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개방(丐幇)에 검도관을 알리는 현판이 걸렸다.
그날의 분위기는 감동의 도가니였다. 용하는 형형한 눈으로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그 뒤로 성큼 다가서는 인공과 장설의 눈에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김 관장, 그간 고생 많으셨소.”
“별말씀을요. 다, 두 분 사범님 덕분입니다.”
용하는 고개를 반쯤 돌려 인공과 장설을 바라보았다.
인공과 장설.
인공은 대리운전 나가서 만난 고객이다. 사패산 터널에서 정체 모를 광채에 휘감겨 용하와 함께 무림으로 차원 이동했다. 그리고 장설은 무림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만난 노화자다.
두 사람의 사범에게 향했던 시선을 다시 현판 쪽으로 옮기는 용하의 눈에 감회가 새롭다.
‘이룰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현판이 걸리다니.’
용하는 하염없이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회상하듯 중얼거렸다.
“새삼스럽게 그날이 떠오릅니다.”
인공의 그의 말을 받았다.
“그날이라면, 우리 처음 만난 날 말이냐?”
“정말이지 까마득하게만 여겨집니다.”
중얼거리는 게 아니었다.
용하는 지긋하게 뜬 눈으로 인공을 바라보았다.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 * *
“자네, 운전 얼마나 했어?”
‘운전 얼마나 했냐고? 뭐야, 내 운전실력이 형편없다는 뜻이잖아.’
보란 듯 밟아주고 싶었다. 심장이 쪼그라들고 맥박이 불규칙해지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고객 차량을 안전하게 운전하는 게 대리기사의 덕목 아닌가.
“속도 좀 내지. 혹시 장롱면허야?”
앞이 안 보이는 걸 어쩌라고. 괜히 오기가 받쳤다. 그때였다. 새하얗던 전면 차창에 거뭇한 둥근 반원이 그려진다. 사패산 터널 입구다. 아시아 최장 광폭 터널.
터널 안으로 들어서자 안개가 걷힌 듯 투명했다. 가속기 위에 올려진 발이 조금 전 오기에 대한 반응을 보였다.
꾹― 순식간에 게이지가 100을 넘겼다.
엔진에서 굉음이 들렸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가속기를 밟은 발은 좀처럼 속도를 늦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120, 140, 160…….
어느덧 속도 게이지가 200을 넘겼을 때였다. 작은 광채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작았던 광채는 어느 순간 세상을 집어삼킬 듯 확대되더니 마침내 시야를 가렸다.
―앗! 대체 뭐지?
바로 그 순간 시간이 멈췄다. 아니 세상이 멈춰버렸다.
하나 그것도 잠시, 멈춘 줄 알았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있어선 안 될 일이지만 이번에는 거꾸로 흘렀다. 그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두 사람이 다시 마주 본 곳은 차 안도, 터널 속도 아닌, 음산한 산속이었다.
사방은 고색창연했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현대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태초에 하늘이 열렸을 때를 연상시킬 만큼 경이로웠다.
“대체 운전을 어떻게 한 게야?”
또 시작이다. 지금 운전실력 따져서 무엇에 쓰겠다고. 어딘지도 모를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궁리를 해야 하지 않은가.
“사패산 터널에서 갑자기 산속으로 들어왔으니 사패산이겠지요.”
사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위축되었다.
“이보시오, 대리기사 양반! 당신 눈에는 이곳이 사패산으로 보인단 말이오?”
“그럼 어디겠어요. 마지막 본 장면이 사패산 터널이었으니, 사패산이겠지요.”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데 은근 화가 치밀었다.
“그런데 왜 자꾸 나한테 그딴 걸 물어요? 난 그냥 술 취한 당신을 대신해서 운전해 주는 게 임무란 말입니다.”
“아니, 아니! 안전하게 나를 집에 데려다주는 게 대리기사의 임무잖소?”
썩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할 말은 없었지만 지금 상대의 기세는 책임지라 뭐, 이런 느낌이다.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 그랬다간 대리비는커녕 재수 없으면, 제기랄! 더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게 왜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운전하는 사람 정신 사납게 집중력을 흩뜨리냐고요. 생각할수록 짜증 나네.”
투덜거리는 것으로 선수를 치며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상대는 의연하다. 뭐야,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지? 표정은 또 왜 저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잖아. 괜히 불안해진다.
“알겠소,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 돌아갈 궁리를 해봅시다.”
“아뇨, 전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일종의 자기방어였다. 태연한 척해야 상대가 몸이 달아오를 테고, 그래야 자기에게 떠넘겨질 책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게요?”
“말씀드렸잖아요. 21세기로 돌아간다 한들 그곳에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라고 뭐, 딱히 돌아갈 곳이 있고 할 일이 있는 줄 아느냐? 포천에 발을 내디디는 순간 땡추 왔다고 사람들 손가락질이 빗발칠게.”
인공 또한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 * *
“인공 형님. 우리가 여기까지 함께 올 거라 상상이나 했습니까?”
기나긴 회상을 떨치고 현실로 돌아온 용하가 인공을 향해 뜬금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관장님. 저는 말입니다. 지금도 그날 술 마신 걸 후회하고 있습니다.”
인공의 말에 장설이 조금은 가볍게 거들었다.
“인공 사범은 항상 그 술이 말썽 아니었소?”
“에이, 형님도 참. 아니지! 검도관이니 동급이잖아?”
바로 말을 바로 잡았다.
“에이, 장설 사범도 참. 내가 술 마시고 주사 한번 부리는 거 본 적 있소?”
“그 말씀은 저와 함께 가는 이 길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뜻입니까?”
“아니, 인석이 어디서 반말이야, 반말이! 무림에 검도관이 생겼다고 세상이 달라진다더냐? 혹여라도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말아라. 그런 생각이 팽팽하면 무림검도관이 곧 무림맹이 되는 것이다.”
장설의 말에 인공이 또 무엇인가 토를 달려고 할 때였다. 분위기가 과열되자 용하가 중재에 나섰다.
“그만들 하십시오. 적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사파든 흑도든, 우리끼리 지금처럼 옥신각신한다면 무림검도관은 그렇게 되고 말 것입니다.”
“두말하면 입 아프죠.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저 형님만 모른다니까.”
인공이 구시렁거리며 주책을 떨었다. 장설은 당장에라도 인공의 정수리에 주먹을 내리꽂고 싶었지만, 용하의 얼굴을 봐서 울화를 삼켰다.
“인공 형님은 지금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봅니다.”
용하의 말에 인공이 펄쩍 뛰었다.
“아니, 왜 갑자기 화살이 제 쪽으로 날아옵니까? 만족스럽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짊어져야 할 짐을 생각하면 적잖이 부담스럽습니다.”
“무림의 새로운 전기가 될 것입니다. 부담을 짊어지고서라도 묵묵히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런 게 나는 부담스럽다니까.”
인공의 징징거리는 말투가 귀에 거슬렸던지, 장설이 격노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말이 짧구나! 어찌하여 매 순간 품위를 잃는 것이냐?”
장설이 꾸짖자 인공은 찍소리도 못 내었다.
“용기를 잃지 말라. 내가 곁에 늘 함께 있지 않으냐.”
“함께 있으면 뭐 합니까? 형님은 자기 볼일만 보시고, 심심하면 꾸짖기나 하시면서.”
“네 녀석 눈에는 어찌 보였을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다 내리사랑이니라.”
내리사랑이란 말에, 인공은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형님들, 불필요한 말로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아직 갈 길이 멀어요.”
갈 길이 멀다는 말에 인공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인공의 심경은 그냥 이쯤에서 만족하고 지금의 풍요로움을 향유하고 싶었다. 반면 용하는 잠시라도 멈춰있으면 불안해서 못 견디는 걸 어찌하란 말인가.
“목표가 원대한 것도 좋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가랑이 찢어진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가랑이 찢어질 정도면 행복하죠.”
“에이, 그때 그냥 21세기에 남는 건데.”
인공은 들릴 듯 말 듯 구시렁거렸다. 이제 좀 살 만한가 했는데, 앞으로도 고생을 더 해야 한다니,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인공 형님. 우리 의형제의 앞날에 어딘가에 안주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앞으로도 고생은 계속될 것이고, 고생한 만큼 권력과 돈을 갖게 될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장설이 한마디 거들었다.
“나는 권력에 만족한다. 인공 자네도 권력이 됐든 돈이 됐든 선택해.”
“형님! 저는 말입니다. 어차피 하는 고생, 둘 다 갖겠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구나. 고생은 하기 싫은데 돈과 권력은 갖고 싶다니.”
“누가 고생을 안 하겠다고 했습니까?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겠다는 말입니다.”
“그야, 네 녀석이 알아서 할 일! 앞으로 고생을 피해갈 생각일랑 추호도 하지 말아라.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볼 것이다.”
장설의 빈정거림에, 인공은 그저 주억거렸을 뿐 말이 없었다.
“이 시간 이후의 일정이 어찌 되십니까?”
용하의 말에 인공은 이미 알아차리고 입꼬리를 꼼지락거렸다. 반면 장설은 미리 걱정부터 하는 기색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방주의 궁과 창의진흥원을 호위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옆에 듣고 있던 인공이 곱지 않은 눈으로 장설을 흘깃거렸다.
“형님,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마십시오. 무림검도관 관장 김용하가 오늘의 일정을 물었을 땐 제게도 그만한 복안이 있지 않겠습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인공이 경망스럽게 거들었다.
“맞아. 무림검도관 관장님께서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했겠어. 그런데 복안이란 게 뭡니까?”
“조금 있으면 개방의 무사들이 일제히 몰려와 검도관 앞 야외 수련장에 도열할 것입니다.”
인공과 장설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장설이 물었다.
“개방의 무사들이 왜 검도관으로 모입니까?”
“그야 저도 모르는 일이죠. 방주 대인께서 그리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왜요? 방주 대인께서 왜 개방의 무사들을 전부 여기로 집합시켰느냔 말입니다. 그들이 여기 몰려온 사이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시려고.”
“그런 염려는 안 하셔도 됩니다. 당직 무사들은 변동 없이 자기가 맡은 구역을 호위하는 데 빈틈이 없을 겁니다. 방주 대인께서는 퇴근한 무사들을 전원 불러들여 우리 셋이 호위해야 할 구역을 촘촘하게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럼 우리 셋은 뭐합니까?”
“우리 셋은 그동안 켜켜이 쌓인 앙금을 씻어내야죠.”
“앙금! 무슨 앙금? 앙금을 씻어낸다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고요?”
대체 뭘 두고 앙금이라고 말하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장설이 얼핏 고개를 갸웃거리자, 인공은 혀를 날름 내밀었다.
인공은 용하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입이 귀에 가서 걸려있었다.
“그동안 고생들 많으셨으니 회포라도 풀자는 말씀입니다.”
“회포! 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저도 사실, 오늘 인공이란 녀석이 하는 짓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조만간 자리 한번 만들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관장님 안목이 저보다 한 수 빨랐습니다.”
“사실 무림검도관 건립이 시작된 이후, 우리 셋은 누구 하나 제대로 긴장 한번 풀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니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사실 힘들 때면 내심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셨을 겁니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오늘 모두 풀어버립시다. 방주 대인께서도 술 시중들 하녀들을 아낌없이 지원하시겠다고 했으니, 괜히 나중에 후회하는 일 없이 마음껏 즐기십시오. 곧 방주 궁의 하녀들도 올 것입니다.”
그제야 장설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방주 궁의 하녀들이라는 말에 인공은 벌써 온몸을 배배 꼬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용하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