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23
23화
감회가 새로웠다.
개방의 중심에 우뚝 선 용두방주의 궁을 올려다보는 용하와 인공 그리고 장설.
용두방주의 궁을 우러러보는 세 사람은 기묘한 전율을 느꼈다. 특히 용하는 인공과 장설과는 조금 다른 감정에 휩싸였다.
21세기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개방이 희망의 땅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설레임이었다.
무슨 이유에서 개방에 가면 21세기로 돌아갈 방법이 있을 거로 생각하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뭣들하고 있는 것이냐? 어서 들어가지 않고!”
하대도 모자라 명령하는 듯한 이 말투는 다름 아닌 남채화였다.
남채화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하자 인공과 장설은 두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용하는 그녀의 태도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반면 인공과 장설은 남채화의 태도가 가소로워 도저히 두 눈 뜨고는 봐줄 수가 없었다.
“이보시게, 남채화!”
성우가 대사를 읽는 듯한 이 목소리는 다름 아닌 인공이었다. 그는 남채화를 빤히 바라보며 역겨울 만큼 거들먹거렸다.
하지만 남채화는 그런 인공의 심리전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호통을 쳤다.
“왜, 내 말이 같잖은 것이냐? 아님, 시간이 남아도는 것이냐?”
남채화의 태도나 말투는 조금 전보다 더 냉담했다. 그런 남채화의 말에 오금이 저렸던 건 인공이 아닌, 용하였다.
“아, 아닙니다.”
남채화를 향해 넙죽 조아린 용하는 곧 인공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형님! 도대체 왜 그러세요? 물 좋고, 산 좋고, 공기 맑으니까 미친 거예요? 이 정도면 치매야, 치매! 사람이 어떻게 그새 그걸 잊어버리냐고. 우리가 그 고생을 하면서 왜 여기까지 왔는지 그새 잊은 거냐고요?”
“뭐, 뭐야? 이, 이놈이 진짜 미쳤나? 너 인마!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용하, 너야말로 터진 입이라고 나오는 대로 지껄일 것이냐?”
“터, 터진 입이라뇨? 지, 지껄이다니요? 형님! 아무리 형님이어도 그렇지, 이건 말씀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닙니까?”
인공의 기세 따위 하찮았다. 용하는 그보다 한 술 더했다. 그의 기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을 때 용하의 기세를 짓누르는 남채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입 좀 다물지 못할까! 이런 태도로는 도저히 용두방주를 알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랬다. 다른 곳은 몰라도 개방에서 용두방주를 만난다는 건, 알현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쩔쩔매는 용하와는 달리 인공은 더 기고만장했다.
“사과! 무슨 사과. 먹는 사과? 그거라면 내게 가져와. 내가 다 먹어 줄게.”
보다 못한 장설이 인공을 향해 일격을 가했다. 인공은 마치 테이저건에라도 맞은 듯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두 눈을 허옇게 뒤집었다. 불쌍한 노인네 같으니.
그리고 인공이 정신을 차렸을 땐, 어둡고 습한 작은 일실이었다.
“뭐야, 여긴?”
인공이 두 눈을 부비며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어디에선가 하나! 둘! 하나! 둘! 힘찬 구령이 들려왔다.
“이 소린 또 뭐야?”
인공은 구령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곧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 목소리는?”
그랬다. 구령 소리는 다름 아닌 용하와 장설의 목소리였다.
“이게 다 어찌 된 일인가? 분명 용두방주의 궁궐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인공은 찌뿌둥한 몸을 힘겹게 일으켜 세웠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에선가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곧 문이 열리며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리는 듯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깨어나셨습니까?”
인공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뉘시오?”
문으로 스며드는 새하얀 햇살에 가려진 한 여인이 거리를 좁혀 오며 대답했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개방에 입문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곳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기강을 다지고 규율을 가르치는 교관입니다.”
“뭣이라, 교관?”
썩 듣기 좋은 호칭은 아니었다.
“궁금증은 천천히 풀기로 하고, 이제 정신이 드셨으니 밖으로 나가시지요.”
그러잖아도 바깥 상황이 궁금하던 차에, 교관이라 자처하는 여인의 말을 안 따를 리 없었다.
“알겠소. 앞장서시오.”
이때까지만 해도 인공은 예전의 당당함을 잃는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발을 내딛는 인공의 걸음걸이가 어딘지 불편해 보였다. 아직 장설에게 가격당한 혈자리가 풀리지 않아서였다.
인공의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이자, 교관이라 자처한 여인이 빠르게 인공을 부축했다.
“초면에 이렇게 신세를 져도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허나! 이 문을 나서는 순간 대우는 달라질 것입니다.”
“문을 나서는 순간 대우가 달라지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궁금증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니, 그만 나가시지요.”
인공의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고, 여인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예의를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지금까지 사태 파악이 안 된 인공은 거들먹거리며 여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작렬하는 태양의 광채 탓에, 인공은 눈이 부셔 걸음을 제대로 내디딜 수 없었다.
그때였다. 조금 전 낭랑한 목소리를 내던 여인은 온데간데없고 목을 긁는 듯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똑바로 못 걷나!”
그 목소리는 마치 전방부대 고참이 신병을 대하는 듯했다.
더는 여인으로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특수 교육을 받은 지옥 훈련 교관!
걸음걸이 하나도 남달랐다. 흔히 말하는 칼각.
여인의 달라진 모습에 정신이 바짝 든 인공이 두 눈을 부릅뜨고 15도 정면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인공의 시야에 통나무를 길게 둘러맨 용하와 장설이 보였다.
그들은 보기에도 부담스러운 통나무를 어깨 위로 들어 올리며 비 오듯 땀을 흘렸다.
지금 인공의 시야에 보이는 광경은 일종의 군기교육대 같은 곳이었다.
한편, 용두방주의 처소에서는 용하 일행을 안내해 온 남채화가 방주를 알현하고 있었다.
“꽤 쓸 만한 자들입니다.”
남채화의 말에 용두방주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남채화는 조금 전보다 더 조아리며 대답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아직 거기까지는 파악이 안 되었습니다.”
“뭐라?”
용두방주의 노기에 찬 목소리에 남채화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맸다.
“면담 신청서를 접수하기 전에 그것부터 확인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남채화는 결연히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주의 처소를 나온 남채화는 급히 훈육전으로 향했다.
훈육전은 중원을 떠돌던 사람이 개방에 입문하기를 희망할 때, 그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곳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에게는 학교 같은 곳이요,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군기교육대 같은 곳이다.
드넓은 연병장에 군데군데 호된 군기 교육을 받는 입문 대기자들이 보였다.
그 광경을 멀리 둘러보는 남채화의 시야에 소의 목봉 체조라 불리는 교육을 받는 용하 일행이 보였다.
열 명 이상, 스무 명이 들어올려야 하는 통나무를 고작 셋이서 들어 올리는 모습이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저런 저 저… 알량한 자존심을 끝내 떨치지 못하더니만.”
남채화는 용하 일행을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이윽고 용하 일행 앞에 선 남채화는 교관에게 예를 갖추고 물었다.
“어떻게, 개선의 여지가 보이는지요?”
“무엇이 궁금해 그러는 것이오?”
남채화를 대하는 교관이라는 여인의 목소리는 엄동설한 얼음장 같았다.
“이자들은 제가 안내해 온 자들인데, 본디 심성이 정의롭고 강직한 자들입니다.”
“당신이 추천하는 자들이라면 나도 그리 믿을 것이오.”
교관의 말에 용하는 물론 인공과 장설의 눈길이 남채화와 교관 사이를 종횡무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채화가 자기 자신들을 두둔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얼음장 같은 교관이 남채화의 말에 호응하는 것은 더욱 놀라웠기 때문이다.
내막을 파헤쳐 보면, 용하 일행을 안내해 온 남채화는 개방에서도 유독 신망이 높은 남채화 중 하나였다.
“그럼…….”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규범과 예의만 숙지하면 곧 내보낼 것이오.”
“감사합니다.”
남채화는 깊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후 황급히 물러갔을 때였다. 멀리서 들리는 용하 일행의 구호는 조금 전보다 두세 배는 더 우렁찼다.
그날 밤, 훈육전 정신무장관.
“아니, 왜 우리만 야자를……?”
불만이 가득한 용하의 투정에 교관은 차갑게 되물었다.
“이곳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냐?”
“당연한 거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들 돌아갔는데.”
“왜, 그것이 불만인 게냐? 그렇다면 연병장으로 나가 몸을 좀 푸는 건 어떻겠느냐?”
순간 아찔했다. 반나절을 잠시도 쉬지 않고 했던 목봉 체조가 떠올라서였다.
“아, 아닙니다. 정신 교육, 무엇보다 정신 교육이 중요하죠. 잘못했습니다.”
인공은 납작 엎드렸다. 그 순간 인공에게 자존심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거라! 내가 항상 훈육전에 입소하는 교육생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여러분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한없이 힘든 게 훈육전 생활이다. 허나! 조금만 생각을 바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한없이 고마운 곳이 바로 이곳 훈육전이다.”
개방에서 생활하려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것. 그것을 미리 학습하는 곳 훈육전. 한마디로 교관의 가르침은, 그만큼 개방의 규율이 엄하다는 것을 시사했다.
* * *
조금 전 면담 날짜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랜 시간 고통을 견디며 기다렸던 순간이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오늘이 있기까지, 그동안의 고생을 생각하면 넋 놓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용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계산으로 면담할 때 해야 할 말을 차분히 정리해 두었다.
그런 용하에게 인공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야, 김용하! 난 막상 판 깔아 주니까, 딱히 할 말이 없거든.”
“그래서요?”
“그래서요는 무슨! 너는 특별히 용두방주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지.”
“특별할 건 없지만, 일단 비밀입니다.”
사내답지 못하게 새초롬했다. 그 꼴을 그냥 봐 넘길 리 없는 인공이었지만, 이번만큼은 크게 질책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어가기엔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지, 끝내 한마디를 구시렁거렸다.
“뭘 그런 걸 다 비밀이라고. 그리고 우리끼리 비밀이란 게 어디 있겠느냐?”
“아무리 우리가 의형제를 맺었어도 각자 사생활이 있는 겁니다.”
“물론 사생활도 중요하지만, 내 생각엔 말이야.”
인공이 무슨 말인가 한 보따리 풀어놓을 듯 입을 크게 벌렸을 때였다.
“원래도 말이 많았지만, 오늘 유독 말이 많으십니다.”
용하가 찬물을 한 바가지 쏟아부었다. 하지만 인공은 굴하지 않고 하던 말을 이어 갔다.
“음, 그게 말이야. 우리가 질문할 내용을 허심탄회하게 공유한다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거든.”
“왜 그래야 해요? 그리고! 그렇게 해야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낸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죠?”
“음, 그게 말이야. 머리당 세 개밖에 질문할 수 없다고 하잖아.”
인공의 말에 무엇인가 각성이라도 한 듯 용하의 두 눈이 번득였다.
“좋아요!”
“녀석, 이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모양이구나.”
“공유! 생각해 보니 참 아름다운 문화인 것 같아요. 저는 말이죠…….”
세 사람의 대화가 은밀하게 오갔다. 그러는 사이 밤은 점점 깊어만 갔다. 세 사람이 머무는 일실에는 호롱이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 소리가 세상을 뒤흔들었다.
늦게까지 대화를 나눈 용하와 인공 그리고 장설. 세 사람은 아직도 잠에서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밖에는 사람들 움직임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금일 면담자는 교육 열외다. 알겠는가?”
교관의 목소리는 흔히 신병교육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군기 꽉 찬 조교를 연상시켰다.
그의 한마디 말에 개방의 일원이 되고자 기강 확립 훈육전에 입소한 사람들의 움직임은 조금 전과는 달리, 확연히 분주해졌다.
하지만 용하와 인공 그리고 장설, 세 사람의 방에는 코 고는 소리가 대답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면담자들은 연병장 단상 우측에 따로 모여, 인원을 확인한 후에 방주님의 궁으로 이동할 것이다. 알겠는가?”
이번에도 교관의 목소리는 세상 둘도 없이 우렁찼다.
몇몇 사람이 교관의 말에 입을 모다 대답했는데, 다들 적잖이 들떠 보였다.
하지만 용하 일행은 그때까지도 잠에 취한 채 의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