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21
21화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서산으로 해가 기울기 시작했을 무렵, 용하의 입에서 비장하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저잣거리 시작과 끝을 반복해서 오가며 서성거렸던지, 이제 아예 무슨 이유로 이 짓을 하며 시간을 소일하게 됐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릴 즈음이었다. 용하의 말이라면 평소 귓등으로 듣던 인공이 솔깃해서 물었다.
“뭔데? 어서 말해 봐. 좋은 생각이라면 혹시…….”
용하의 말에 관심을 보이는 인공과 장설. 두 사람이 보이는 반응은 같았으나 표출되는 건 완전히 달랐다. 한 사람은 보기 민망할 만큼 촐싹거렸고, 다른 한 사람은 묵묵히 용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였을까. 물어본 사람은 인공인데, 용하는 장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가 어떤 아이를 좀 아는데요. 그 아이를 통하면 남채화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용하의 대답에 장설도 인공도, 웬일인지 그들의 표정에 별 기대감이 없어 보인다.
‘뭐야, 표정들이 왜 저래? 내가 뭐, 말실수라도 한 거야? 아님. 내가, 저들에게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큼큼!
용하는 두어 차례 헛기침을 했다. 자기가 한 말을 다시 한번 피력하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전환점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아이, 보통 아이가 아닙니다.”
웬일인지 용하의 목소리가 끓어올랐다. 간절하다 못해 절규에 가까웠다. 사실 어린아이를 통해, 반나절을 찾아 헤매도 만날 수 없었던 남채화를 찾겠다는 말이 얼토당토않게 들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지금 용하가 말하는 어린아이가 정보팔이 소녀, 소희라면.
“이 저잣거리에서 정보를 취급하는 아이를 알고 있습니다.”
“정보를 취급하는 아이?”
장설과 인공이 입을 모아 한 물음에.
“네.”
용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이것부터 설명해 보게. 자네가 그 아이를 안다는 것과 우리가 남채화를 만나야 한다는 게 무슨 상관인 겐가? 둘 사이에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다면 믿어 주겠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그 아이는 정보를 취급한다고 했습니다. 14세기 무림에서 정보라고 해 봤자 얼마나 대단한 게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기대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소린 게야? 14세기 무림은 뭐고, 그래서 기대할 바를 없다는 건.”
“아, 제 말은… 에이,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현재로선 그 아이가 정보를 취급한다고 하니, 그 아이에게 남채화를 수소문한다면 혹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중요하지.”
조금 전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웬일인지 말꼬리를 흐렸다.
용하의 말실수를 꾸짖기라도 하듯 쌍심지를 켜고 그를 직시하는 인공의 미간이 간헐적으로 좁아졌다.
반면 장설은 용하의 말에 호응하는 기색이었다.
“음, 그럴듯하구나. 허나! 그 아이와 우리가 뭔가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아직은 뭐가 다른지 눈에 띄게 다른 게 보이질 않는구나. 용하, 자네는 그 아이의 정보력과 우리가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딱히 꼬집어 무엇이다, 라고 잘라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저잣거리에선 그 아이를 제법 인정해 주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니 뭐가 달라도 좀 다르지 않을까요?”
“형님, 그건 이 녀석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보다는 그 아이가 이곳 무림의 사람들을 많이 상대했거나, 그동안 많은 사람을 봐 왔을 거 아닙니까? 게다가 우리 찾는 남채화라는 자. 그 자체가 워낙 독특하잖아요. 그러니까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고요.”
인공의 말에 얼핏 흔들리는 기색인 장설.
“그리 생각하느냐?”
“네, 형님.”
“좋다. 그럼 그 아이는 어딜 가면 만날 수 있느냐?”
장설의 물음에 그는 물론이고 인공도 용하를 직시했다. 용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몰라?”
장설과 인공, 두 사람 입에서 동시에 새 나온 말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이제 남은 건 한숨밖에 없었지만, 그조차도 사치였다.
장설은 긴 한숨으로 말했다.
“용하야, 내 생각을 말하겠다. 나는 말이다, 그 아이를 찾는 시간에 남채화를 찾는 데 집중하는 게 좋을 듯싶구나.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느 쪽이 됐든, 둘 중에 한 사람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무슨 방법이 나오겠죠.”
“나 역시 네 녀석 말에 동의한다. 이왕이면 남채화를 먼저 찾으면 좋겠지만.”
장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어!
무엇을 보고 놀랐는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용하가 말했다.
“그, 그 아이다!”
“그 아이라니, 누구?”
성가시다는 듯 건성으로 반응을 보이던 인공이 별안간 경악해서 물었다.
“정보팔이?”
인공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야에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어린아이 하나가 빠르게 이동해 가는 게 보였다.
“저 아이가 네 녀석이 말한 그 아이인 게냐?”
“네, 틀림없습니다.”
“그럼 뭐 하고 있어. 빨리 따라가지 않고.”
인공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보팔이 소녀를 향해 달려 나갔다. 용하 또한 뒤늦게 인공의 뒤를 빠르게 종종걸음쳤다.
* * *
얼마 후, 한 주막에서 네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남채화를 만나게 해 줄 수 있겠느냐?”
이것을 묻는 장설의 표정에 사뭇 긴장감이 번졌다. 소희는 대답을 미루고 용하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흘깃 그 광경을 본 장설이 말했다.
“용하, 자네가 물어보게.”
용하는 무릎을 낮춰 소희와 눈높이를 같게 했다. 그런 다음 다정한 음색으로 물었다. 용하의 목소리에 근엄함이라고는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아저씨가 남채화를 꼭 좀 만나야 하는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소희 네가 남채화를 만나게 해 줄 수 있겠니?”
소희는 대답은 하지 않고 용하를 말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용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고맙구나. 어디로 가면 남채화를 만날 수 있겠니?”
이번에도 소희는 말끄러미 바라보는가 싶더니, 곧 입을 뗐다.
“그런데 남채화 아줌마는 왜 찾으세요?”
“오, 그게 말이다…….”
용하는 일순 망설였지만, 곧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저씨가 개방이라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그곳에 가려면 그 아줌마 도움을 좀 받아야 할 것 같아서.”
“아, 그래요? 그런데 개방엔 왜 가시려는 거죠? 지난번엔 설산으로 가야 한다고 하더니.”
그때였다.
―크하아!
괴성과 함께 산적처럼 생긴 중년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데 남의 소중한 여식에게 함부로 말을 거는 것이냐?”
목청을 긁듯 탁하고 더러운 목소리였다.
‘여식? 그럼 저 아이가 저 인간의 딸이란 말이야?’
용하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사내 쪽을 보았다. 하지만 그 위세가 너무나도 당당해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장설은, 안 그런 척하면서 사내를 흘깃 바라보았다.
‘어, 저 눈빛! 저자와 내가 일면식이라도 있었던가?’
바로 그 순간 사내는 소희를 덥석 들어 올려 품에 안고는 위풍당당 멀어져 갔다.
지그시 뜬 눈으로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장설이 말했다.
“이보게, 인공!”
“네, 형님.”
“저자를 본 적이 있는가?”
장설의 말에 인공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대답했다.
“아뇨! 그런데 왜요?”
“아니다.”
어리둥절한 인공과는 달리 장설은 처연했다.
“이제 어떡하죠?”
“괘념치 말거라. 어차피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는 일이지 않느냐?”
용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때였다.
“멀쩡한 놈들이 대낮부터 주막에들 모여서 무슨 작당질이야?”
주막 입구 쪽에서 욕쟁이 할머니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은 일제히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남채화였다.
푸른색 도포에, 한쪽 발엔 버선을 신고 다른 발은 맨발.
남채화를 보는 용하와 인공 그리고 장설.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겠으나, 반색하는 그들의 얼굴에서 청량감이 느껴졌다.
“천운이로구나!”
장설의 말에 남채화는 그를 짐짓 흘기며 야멸차게 말했다.
“천운은 지랄!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어이없는 순간이었지만, 세 사람은 그저 실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넋 빠진 놈들처럼 웃지만 말고, 국밥이나 한 그릇 사 줘 봐.”
“어이쿠, 어르신! 어디 국밥뿐이겠습니까? 어서 이리 앉으십시오.”
인공이 남채화를 극진히 대하며 평상에 앉혔다.
“주모! 여기 국밥 한 그릇 맛있게 말아 오시오.”
* * *
한 식경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용하와 인공 그리고 장설, 세 사람은 남채화를 따라 척박한 광야를 걷고 있었다.
앞서가는 남채화와는 다소 거리를 둔 장설이 나직하게 말했다.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타이밍이 절묘하지 않은가.”
처연하게 자문하는 장설의 말에, 인공은 토끼 눈을 뜨고 물었다.
“네? 그게 다 무슨 말씀입니까?”
“정보팔이라는 아이에게 남채화를 수소문하려는 순간, 그 아이의 아비라는 자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아이를 데려가지를 않나, 그자가 사라지자마자 그토록 찾아 헤맬 때는 보이지 않던 남채화가 제 발로 찾아오지를 않나…….”
장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어, 듣고 보니 좀 이상하네요. 어떻게 그렇게 짜 맞춘 듯 일이 척척 맞아떨어진 거죠?”
“두 분 어른, 배부른 소리 그만들 하세요. 지금 그런 거 따질 겨를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저 앞에 가는 할망구가 진짜 남채화이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진짜 남채화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이제 정말 모르겠어요. 어떤 게 진실이고, 어떤 게 거짓인지.”
웬일인지 용하의 말은, 그동안 무림에서 경험한 자신의 소회를 밝히는 듯했다.
“인공, 자네가 가서 좀 알아보게.”
“네! 제가요? 제가 어떻게…….”
“자네 잘하는 거 있지 않은가?”
내가 잘하는 거!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인공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화류계의 꽃! 수작 한번 부려 보겠습니다.”
인공은 득의양양 걸음을 내디뎌 남채화 곁으로 다가갔다. 흘긋 바라보는 남채화에게 누런 이를 드러내며 말을 건넸다.
“산길로 갈 것이오, 물길로 갈 것이오.”
인공은 바위산으로 갈 것인지, 숲길로 갈 것인지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남채화의 대답을 기다렸다.
“산길은 무엇이고, 물길은 또 무엇이오?”
남채화가 되묻자 인공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번졌다.
‘앗싸! 반은 성공이다. 남채화가 맞을 확률, 50%.’
“제가 아무것도 몰라서 그러는 것이니, 말씀을 좀 해 주시면 안 되겠소?”
“당신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급한 것 없는 사람이니, 숲길로 갈 것이외다.”
남채화의 대답에, 그녀가 남채화라고 확신한 인공은, 입꼬리가 귀에 가서 걸렸다.
‘앗싸싸! 분명 남채화다.’
남채화는 인공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왜, 불만이야?”
“아뇨, 남채화 어른 편하실 대로 하시오. 저는 숲길로 갈 것이라고 보고 좀 하겠습니다.”
인공은 꼬리를 내리는 척하며 슬쩍 뒤로 빠져, 장설이 쪽으로 종종걸음치더니 장설의 귀에다 은밀하게 말했다.
“형님, 남채화가 확실합니다.”
“그것을 어찌 장담하는 게냐?”
“제가 슬쩍 떠봤죠. 개방으로 가는 길은 남채화들밖에 모른다면서요. 그래서 길을 가지고 장난을 좀 쳐 봤는데, 안 걸려들더라고요. 홋.”
“무슨 장난을 쳤기에 그리 흥미진진해서 호들갑을 떠는 것이냐?”
“홋, 산길로 갈 것이냐, 물길로 갈 것이냐, 그걸 물었더니, 자기는 바쁠 게 없으니 숲길로 간답니다.”
“오, 그래?”
모처럼 인공의 말에 신뢰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장설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인공은 발끈했다.
“뭐, 굼, 굼벵이가 뭐 어쨌다고요?”
인공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반면 장설은 의연하게 허허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거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구나. 좋은 뜻으로 한 말이니, 너무 괘념치 말거라.”
장설의 말에 인공은 주억거리며 용하 쪽으로 붙었다.
“용하, 너는 개방에 가면 제일 먼저 무엇부터 할 것이냐?”
“개방에 세상을 떠도는 온갖 정보들이 모여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혹시 21세기로 돌아갈 방도가 없나, 그것부터 수소문해 볼 것입니다.”
“아직도 21세기에 미련이 있는 모양이구나.”
“아니, 무슨 미련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이 모든 건 제가 벌인 일입니다. 제가 벌여 놓은 일 때문에 힘들어할 사람을 생각하니, 잠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저는 말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벌인 일, 내 손으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어떤 순간은 절규하듯, 어떤 순간은 야무지게 말하는 김용하. 그의 눈빛은 예의 결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