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25
25화
“용두방주님, 창의부흥원의 김용하 원장 드십니다.”
용두방주의 밀실을 지키는 특수요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수문장이 예를 갖춰 한 말이다.
밀실이라는 말 때문인지 하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일실은 기운부터가 달랐다.
지금까지 이곳은 용두방주 이외에 누구도 출입한 적 없는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하물며 소희마저도 방주의 일실이 무엇을 하는 공간인지, 그 실체를 정확히 모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조금 전 용하는 방주가, 늦지 않게 내 방으로 오시오, 라고 한 말에 상담실로 갔었다. 그런데 상담실 앞 문지기가 용하를 이곳으로 은밀히 데리고 왔다. 그것도 한 번에 온 게 아니라, 안내하는 하인이 수차례나 바뀌며 말이다.
일실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 안에 온갖 장신구에 휘감긴 용두방주가 앉아 있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옥황상제의 근엄함을 흉내라도 내는 듯했다.
‘음, 개방의 우두머리는 이런 곳에서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호사를 누리는구나.’
불현듯 용하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었다. 결코 긍정적일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욕을 할 이유도 없었다.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 그곳에서 우두머리는 세상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호사를 누리면서도 욕 한 번 먹지 않는다는 건, 그 자체로 대단하다 할 만하다 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이 달라져서였을까, 용두방주가 달리 보였다. 일실 안의 휘황한 분위기 탓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용두방주 후면에 찬란한 아우라가 드리워져 있었다.
‘조선 시대, 백성은 기근에 아사당해도 임금은 전국에서 진상해 온 음식들을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그렇게 처먹은 음식만큼 욕도 처먹었다. 그런데 용두방주는 욕은커녕 오히려 신망만 두텁다. 대체 비결이 무엇일까?’
용하는 21세기로 돌아갈 때 다른 건 몰라도, 방주의 탁월한 리더십의 비결만큼은 반드시 가져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어딘가 꼭 쓸 데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 앉으시오.”
“네, 대인.”
용하는 용두방주가 앉아 있는 단상 두 계단쯤 아래 무릎을 조아리고 앉았다.
“얘기가 길어질 수도 있으니 편히 앉으시오.”
그 순간 용하의 얼굴에 얼핏 긴장감이 스쳤다.
‘얘기가 길어질 수도 있다고?’
용하는 마른침을 삼키며 방주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아직도 조금 전 불편했던 심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용하는 무슨 수로 저 불편한 심기를 풀어 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떠시오, 일은 차질없이 잘 진행되는 것이오?”
방주의 말이 용하의 귀에는 꼬투리를 잡으려 드는 것으로 들렸다. 그동안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던 용두방주의 닦달이 급기야 시작되는 것인가. 용하는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키고 되물었다.
“차질없이 진행되다니, 무엇을 말입니까?”
“일전에 내가 부탁했던 것 말이오. 창의부흥원을 설립할 때 말이오.”
“대인! 대인의 말씀대로 창의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시간을 정해 놓고 거기에 맞출 수 있단 말입니까?”
강직한 용하의 말에 용두방주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강직함에 매료됐을 뿐.
“기분 나빴다면 용서하시오.”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대인의 은혜를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을까, 불철주야 그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갚는 게 대인의 바람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허허, 고맙소. 이 몸은 그저 개방의 식구들이 다 같이 누릴 수 있는 무슨 재미있는 게 좀 있었으면 하는 것과 늦둥이 우리 소희를…….”
용하와의 대화에서 용두방주의 입에 항상 오르내리는 소희. 하지만 그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말만 꺼내 놓고 분위기를 회수하고는 했다.
‘참 이상도 하지. 저렇게 매번 딸내미 걱정을 하면서, 그 멀고도 위험한 서역엔 어떻게 보낼 결심을 했을까. 사람도 붙이지 않고 홀로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 혼자 가기엔 너무도 멀고 험한 길이 아닌가. 용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도 작아 용두방주가 눈치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말씀하십시오.”
용하의 말에 용두방주는 어리둥절 바라보았다.
“늦둥이 우리 소희를, 그다음 말을 아직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 우리 소희?! 음, 나는 말이오. 우리 소희가 나보다 더 나은 지도자가 되었으면 한다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면서 저렇게 밖으로 돌리는 것이라오. 그래야 세상을 넓게 보고 도량도 쌓을 것이 아니오.”
한마디로 용두방주의 말은 통찰력을 키우기 위해 세상을 경험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니 조금 전 이상하게 여겼던 궁금증이 풀렸다. 그뿐 아니라 아비 되는 자의 뜻깊은 생각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하긴, 산 교육만 한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혹 개방의 식구들에게도 그 교육법을 적용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생각을 전혀 안 해 본 건 아니외다. 하나, 그리하려면 남채화 못지않게 정신 무장을 시켜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서…….”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정신 무장보다는 체계를 만들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얼마든지 개방의 모든 식구에게 산 교육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무어라, 체계?”
“네, 그렇습니다. 개방에는 백의개에서 구결까지의 계급 체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분상의 구분을 두었을 뿐이오. 그런데 그것으로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말이오?”
“세상을 배우는 산 교육의 방법을 열 개의 등급으로 나누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실 용하는 산 교육 프로그램을 10등급으로 나누면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21세기 아니다. 무림이었다. 그에 걸맞은 표현을 쓴다고 한 건데, 과연.
“아하,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을 미처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구려.”
고맙게도 용두방주는 용하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고맙소. 그것을 만들어 주시오. 필요한 게 있다면 말씀하시오. 전폭적으로 지원하겠소.”
“감사합니다. 필요한 건 차차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뭐 또 할 말이 남았소?”
“저와 함께 온 인공과 장설. 두 노인에게 선처를 베풀어 치료를 좀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치료? 그들이 무슨 병치레라도 한다는 것이오?”
“병치레라기보다, 면담 직전에 몹시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몸이 성한 데가 없을 것입니다.”
“무어라, 매질? 누가 내 허락도 없이, 매질을 하였단 말인가?”
“외람됩니다만, 그 추궁 또한 불문에 부쳐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우리 잘못으로 혼난 것이니 치료만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평범한 노인이 아니니, 눈여겨 봐주셨으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평범한 노인이 아니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오?”
“통찰력이 뛰어난 노인들입니다. 대인은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제가 창의부흥원을 제대로 이끌어 가려면 향후 꼭 필요한 인재들입니다.”
“어허, 미처 못 알아봤구려. 公의 뜻이 그러하다면 당연히 보호해야지요. 그건 염려 마시오. 내 곧 손을 쓸 것이니.”
그날 이후 용하는, 개방의 산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 * *
개방의 산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몰두한 시간도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용하는 그동안 준비한 자료를 토대로 1차 브리핑을 위해 용두방주와 면담을 청했다. 방주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흔쾌히 용하의 청을 받아들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예전처럼 면담실이 아닌 일실에서 독대했다.
“불편한 점은 없으셨소?”
“네, 덕분에 순조로웠습니다.”
“나를 보자고 한 용건이 무엇이오?”
“극히 일부분이긴 하나 개방의 산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초안을 말씀드리고자 해서 뵙기를 청했습니다.”
용하의 말에 방주의 표정에 화색이 짙었다.
“고생 많으셨소. 어서 말해 보시오.”
용하는 그동안 스마트폰에 저장해 놓은 자료들과 자신의 입심을 잘 접목해 개방의 계급 체계인 열 개의 등급에 걸맞은 단계별 교육에 관해 설명했다. 그리고 그 단계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적격자를 선발하는 건 선행을 기준으로 한다고 덧붙였다.
“오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구려. 대단하시오.”
“아닙니다. 제 말을 이렇게 빨리 알아듣는 대인이야말로 대단하십니다.”
“대충 내용은 알아들었고, 그렇다면 그 선행을 어떤 기준으로 누가 판단할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관리할 생각이시오?”
“임시로 창의부흥원에 기록실을 만들 것입니다.”
“기록실이라?”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기록실에 두 명의 기록 요원을 둘 것입니다.”
“두 명의 기록 요원이라, 그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발하면 좋을 것 같소?”
“통찰력입니다. 그래서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겠소?”
“네. 통찰력이 뛰어난 인공과 장설을 기록 요원으로 선임할 생각입니다.”
“아, 그거 좋은 생각이오. 선행을 구분하고 공정하게 기록하려면 통찰력이 뛰어난 그들이 적격인 것 같소. 그러잖아도 두 노인은 내가 잘 치료해 주었소.”
모든 게 순조로웠다. 용두방주는 우쭐해서 용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생색이라도 내려는 사람 같았다. 용하는 옅은 고갯짓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때부터 개방의 시간은 빠르게 돌아갔다.
창의부흥원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 앞에 부속시설인 기록실이 임시로 발족했고, 두 개의 자리가 만들어졌다.
용두방주와 용하 앞에 인공과 장설이 조아리고 있었다.
“오늘부터 인공과 장설, 두 사람은 용두방주의 직속 기관인 창의부흥원의 부속시설인 기록실의 기록 요원으로 임명하겠다. 기록 요원은 개방의 모든 일원에 대해 그들의 선행을 찾아내 기록하며 그 결과를 토대로 개방의 산 교육 체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산정하는 일을 도맡아 하게 될 것이다.”
인공과 장설은 고개를 깊이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용하 公은 하실 말씀 없으시오?”
“앞으로 함께 일하며 나눠야 할 얘기들이 너무 많아 오늘은 삼가겠습니다.”
“알겠소. 임명장은 앞으로 하는 거 봐서, 혁혁한 공이 인정되면 그때 가서 교부하도록 하겠소.”
인공과 장설은 이번에도 고개를 깊이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윽고 용두방주가 창의부흥실을 나갔을 때였다. 세 사람은 서로의 손을 움켜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고맙구나, 용하야. 나는 네 녀석이 호강에 겨워 우릴 아예 잊은 줄 알았구나.”
“인공 어른도 참,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우린 해야 할 일이 많잖아요.”
“고맙다, 용하야. 잠깐이나마 우리가 의형제를 맺은 사실을 의심했었다. 미안하구나.”
“장설 어른, 상황이 그럴 만하지 않았습니까. 모두 이해합니다. 그리고 바로 일을 시작하셔야 하니 거기 좀 앉으십시오.”
인공과 장설은 용하가 안내하는 둥근 테이블에 앉았다. 용하가 이번 일의 취지를 간략하게 다시 설명했다. 그런 용하를 대하는 인공과 장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쉿! 용하의 손짓으로 실내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리고 곧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장님, 용두방주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무슨 용건입니까?”
“금일 기록실에 선임되신 두 분의 의복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의복? 무슨 의복. 용하는 어리둥절했고, 장설과 인공은 화색이 짙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용두방주의 신하가 들어와 청색 보자기 두 개를 둥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펼쳐 보였다. 비취색 비단에 송골매가 수놓아진 단아한 의복이었다. 인공과 장설은 입이 귀에 가서 걸릴 듯했다.
반면 용하는 생각했다.
‘청색 보자기라, 나는 은색 보자기였는데…….’
의복을 가져온 하인은 다소곳하게 용두방주의 말을 전했다.
“의복 표면에 송골매를 수놓은 이유는 매의 눈으로 개방의 식구들 선행을 살피라는 뜻이라 하였습니다.”
하인의 말에 용하 일행은 입을 모아 화답했다.
“고맙다고 전해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