”
“분타주 어른.”
기다림에 지쳤는지, 방주 궁에서 나온 사람은 간절히 애원했다.
“후, 진작 그럴 것이지. 납작 기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
혼잣말로 흡족한 속내를 드러내고는 곧 밖을 향해 소리쳤다.
“어허, 왜 이리 보채는 것이오? 곧 나갈 것이니 잠시만 기다리시오.”
일부러 더 단호하게 말하고는 저 혼자 좋다고 키득거렸다.
“이제 슬슬 나가볼까?”
이제 막 용하가 집 밖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용하를 본 방주 궁에서 나온 사람은 저도 모르게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분타주 어른, 제가 길잡이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방주 궁에서 나온 사람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쯧, 누군가를 뒤따라 걷는다는 게 왠지 좀 가호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길잡이가 되겠다고 하니 기꺼이 그 뒤를 따르는 수밖에.
‘이놈의 후기 인생!’
21세기를 살면서 늘 후줄근했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난생처음 죽도를 잡고 공부하고는 담쌓고 지냈던 것. 대학은 단체전에서 팀이 우승해 특기생으로 묻어서 갔고. 대학을 졸업하고는 아버지가 대출받아줘서 차린 변두리 검도 체육관도 폐업하기 직전에 인공의 도움으로 겨우 부활했고.
‘하지만 여기 무림에서만큼은 절대 후기 인생을 살지 않을 것이다.’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어서인지 열등감에 휩싸여 살았다. 그런데 무림에서는 어떤 기연이 있어서인지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했다. 물론 한 무리의 우두머리로 우뚝 서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때보다 자기 능력을 발휘하며 성취동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 번 태어나서 네 번의 삶을 살았다. 아니, 살고 있다.’
지난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어둡고 긴 터널 속 같았다.
한동안 지난 기억 속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문득 현실로 돌아왔을 땐 현실 중 일부를 그냥 건너뛴 것 같았다. 어느새 방주 궁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예서 잠깐 기다리십시오.”
“알겠소.”
여기까지 인도해 온 무사가 방주 궁으로 들어가고 용하는 홀로 남겨졌다. 웬일인지 용하의 시선이 방주 궁 그러니까, 예전 창의부흥원을 지나 수목이 울창하고 꽃들이 만개한 아름다운 정원에 머물렀다. 소희 낭자의 별채가 있던 곳이다.
‘내일부터는 소희 낭자를 수소문하라고 해볼까? 그런데 형님들이 내 부탁을 토 달지 않고 들어주려나 모르겠네.’
그곳을 바라보며 어린 소희와 서역의 신물을 연구하던 때를 떠올렸다. 하지만 추억에 젖을 틈도 주지 않고, 조금 전 방주 궁으로 들어갔던 무사의 목소리가 달콤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들어오십시오.”
무사의 뒤를 따라 방주 궁으로 들어갔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사뿐사뿐 걷는 무사의 뒤를 따라 걸으려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주 궁 그러니까, 창의부흥원 구조는 눈감고도 다닐 만큼 훤히 꿰고 있으니 말이다.
‘분명 값어치 있는 인내심일 거야.’
지금 방주가 사용하고 있는 방주 전은 예전 용하가 연구실로 사용하던 곳이다.
‘왜 하필 연구실일까?’
예전 용하가 연구실로 사용했던 공간은 사실 구석지고 한적해서 대다수 사람이 꺼릴 만한 공간이었다.
용하는 조용하고 사색하기 좋다는 생각에 조금은 구석진 그곳을 연구실로 사용했다. 그런데 방주는 왜 그런 곳을 업무 공간으로 선택한 걸까? 적잖이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골몰할 때가 아니었다.
어느새 방주 전 문 앞에 섰다.
“대인, 김용하 분타주 대령하였습니다.”
“들라 하게.”
비교적 평온한 목소리였다. 아니, 정확히 말해 예전처럼 날 선 목소리는 아니었다.
스르르.
문이 열렸다. 마치 21세기의 자동문 열리듯 말이다.
새하얀 베일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안에 앉아 있는 방주가 어렴풋이 보였다.
“분타주 김용하, 방주 대인의 부름을 받잡고자 알현하옵니다.”
이제 막 전장에서 개선한 장수 못지않은 예를 갖췄다. 조금은 지나친 행동이었다. 하지만 방주 궁의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분타주를 부른 이유는 지금 기거하는 곳이 혹 불편하지는 않은지 궁금해서요.”
단도직입적이었다. 용하는 방주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것저것 갖추고 서론이 길고 뭐 그런 건 딱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대인의 은혜 덕분에 그럭저럭 지낼 만합니다.”
조금은 모호한 대답이었다. 용하가 이런 대답을 내놓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냥 지낼 만하다고 대답하면 방주가 여기까지 부른 이유를 굳이 말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편함을 너무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왠지 가벼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비록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많이 불편할 것이오.”
용하는 말을 아꼈다. 때로는 그러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적중한 듯했다.
“그래서 생각을 해본 건데, 다른 의견이 있으면 말해 주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용하는 고개를 깊숙이 숙여 예를 갖췄다.
“방주 궁을 나가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작은 정원이 하나 보일 것이오.”
“혹 수목이 울창하고 꽃들이 만개한 정원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그렇소, 바로 그 정원 말이오. 그곳에 작은 집을 하나 지을 생각인데, 어찌 생각하시오?”
용하는 잠시 헷갈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하지만 그렇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를 어쩐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현명하단 말인가.’
그때였다.
“어찌하여 대답이 없는 것이오!”
다시 예전처럼 탁해진 목소리였다.
용하는 티 안 나게 숨을 들이쉬었다.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과감하게 대답했다.
“그것을 분타주에 불과한 소인에게 묻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분타주가 그 집의 주인 될 사람이어서 묻는 것이오.”
조금은 도도했지만, 시원스러운 대답이었다. 방주의 대답에 궁 안의 사람들은 적잖이 놀란 기색들이었다. 용하는 경악해서 눈동자에 핏발이 선명했다.
“아니, 소인이 무슨 명분으로 그 집의 주인이 된다는 겁니까?”
“명분은 충분하오. 이미 방주 궁의 학자들 의견을 수렴하였소.”
“그 말씀은 학자들이 소인을 그 집의 주인으로 추천이라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분타주는 왜 그리 궁금한 것이 많소?”
“송구합니다.”
“궁금증이 남아 있어서야 어디 일이 손에 잡히겠소? 말해 보시오.”
“학자들이 뭐라고 하면서 저를 추천하였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배울 점이 많다고 하였소.”
용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배울 점?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람!’
“그 집의 이름을 창의진흥원이라 할 생각이오.”
방주의 말에 용하의 두 눈이 조금은 커졌다.
‘창의진흥원?’
“방주 궁의 부속기구로 창의진흥원을 건립하고, 그곳의 수장으로 분타주를 임명할 것이오.”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용하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크게 숨을 수차례나 쉬었다.
“그리고 분타주와 함께 온 두 노인은 무예가 뛰어나다 들었소. 그래서 창의진흥원의 안전을 수호하는 호위무사로 임명할 것이오.”
불현듯 창의부흥원과 호위무사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규모는 작지만, 지금의 창의진흥원도 예전 창의부흥원 못지않게 마음에 들었다.
“망극하옵니다.”
용하는 코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납작 조아렸다.
맨 뒷줄에서 지금까지의 광경을 지켜보던 십여 명의 학자들도 방주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감사의 표시였다.
‘때맞춰 이런 기회가 올 줄이야. 일이 훨씬 수월해지겠는데.’
그날 밤.
용하는 인공과 장설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알렸다.
“정말 방주가 그리하겠다더냐?”
“아, 글쎄 그렇다니까요.”
격앙된 인공의 질문에 용하는 적잖이 들떠 대답했다.
“방주 궁 중앙 정원에 창의진흥원을 지어, 용하 너를 원장으로 앉히고 우리는 호위무사로 임명하겠다고 했단 말이지?”
몇 번을 듣고도 믿기지 않아 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이 나이에 아직 운이 남아 있어나 보군. 나는 분타주로 살면서 다리품이나 파는 것에 만족하려 했는데.”
“그럼 우리 내일부터 발품 안 팔아도 되는 것이냐?”
“그럼요. 방주 궁의 부속기구인 창의진흥원의 호위무사가 왜 발품을 팝니까?”
“하, 나는 무엇보다도 그 발품 안 팔아도 된다는 게 너무너무 기분 좋구나.”
“그동안 힘드셨나 봅니다.”
“그럼 힘들었지. 내색은 못 하고 매일 밤, 밤새 끙끙 앓았는데.”
“어허, 쓸데없는 소리. 겨우 그걸 하고는 고생했다고 하소연하는 것이냐?”
“형님도 참, 하소연이 아니고 정말 밤새 몸살로 끙끙 앓았단 말입니다.”
“그건 고생해서가 아니고, 운동 부족이야.”
“네―에! 운동 부족이라고요? 이 형님이 진짜 노망이 나셨나.”
인공은 버선을 벗어 발바닥을 보여주며 이기려 들었다.
“형님, 이것 보십시오. 이래도 운동 부족이라고 말씀하실 겁니까?”
인공의 발바닥은 보기조차 힘겨울 정도로 퉁퉁 부어있었다.
“알았으니 치우거라. 냄새가 역겹구나.”
“그나저나, 정말 형님은 아무렇지 않은 겁니까?”
“나? 나는 기쁨이 너무나도 커서 아픔은 느껴지지를 않는구나.”
“역시 긍정의 아이콘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아이콘?”
장설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궁금증이 가득한 눈으로 인공을 바라보았다.
“아, 형님 그런 게 있습니다. 그리고 인제 그만 좀 하시죠?”
“그만하다니, 뭘 말이냐?”
“그 모른 척하는 거요.”
“모른 척하는 게 아니고, 나 진짜 몰라.”
“그래도 대놓고 그렇게 모른 척하지 마십시오. 무식해 보입니다.”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자 용하가 그것을 불식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호사다마라 하였다. 좋은 일이 있을수록 더 신중해야 하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