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173
173화
“불가능이라 생각했는데, 끝내 자네가 해내는구먼.”
웬일인지 조금은 침통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칭찬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현판식을 앞두고 장설이 용하에게 한 말이다.
“장설 형님. 정파의 장문인들과 머리를 맞대고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형님 말씀대로 한결같이 무림검도관이 사파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습니다.”
“당연한 거 아니겠느냐. 무림검도관이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검객이 아닌, 흑도를 양성하는 곳으로 전락하고 말 게 불을 보듯 뻔한데, 어찌 걱정이 안 되었겠느냐.”
“그래서 처음부터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두 분 형님이 꼭 필요하다고. 저와 두 형님이 수련생을 지도한다면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실은 그래서 자네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걸세. 판세를 보니 어차피 무림검도관 건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 같고, 내가 계속 고집을 부리면 그릇된 사범이 검도관에 들어와 흑도를 양성하지나 않을까 염려돼, 그것을 막는 길은 오직 인공과 내가 자네 곁을 지키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잘 생각하셨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우리 세 사람, 살기 위해 의형제를 맺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똘똘 뭉쳐서 같이 살아야죠.”
세 사람은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
“무림에서 내가 믿을 사람은 용하, 너뿐이라는 거 알지?”
“그러게요. 왜 이렇게 다른 걸까요? 세상이 좀 공평했으면 좋겠습니다.”
“공평하지 않으니까 자네와 나를 묶어놓은 거 아니겠는가.”
“형님과 제가 잘 어우러져 서로 돕는다면 세상은 공평해지는 거네요.”
그때였다. 장설의 눈치를 힐끔 본 인공이 냅다 용하의 귀에다 속삭였다.
“21세기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14세기는 용하 자네가 책임져.”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난 자네만 믿어.”
“뭘 그렇게 속닥거리는 것이냐?”
“아, 형님. 왜 이러십니까. 질투하세요?”
“용하라면 욕심이 좀 나지만, 인공 자네한테서 뭘 바랄 게 있다고.”
“이 형님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셔? 비록 여기 무림에서는 쭈글쭈글해도 다른 세상에서는 이 몸도 잘나가는 사람이라는 걸 아시오.”
“네 녀석이 잘나가는 세상이면 뭐,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면서 세월 낚는 세상 말이냐?”
“그만하십시오. 이렇게 막말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앞으로 여러 정파에서 검도를 배우겠다고 몰려올 텐데,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네, 명심하겠습니다.”
인공과 장설, 두 사람은 일제히 각 잡아 예를 갖췄다.
“방주 궁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용하는 빠른 걸음을 내디뎌 방주 궁으로 향했다.
시원한 바람이 양 볼을 매만지듯 스쳤다.
“실로 아름다운 세상이로다.”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이윽고 방주 궁 앞에 도착했다.
용하는 고개를 돌려 무림검도관을 보았다.
멀리서 바라보았음에도 을씨년스러울 만큼 웅장했다.
“무림에 저보다 큰 건축물은 없을 것이다.”
왠지 뿌듯했다. 벅찬 가슴을 진정시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주 대인. 무림검도관 관장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안으로 모시거라.”
적잖이 반기는 목소리였다.
스르르.
문이 열렸다. 변함없이 새하얀 베일이 용하를 맞이했다.
“들겠습니다.”
다시 한번 예를 갖췄다.
용하가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문이 닫혔다.
‘뒤에서 문이 닫힌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던가.’
왠지 구속감이 느껴졌다. 새삼스러웠다. 이제 좀 드나들기 편해졌나 했는데 말이다.
“앉으시오.”
“네, 그리하겠습니다.”
용하가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검도관을 둘러보았소?”
“오늘은 일부만 보았습니다. 다 둘러보려면 며칠 걸릴 것 같습니다.”
“하긴 그렇겠지요. 건축물 규모도 그렇지만 꼼꼼히 살펴보시려면 말입니다.”
“업무 중에는 말씀 놓으십시오. 불편합니다.”
“아, 불편하셨소? 대견해서 하는 말이니 부담 갖지 마시오. 그동안 무림의 정파가 지금처럼 단합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소. 무림검도관은 개방이 무림의 중심이라는 상징이 아니겠소?”
“외람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리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왜 안된다는 것이오? 앞으로 무림 요소요소에서, 많은 사람이 검도관으로 모여들게 불을 보듯 뻔하지 않소. 내가 생각하는 무림검도관은 검을 수련하는 장소이자 사교의 공간이오.”
“뜻은 좋으나 사람이 모이다 보면 음모 또한 뒤따르는 법. 개방에서는 그것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말씀드리는데, 무림검도관에서는 그곳에서 지켜야 할 예법과 도리를 따로 마련할 생각입니다. 방주 대인께서도 무림검도관에서는 그곳의 예법을 따르셔야 합니다. 물론 우리뿐 아니라 무림의 정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개방은 내가 허락하면 되는 것이니 별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하는데, 다른 정파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겠소?”
“그들도 환영할 것입니다.”
“환영한다? 어찌하여 그리 생각하는 것이오?”
“제가 처음 무림검도관을 거론했을 때 말입니다. 제 말을 듣는 사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흑도를 양성하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저를 보는 눈이 곱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무림 한복판에 검도관이 저리 웅장하게 우뚝 서지 않았습니까?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그들도 느낀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안을 환영할 수밖에요.”
“애쓰셨소. 생각할수록 대견합니다.”
방주는 감탄사를 흘렸다.
“무림검도관에서 지켜야 할 예법을 관장하는 부서를 만들어야 합니다.”
“예법을 관장하는 부서라. 물론 그것도 있어야겠지요.”
“무림검도관 산하에 두어 입법과 사법 그리고 외교 기능을 갖게 할 것입니다.”
“당연히 그리해야겠습니다. 그래야 통제력을 갖게 되지 않겠소.”
“그리고 하나 더 허락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말씀해 보시오.”
“방주 대인의 거처를 무림검도관으로 옮기는 걸 검토하고 있습니다.”
“거처를 옮기겠다니,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오?”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를 내었다.
“창의진흥원과 방주 궁의 경호 문제 때문에 그러는 것이니, 언짢으셔도 제 말에 따르셔야 합니다. 지금 호위무사 둘이 무림검도관의 사범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래서 창의진흥원과 방주 궁의 안전이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림검도관 관장께서는 개방을 허술하게 보는 것이오?”
“그럴 리가요.”
“그런데 어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오. 개방은 관장이 오기 전부터 존재해 왔소. 안전하게 말이오. 나는 개방의 무사들 전투력을 믿는 사람이오.”
방주의 고집은 완강했다. 더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자.’
“알겠습니다. 제가 괜한 일로 방주 대인의 심기를 건드렸나 봅니다.”
카랑한 소리가 심장을 짓눌렀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단 생각할 시간을 주자. 모든 걸 빼앗겼다는 상실감도 적지 않겠지.’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조만간 현판식이 있을 것이니 참석해 주십시오.”
용하는 서둘러 방주 궁을 빠져나왔다.
무림검도관으로 온 용하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인공과 장설에게 털어놓았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 복병이 숨어 있었네그려.”
용하의 말을 들은 인공은 긴 한숨을 토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어떡하다니요. 방주 궁의 안전이 우선이오. 개방이 없는 무림검도관은 의미가 없다는 걸 모르시오? 방주 궁은 우리 의형제가 수호합니다.”
결의에 찬 목소리였다.
“그 말씀은 비공식 호위를 하자는 겁니까?”
장설이 물었다.
“당분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소.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니, 이의 없이 따라주시오.”
“달랑 셋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인공이 입엣말로 구시렁거리자, 장설의 주먹이 전광석화처럼 그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아이고, 이 노인네가 사람 잡네!”
바닥에 데굴데굴 구리는 인공의 엄살은 도를 넘었다. 그 광경을 보다 못한 용하가 언성을 높였다.
“왜들 이러십니까? 여기는 무림검도관입니다. 예를 중시하고 모범을 보여야 할 자들이 무슨 짓들을 하는 것이오?”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인공과 장설은 용하 앞에 무릎을 조아렸다.
“이래서는 아니 됩니다. 일이 매끄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문란해진다는 건 용서받을 수 없는 짓입니다.”
“용서하시오. 우리 두 노인이 잠깐 정신이 나갔던 모양입니다.”
장설의 말에 옆에 있던 인공은 두 번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일어나십시오. 보기 민망합니다.”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형님들은 제가 지금 용서할 처지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힘없는 목소리가 애처로울 따름이었다.
“아닙니다.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시작부터 이렇게 삐걱거리면 어찌합니까? 방주 대인은 잠시 잊도록 하겠습니다. 무림검도관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날, 대인께서 스스로 우리의 호위를 받고자 청하겠지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방주 대인 스스로 무림검도관으로 들어와야지, 누가 강요해서 될 일은 아닌 듯싶습니다.”
“일몰 후 다시 동이 트기까지는 제가 방주 대인을 호위하겠습니다. 낮에는 두 분이 교대로 대인의 안전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인공과 장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오늘 같은 일 없도록 하십시오. 아직 현판이 걸리기 전이니 그나마 다행이지, 누가 봤으면 어찌할 뻔했습니까?”
그날 밤 용하는 호위를 핑계 삼아 방주 대인 아니, 소희를 만났다.
“낮에 언성을 높여서 죄송합니다.”
다시 다소곳해진 목소리로 소희가 말했다.
“별말을 다 하시오. 내가 성급했소.”
“너그럽게 헤아려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다릴 것이니 필요하면 언제든지 마음 바뀌면 얘기하시오.”
“얼굴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더는 소희 낭자의 안전에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무림검도관이 자리를 잡으면 두 분 사범에게 맡기고 일전에 약속했던 일을 할 것이오.”
“일전에 약속했던 일이라면.”
“낭자를 예전의 모습으로 돌려놓을 것이오. 에베레스트에서 사고당하기 전으로 말이오.”
“마음만으로도 고맙습니다. 하지만.”
소희는 울먹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용두방주께서 소희 낭자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는지 잘 알고 있소. 그런 분께서 안 해본 게 없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낭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것이오.”
“용서를 구하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날 용하 공(公)께서 잘못한 건 없었습니다. 소녀가 무모하게 덤빈 게 화근이었죠.”
“아니었소. 내가 미리 용두방주께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했어야 했소.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게 도와달라고 말이오.”
용하의 말에 소희는 웬일인지 흐느끼는 기색이었다. 그리고는.
“손 한번 잡아봐도 되겠습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청했다.
“내가 다시 묻겠소. 낭자, 손 한번 잡아도 되겠소?”
“얼마든지요.”
소희는 슬그머니 용하에게 손을 맡기고는 고개를 돌렸다.
“고사리 같던 손이 많이 커졌구려.”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열 살 때의 제 손을?”
“잊을 리가 있겠소. 생생하게 기억한다오. 고사리 같은 손이 어찌나 야무지던지.”
“천둥벌거숭이 같았던 그때를 기억하신다니, 부끄럽습니다.”
“처음 소희 낭자를 봤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소.”
“제가 좀 유별나긴 했었나 봅니다.”
“무엇이든 적극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용하는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닫았다.
“그때는 아버지 용두방주께서 제 열렬한 후원자였으니, 못 이룰 게 없었습니다.”
“그 자리를 내가 대신할 것이니, 예전처럼 자신감을 되찾으시오.”
“너무 오래 은둔 생활을 했으니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내게 시간을 주시오. 반드시 소희 낭자를 예전으로 돌려놓겠소.”
소희는 용하의 품에 얼굴을 묻었고, 그 광경을 몰래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