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166
166화
‘그럴 필요가 없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용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약간의 시차를 둔 채 서서히 돌아섰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곤륜파 장문인께서는 이곳까지 그냥 떠보려고 오신 겁니까?”
조금은 침통한 목소리였다. 아니, 어쩌면 분노의 목소리였을 수도. 하지만 곤륜파 장문인은 처연하게 대답했다.
“그 안내서인가 설명서인가 말이오. 그거 가지고 가서 구매할지 말지 의논하고 결정하라는 거잖소.”
“그리 잘 아시는 분이 어찌하여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까?”
용하는 옥죄듯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자칫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강매라도 하듯 말이다.
“잘 알기 때문에 필요 없다고 하였소. 조금 전이나 지금이나 말이오.”
‘저 작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인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눈동자에 벌겋게 핏발이 섰다.
“한 문파의 장문인 되시는 분께서 어찌 그런 망발을 하는 것이오.”
잠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더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망발이라 하였소? 그렇다면 지금 결정하겠소. 저 물건이 얼마나 가지고 있으시오?”
“섣불리 결정할 게 아닙니다. 곤륜파 장문인께서는 아직 얼마를 치러야 을 살 수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얼마든 상관없소. 그만한 각오도 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을 것 같소? 곤륜파를 걸고서라도 모두 사들일 것이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곤륜파 장문인 몽돌의 결심은 확고했다.
“왜, 안 되겠소? 물건 사는 데 순서가 있는 건 아니잖소. 뒤로 하는 거래도 얼마든지 있는 것 아니오.”
뒷거래라, 말로만 듣던 뒷거래! 지금 곤륜파 장문인 몽돌은 그 뒷거래를 제안하는 중이었다.
‘음, 이렇게 한꺼번에 여러 대를 구매하겠다면야, 뒤로 하는 맛도 괜찮을 것 같은데!’
바로 그 순간 용하의 뇌리에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가 스쳤다.
‘죽으란 법은 없다더니, 다양한 방법들이 용솟음치는군. 만에 하나 첫 번째와 두 번째 안이 실패한다면 세 번째 안을 감행할 것이다.’
용하의 굳게 다문 입술에 회심의 미소가 피었다.
그날 곤륜파 장문인이 돌아간 후 창의진흥원 원장실에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대체 곤륜파에서 그 많은 전동킥보드를 사들여서 무엇에 쓰려는 것일까?’
사실 용하는 손해 볼 게 없었다. 하지만 뜻밖의 일이어서인지 적잖이 궁금했다.
각 문파의 장문인에게 선물로 주려고 가져온 열 대는 개방의 방주 궁에다 풀었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준비한 30여 대의 전동킥보드 가운데 여덟 대는 각 문파에 하나씩 나눠서 팔고, 나머지 스물두 대를 곤륜파에 넘긴다는 계산을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A/S만으로도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지 않은가.’
전동킥보드를 사들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들이 맥없이 픽픽 쓰러져 나자빠질 것이다. 그러면 각 문파에서는 식식거리면서 창의진흥원으로 찾아오겠지? 그때 미리 준비해둔 여분의 배터리로 몰래 바꿔 끼우고 아무렇지 않은데, 웬 소란이냐고 몰아세우면서 길을 들이는 거지.
‘임도 보고 뽕도 따고, 도랑 치우고 가재 잡고! 여분의 배터리는 그냥 돌고 돌뿐. 돈은 내 주머니에 차곡차곡 쌓이는 거잖아.’
무림의 광야에 묻혀버리는 태양광을 집열판에 모아 배터리에 충전해서 팔고 또 팔고 한다고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아마 배보다 배꼽이 더 클걸.”
생각만 해도 입이 헤벌쭉해졌다. 마음 같으면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이것은 나의 승리가 아니고, 문명의 승리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날 밤.
어스름한 달빛을 길잡이 삼아 중앙 정원을 거니는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창의진흥원 원장 김용하였다. 용하는 들뜬 가슴을 달래고자 무념무상으로 어둠을 헤치며 걷고 있었다.
“변화무쌍하다!”
무엇이 됐든 하나만 되기를 바라고, 무엇이 됐든 하나가 되었을 때 뛸 듯이 기뻐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때는 숨 쉴 틈도 없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긴장감이 넘쳐났는데.”
어느새 다이내믹했던 때가 그리워졌더란 말인가. 그때였다. 사부작사부작 용하를 뒤따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쳇, 그럼 그렇지. 잠시도 가만두지를 않는군.’
용하는 오감을 살려 오직 사부작사부작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집중했다.
‘가만있자, 얼마나 걸었을까? …창의진흥원에서 얼마나 멀어진 걸까?’
갑자기 인공과 장설이 수호천사처럼 느껴졌다.
‘장설 형님…, 인공 형님…….’
그런데 뒤따르는 발걸음이 흔히 사람들이 걸을 때 은연중에 나타내는 리듬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뭐랄까, 이런 걸 엇박자라고 해야 하나? 아님, …어, 그래! 픽사리 난다고 해야 옳을 듯했다.
‘저 발걸음은 예전에 남채화가 한쪽은 맨발로, 다른 한쪽은 버선발로 걸을 때와 별 다를 바 없는데. 그렇다면 혹시!’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휙! 뒤돌아볼 뻔했다. 하지만 곧.
‘지금 내가 남채화를 반갑게 맞이할 이유가 없지. 저 할망구도 마찬가지일 테고.’
용하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래저래 좋을 게 없는 밤이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용하는 걸음을 멈추기 위한 예비 동작으로 속도를 서서히 늦췄다.
‘내 의사를 이 정도 내비쳤으면 대충 알아들었겠지?’
뒷짐을 지며 멈춰 섰다. 뒷짐을 진 이유는 공격 또는 해코지할 의사가 없다는 걸 상대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예상대로 줄곧 뒤따라 걷던 발소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남채화가 방주 궁의 중앙 정원을 제집 드나들 듯해도 된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리 야심한 시각에 말이다.’
생각할수록 궁금증만 쌓였다. 두려움 또한 없지 않았다. 용하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홀로 지키는 어스름한 달을 바라보았다.
‘이쯤 기회를 줬으면 알아서 살길을 찾았겠지?’
용하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바로 뒤에 누군가 서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어떻게든 정면충돌은 피해야 한다.’
가슴을 조이며 완전히 돌아섰을 때였다. 지금까지 용하가 걸어온 그곳은 어둠만 짙었을 뿐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용하의 시선이 방주 궁 쪽으로 이동했다.
‘아니, 저건!’
짙은 어둠 속으로 몸을 뒤뚱거리며 멀어져가는 생명체 하나가 얼핏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해 보이는가 싶더니 곧 사라졌다.
‘진정 남채화였단 말인가?’
용하는 당장에라도 의문의 생명체를 뒤쫓아 그것의 정체를 파헤쳐야 할지, 모른 체하고 그냥 창의진흥원으로 돌아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아니다. 지금 내가 저 할망구를 뒤쫓아가서 잡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창의진흥원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걸음을 내디뎠다.
‘최대한 침착하자. 어딘가에 숨어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용하의 걸음은 눈에 띌 만큼, 아니, 어색해 보일 만큼 태연했다.
창의진흥원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장설이 툇마루 끝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형님!”
“야심한 밤에 어딜 다녀오는 것이냐?”
“그러는 형님은 왜 안 주무시고.”
“방주 궁 쪽에서 사특한 기운이 느껴져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방주 궁 쪽에서요?”
조금 전 의문의 생명체가 방주 궁 쪽으로 사라져가던 광경이 떠올랐다.
“형님, 어차피 잠들기는 그른 것 같고, 담소나 좀 나눴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그러잖아도 서로의 생각을 좀 알아야 할 것 같았는데, 마침 잘 됐구나.”
두 사람은 툇마루 끝에서 어스름한 달빛을 받으며 담소를 나눴다.
그렇게 대화가 무르익어 갈 무렵.
“형님! 혹시 말입니다. 소희 낭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소희 낭자는 만나서 무엇 하려고 그러느냐?”
“만날 수만 있다면 만나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무슨 낯짝으로! 사람이 그렇게 무심하게 떠나고도 할 말이 남았다는 것이냐?”
그런 이유라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형님! 혹시 그때 그 일로 소희 낭자의 가슴에 앙금이 남았을까요?”
“지금 앙금이라 하였느냐?”
용하의 물음에 대답은커녕 되레 물었는데, 그 목소리가 석연찮았다.
“형님, 담소 중에 어찌하여 역정을 내시는 겁니까?”
“네 녀석이 먼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지 않았느냐?”
“소희 낭자의 가슴 속에 그때의 앙금이 남지 않았을까, 그것이 궁금해 물었는데 그게 왜 말 같지도 않다는 겁니까?”
“앙금! 어디 앙금만 남았겠느냐? 차마 내 입으로는.”
더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말을 아꼈을 뿐 무엇인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저 표정, 저 목소리. 그날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게 묻어나지 않는가.’
용하를 경멸하듯 바라보는 장설. 그의 얼굴에 소희 낭자의 얼굴이 겹쳐졌다. 청순하고 앳된 소희.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희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고통에 시달렸다.
“아냐!”
용하는 고개를 내저으며 현실로 돌아왔다.
“아니라니, 무엇이 아니란 것이냐?”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는 용하의 시야에, 여전히 장설이 서 있었다.
“아, 형님.”
다행이었다. 무슨 악몽이라도 꾼 기분이었다. 하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현실 같은 악몽을 꾸다 잠에서 깨어나 안도하는 순간 같다고나 할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 나온 김에 하나만 짚고 넘어갔으면 한다.”
“말씀하십시오.”
“다음 계획은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겠느냐?”
용하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 계획은 변함이 없습니다. 무림검도관(武林劍道館)을 만들 생각입니다.”
“기어이 하겠다고 하니, 나 또한 힘을 보태는 수밖에.”
“감사합니다. 형님은 반드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말이다. 검도(劍道)와 검술(劍術)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검술은 검을 다루기 위해 수련하는 것이고, 검도는 검술을 수련하기 전 준비운동을 하는 것으로 수련의 일부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괜한 우려를 한 게로구나.”
“괜한 우려라면, 이제 제 뜻에 반대하지 않으신단 뜻입니까?”
“검술을 연마하기 위한 준비운동을 가르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느냐. 아니, 오히려 내가 한번 앞장서서 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 싶구나. 그밖에 다른 꿍꿍이는 없는 것이냐?”
“꿍꿍이랄 게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검이 곧 법인 이곳 무림에 검도관을 건립해, 누구나 검을 다뤄 자기를 보호하고 나아가 가족을 보호할 수 있게 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렇게 깊고 좋은 뜻을 가졌다는 게 왜 이제야 느껴지는 것일까?”
말속에서 가시가 매만져지는 듯했다. 마치 입 안에 가시가 혓바닥에 걸리듯 말이다.
“형님!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무림의 열 개 정파가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고 생각하세요. 이를테면 마을회관이나 경로당 같은 거 말입니다.”
“아니, 내가 보기엔 왠지 그곳이 경로당이 아닌, 양산박이 될 것 같구나.”
“양산박!”
몰라서라기보다는 그 말의 의미를 너무 잘 알아서 놀란다는 게 한눈에 엿보였다.
“무림검도관 말이다. 그 말이 내 귀엔 왠지 양산박으로 들리는구나.”
“그럼 형님도 무림검도관을 긍정적으로 보신다는 말씀이죠?”
“그런데 선례가 안 좋아서.”
“선례라면?”
“이곳 중원에 무림맹(武林盟)이 있었다.”
“무림맹(武林盟)?”
“지금은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한때 중원의 각 정파의 고수들이 서로 결투하여 이긴 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연합세력으로 그야말로 양산박이었지.”
“연합세력! 그들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균형을 잡아주었다. 정파가 권세를 누리고 백성이 마음 놓고 상거래를 할 수 있도록.”
“그럼 좋은 일 아닙니까?”
“그런데 말이다. 물이 오래 고여 있으면 썩기 마련이듯, 무림맹 또한 어느 순간 부패하기 시작했어.”
“그 말씀은!”
무엇인가 불현듯 용하의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