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22
22화
“내가 모르는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것이냐?”
저만치 앞장서 걷고 있던 장설이 한 말에 용하와 인공은 찔끔한 기색이었다.
“그러게 좀 작게 말하라니까.”
인공이 두 눈을 부라리며 입 모양으로 한 말이었다.
그의 말에 용하 또한 입 모양으로 대항했다.
“제가 뭘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인공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용하를 꾸짖었다.
“인석아, 그러다 우리 정체가 들통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용하 역시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인공에게 맞섰다.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언제 크게 말하던가요? 그리고 말입니다. 지금 장설 어른과 제 거리가, 제가 좀 크게 말했다 해도 들릴 만한 거리인가요? 더군다나 나이가 칠순이 넘은 노인이 말입니다.”
듣고 보니 용하의 말이 옳았다.
“그러게, 말이다. 개가 아니고서야 우리가 하는 얘기를 어떻게 엿들었겠느냐?”
인공이 주책없이 푼수를 떨자, 장설의 노기는 극에 달했다.
“어허, 이것들이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뭘 그리 수군대는 것이냐? 다시 한번 묻겠다. 아미파 하수인들을 피해 개방으로 숨어들어 가려는 것 말고 또,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것이냐?”
용하와 인공은 한마디 대답도 못 한 채, 놀란 눈으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급기야 장설이 분을 참지 못해 걸음을 멈췄다. 한낱 노인에 불과한 그가 걸음을 멈췄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용하와 인공은 덥석 겁을 먹고는 장설을 따라 걸음을 멈췄다.
겁에 질린 용하와 인공은 슬금슬금 뒷걸음치더니 마침내 등을 돌렸다.
노기충천(怒氣衝天)한 장설이 피를 토할 듯 소리쳤다.
“어허, 이것들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어서 이리 오지 못할까.”
용하와 인공은 서로의 등을 떠밀며 쭈뼛쭈뼛 거리를 좁혀 갔다. 그 꼴은 장설의 노기를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이윽고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곳까지 갔을 때였다. 장설은 전광석화와도 같이 두 사람의 덜미를 잡아채 메다꽂을 기세로 둘러맸다.
저만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앞서가던 남채화가 한달음에 달려와 장설을 말렸다.
“아니, 그 나이 먹도록 대체 무엇을 하며 살았소? 도저히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것이오?”
“뭣이라, 감정 조절?”
장설은 핏발이 선 눈을 허옇게 치켜떴다. 반면 남채화는 마치 학생을 가르치듯 의연하게 입을 뗐다.
“흠, 이 정도쯤이야. 이런 상황을 대할 때 필요한 감정 조절쯤은 걸음마 떼면서 함께 배웠소. 원래 개방이란 그런 곳이오. 단순히 거지 집단이 아니란 뜻이오.”
감정 조절을 걸음마 떼면서 배웠다? 흠, 장설은 남채화의 말이 사실인지 궁금해졌다.
‘음, 이걸 어떻게 확인하지? 말로 하면 다 받아넘길 테고, 그럼 이건 어때?’
고심하던 장설은 짓궂게도 남채화의 가슴에 기습적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으악! 하고 소스라치게 놀랄 것으로 생각했는데, 뜻밖에 남채화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덤덤했다.
‘엥, 뭐야! 이 할망구가 감각이 없는 거야, 나이가 들어서 못 느끼는 거야?’
장설이 발칙한 생각을 하는 사이, 남채화는 다른 꿍꿍이를 모색했다.
‘어, 요놈 좀 봐라! 가장 치사한 방법으로 날 능멸하려 드네. 그렇다면…….’
남채화는 인정사정없이 장설의 사타구니를 향해 발을 쭉 뻗었다. 남채화의 발에 급소를 정확히 맞은 장설은 그 자리에 쓰러져 데굴데굴 굴렀다.
“어이쿠, 나 죽네. 누가 저 할망구 좀 말려 주시오!”
남채화가 딱히 2차 가격을 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는데, 장설은 당혹스럽거나 혹은 겁에 질려 말려 달라고 애원하며 아우성쳤다.
그런 장설에게 남채화는 단호하게 일침을 놓았다.
“항상 침착하시오! 그것이 감정 조절의 시작이오. 갑작스러운 고통이 와도 의연하게 견딜 수 있는…….”
보통 사람이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남채화의 말에 세 사람은 돌연 숙연해졌다.
* * *
어느덧 개방을 알리는 경계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부지런히 남채화를 뒤따르던 용하와 인공 그리고 장설, 세 사람의 표정에 청량감이 돌았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남채화를 호위한다.”
장설의 목소리는 단호할 뿐 아니라, 결연하기까지 했다. 그런 장설의 말을 용하와 인공은 누구보다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잰걸음으로 남채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남채화를 중심으로 밀집방사형의 작은 대열을 만들었다.
“뭣들 하는 짓이오?”
남채화는 웬일인지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몸을 움츠리며 장설을 노려보았다.
“아아, 미안하오. 아까 그 일 때문에 그러시는구랴.”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장설도 조금 전 남채화에게 제대로 얻어맞은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실은 저희 세 사람이 이곳에서 안 좋은 기억이 좀 있어, 여기서부터는 그대를 호위하기로 했소.”
“뭐, 호위?”
“그렇소.”
“뭘, 어떻게, 어떻게 호위하겠다는 것이오?”
“그야 뭐, 안전하게, 잘, 참변 당하는 일 없이… 뭐, 그렇게 해야겠죠.”
“웃기는 소리 집어치우고, 각자 자기 몸이나 잘 건사하시오.”
과연 남채화다웠다. 비록 헐벗고 굶주려도 늘 당당하고 용기를 잃지 않는.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설은 쉽게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무슨 이유에서인지 무릎까지 꿇고 매달리며 통사정했다.
“제발 부탁이오. 우리가 그대를 호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오.”
“싫다는데, 왜 자꾸 고집을 부리시는 것이오.”
“제발…….”
장설은 더욱 조아리며 애원했다. 그러자 남채화는 조금 전과는 달리, 다소 누그러져서 타일렀다.
“이유를 말해 보시오. 대체 그 어려운 일을 자처하는 것이오? 남을 호위하겠다는 건, 자기 목숨을 내어놓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오?”
“압니다. 잘 알고 있으니, 그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오.”
장설의 고집은 좀처럼 꺾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강직한 남채화라 해도 더는 버틸 수 없었던지 한발 물러섰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정 그리하기를 원한다면 하시오. 단, 위험에 처했을 땐 각자 자기 몸을 건사하는 데 집중해 주시오. 여러분을 개방까지 무사히 안내하는 게 내가 할 일이라 그러니 명심하시오.”
사실 알고 보면, 용하 일행과 남채화는 서로 같은 처지였다. 남채화는 용하 일행을, 용하 일행은 남채화를 어떻게든 보호해야만 했다.
“알겠소. 그리하겠소.”
장설은 용하와 인공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리고 남채화 모르게 대열을 조금 흩뜨려 각자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척했다.
이제 막 개방임을 알리는 경계석 앞을 지났다. 경계석 쪽에 잦은 시선이 머물렀다.
머릿속에 얼마 전 비명에 떠난 남채화에 대한 연민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날을 생각하면, 잠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참으로 기특한 사람들이오.”
뜬금없는 남채화의 말에 세 사람은 의아해서 바라보았다.
“그러잖아도 여기서부터 긴장을 좀 해야 할 것이라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듣고 보니, 남채화도 무엇인가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아무래도 접경지역이다 보니, 분쟁이 잦은 곳이란 뜻이오. 수많은 살상과 수많은 부상이 있었던 곳이라오.”
남채화의 표정이 불현듯 참담해졌다. 용하 일행도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 청승일랑 이제 그만들 떨고, 곧 방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니, 어서 움직이시오.”
분명 야멸찬 목소리였다. 하지만 남채화의 말이 용하의 귀에는 희망차게 들렸다. 매정하게 보일 수 있는 그녀의 걸음걸이에서도 기대감이 느껴졌다.
“장설 어른, 인공 어른!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남채화를 호위해야죠.”
용하 일행은 남채화를 뒤따르는 체하며 그녀를 에워싸고 사주경계를 하며 보호했다.
잔뜩 긴장한 인공과 장설. 두 사람과는 달리 용하의 얼굴엔 설레임 또한 엿보였다.
용두방주에게 가는 길에 많은 거지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의문의 자루를 옮기며 해맑은 표정들이었다.
그 광경을 보는 용하는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남채화 어른! 저들이 옮기는 자루가 무엇입니까?”
“저들은 백의개로, 의결권을 갖기 위해 부지런히 자루를 모으는 중이오.”
“백의개?”
“아직 입문한 지 3년이 채 안 된 자들을 지칭하는 말이오.”
“아, 만약 우리가 개방에 입문한다면, 저들처럼 자루를…….”
바로 그때였다.
“입문할 자격을 먼저 득하는 게 순서요!”
카랑하고도 차가운 남채화의 목소리에 용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있으면 용두방주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설레임과 긴장감이 교차했다.
* * *
개방에 도착해서도 꽤나 먼 거리를 걸었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걸은 때와는 달리 많은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남채화 어른. 개방에 입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걸 왜 묻는 것이오? 개방에 입문할 마음이라도 생긴 것이오?”
“아닙니다. 그냥 이곳을 걸으며 개방의 사람들을 보니 문득 궁금증이 생겨서요.”
“개방에 입문하려면, 우선 강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의로워야 합니다.”
“아아, 그렇군요.”
용하가 뜻밖에 감명을 받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또한!”
남채화에게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했다.
“자비로워야 합니다.”
“아아, 자비…….”
이를테면… 개방에 들어가려면 강직하고, 정의롭고, 자비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훌륭한데, 이런 사람들이 개방에 들어와 3년 동안 자루를 모으며 묵묵히 수양한 후, 가장 기초적 의결권인 일결을 얻어 개목이 되는 것이다.
그 순간 용두방주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아, 그럼 용두방주는 어떤 위치입니까? 물론 개방의 우두머리라는 건 알지만.”
“개방의 서열 최고라 할 수 있는 구결이오.”
구결이라는 말에 용하는 숨이 탁 막혔다.
구결! 입문해서 3년이 지나야 겨우 일결인데, 구결이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개방!
알면 알수록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며 긴장감만 더해 갔다.
‘개방! 이곳은 어쩌면 나에게 희망의 땅이 되어 줄 수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파이팅해 본적 없는 용하의 뇌리에 얼핏 스친 생각이었다.
항상 후기 인생만 전전해 온 용하에게 과연 개방은 어떤 기회를 제공할 것인가.
용하는 처연한 눈으로 인공과 장설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서 나이 또는 근엄함 따위 엿보이지 않았다.
다만 청순한 얼굴에 강직함과 정의감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
“남채화 어른, 얼마나 더 가야 용두방주를 만날 수 있습니까?”
“오늘 중으로 만나긴 어려울 것이니 조바심내지 마시오.”
“오늘 중으로 만날 수 없다니, 왜요?”
“일단 방주의 궁에 도착하면, 당신들이 면담을 희망한다는 신청서를 제출할 것이오.”
용하는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한마디로 서류 심사에 통과해야 한다는 말이군요.”
“호, 셋 중에 가장 영특한 것 같소. 한 번에 찰떡같이 알아듣는 걸 보니.”
용하가 남채화의 말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면서 수없이 경험했던 쓰라린 기억 덕분이었다. 서류를 제출하고 며칠을 기다려서 겨우 면접 기회를 얻어 면접을 치르고, 최종 합격을 기다리는 데 또 몇 날 며칠을 속 태웠던 아픈 기억들.
“남채화 어른, 잘 좀 부탁드립니다.”
용하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 남채화의 눈에 비친 용하의 태도는, 비굴하기보다는 강직하고 정의로워 보였다. 그리고 곧 그녀의 눈이 인공과 장설에게로 흘렀다.
‘더러운 인간들. 양 볼에 덕지덕지 붙은 저 욕심 주머니 좀 봐.’
웬일인지 용하와 남채화는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달랐다.
남채화는 경멸하는 눈빛을 접어 처연하게 정면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을 들어 조금 먼 곳으로 눈길을 보냈다.
남채화의 시선이 옮겨 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용하의 눈길 또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이제 막 용하의 시선이 머문 곳에 경복궁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궁(宮)이 보였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