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27
27화
같은 궁 안에 있는 연회장을 가는 데도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했다.
용두방주의 뒤를 따라 걷는 용하의 뇌리에 몇몇 얼굴이 떠올랐다.
가깝게는 고락을 함께 나누는 인공과 장설. 멀게는 21세기를 함께 살았던 많은 사람.
그 가운데에 특히, 검도 체육관 차리느라 받은 대출 빚 갚느라 고생하고 있을 아버지 그리고 결혼을 약속했던 미숙이까지.
‘존경하는 아버지… 그리고 사랑하는 미숙아…….’
괜히 눈시울이 뜨거웠다.
이윽고 고급 객잔을 연상시키는 문이 겹겹이 붙은 곳에 도착했다. 거의 동시에 몇몇 하녀가 문을 열었다.
스르르― 자동문이 열리듯 긁히는 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성대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러잖아도 머리가 복잡하고 심신이 피곤하던 차였는데, 그런 자신을 위해 이런 자리를 만들어 준 용두방주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차올랐다.
일순 가슴이 뭉클해지며 끝내 눈물이 또르르― 굴러 내렸다.
“왜 그러시오? 눈물을 보일 만큼 상태가 안 좋은 것이오?”
“…….”
“어허, 이거 내가 생각을 잘못한 것 같소이다. 이를 어쩐다…….”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용하는 가슴이 쑤시도록 침을 삼키며 겨우 몇 마디를 전했다. 특별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감사의 뜻이었다.
그때였다. 하녀 하나가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말했던 보양식으로 준비를 하였느냐?”
“네, 용두방주님.”
“시중은 자네가 들 것인가?”
“네. 저와 또 다른 하녀가 용두방주님과 원장님의 시중을 들 것입니다.”
“자, 그럼 연회를 시작하자꾸나.”
용하와 방주가 주안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조금 전 용두방주에게 예를 갖춘 하녀가 그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곧 다른 하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용하 곁에 앉았다.
젊고 탄력이 느껴지는 수준급 외모라 할 만한 여인이었다.
‘개방에 이런 미모의 여인이 있었다니.’
용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전 머릿속을 스친 미숙이에 대한 그리움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래, 모든 걸 잊고 오늘은 연회에 충실하자.
“차를 먼저 올리겠습니다.”
“아니다. 곡주부터 따르거라.”
시중을 드는 하인의 말에 용두방주가 한 말이었다.
“이른 아침입니다. 속부터 달랜 후에 곡주를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녀는 좀처럼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 건강을 염려하여 그러는 거 잘 안다. 허나! 지금은 곡주가 나를 사로잡는구나.”
“알겠습니다. 그럼 순한 곡주로 올릴 터이니, 그것으로 속부터 달래십시오.”
방주의 하녀가 곡주를 따르자, 용하의 하녀도 곡주를 따랐다. 곡주가 잔을 채우자, 방주는 잔을 높이 들어 건배 제안을 했다. 용하는 방주의 잔 높이만큼 잔을 들었다.
“오늘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주시오. 아마 그동안 했던 어떤 경험보다 행복할 것이오.”
호기롭고 유쾌한 목소리였다. 개방에서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는 오직, 용두방주 단 한 사람뿐이었다.
연적처럼 생긴 작은 주전자는 여느 연적과는 달리 입구가 넓었으며 뚜껑이 따로 없어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곡주를 마시는 사람이 속을 볼 수 있게 일부러 이처럼 기이한 주전자에 담은 하녀의 배려심이 느껴져 또 한 번 눈물이 차올랐다.
그렇게 각각 두 잔씩을 마셨을 때였다. 하녀 하나가 음식을 내오는 쪽으로 종종걸음쳤다. 그리고 곧 같은 주전자 두 개를 들고 황급히 다가왔다.
“이번 곡주는 조금 전 드신 것보다 좀 더 독한 것입니다.”
좀 더 독하다는 하녀의 말에 용두방주는 흡족한 표정이었다.
‘음, 하녀들은 지금 약한 술로 시작해 점점 도수를 높이려는 계획이군.’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용하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 그 눈빛 그대로 용두방주를 직시하며 생각했다. 만약 용두방주의 궁에서 술에 취해 의식을 잃는다면, 그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질 것인가.
결국 용하가 내린 결론은 둘 중 한 사람은 술을 삼가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주의 생각은 그와 정반대였다. 댓끈 마시고 곯아떨어졌다 깨어나면, 개운해진 머리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오. 오늘 이 자리는 생각을 잠시나마 내려놓고 즐거운 시간을 갖자는 의미이니, 생각일랑 접고 마음껏 술에 젖어 보시오.”
용하는 입을 굳게 다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곧 잔을 들어 방주에게 예의를 갖췄다. 방주가 용하의 건배 제안에 호응하자, 잔을 꺾어 단숨에 쭉 들이켰다.
―크흐!
―카핫!
“어떻소? 속이 뜨끈한 게 온몸에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지 않소?”
“대인의 말이 옳습니다. 속은 물론이고 머리까지 개운해지는 게 따봉입니다.”
“따봉?”
“아, 그거… 그게 말입니다. 좋아도 너무 좋을 때 하는 말입니다. 저 혼자만.”
“오호라, 그러시구려. 하긴 나도 나만 쓰는 말이 있으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소.”
“그 말이 혹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비밀이오. 괜히 알려다 다칠 수도 있으니 굳이 알려고 하지 마시오. 하지만 어쩌다가 듣게 될 수도 있으니 너무 조바심 내지도 마시오.”
“뭐, 조바심까지는 아니고, 언급하시니 궁금증이 모기 눈물만큼 들었을 뿐입니다.”
“모기 눈물만큼이라… 이거 괜히 서운해지는군.”
심리전이었다. 두 사람이 펼치는 질긴 심리전에서 용하가 유리한 고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서운해하실 것까지 없습니다. 제 궁금증을 모두 말씀드린다면, 대인께서 침해를 당한다는 생각에 불쾌감이 들 수도 있어 드린 말씀입니다.”
“아, 알겠소. 뭐. 그거야 나와 인연이 깊어지면 차차 들을 기회가 있을 것이오.”
용두방주는 은연중에 소희와 용하의 관계를 좀 더 돈독하게 만들어 보겠다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아마도 이런 게 낮술의 묘미가 아닐까. 자제한다고 했지만, 용하도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때였다. 하녀가 용하의 귀에 속삭였다.
“원장님, 며칠 전 후원에서 검을 연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용하는 다소 놀란 기색으로 나직하게 물었다.
“그것을 어찌 보게 되었소? 나는 주로 야심한 시간에 검을 연마하는 사람이라오.”
“그날 제가 당번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후원 쪽에서 의문의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려 발길이 그곳으로 향하게 되어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보게 되었다… 좋소! 그 얘기는 불문으로 하겠소.”
“그런데 원장님, 그것을 배울 수는 없는 것입니까?”
“검도를 배우겠다?”
하녀는 대답의 뜻으로 눈을 내리떴다.
“왜 그리 검에 집착하는 것이오?”
하녀는 더는 입을 떼지 않았다. 용하도 흘깃 방주의 눈치를 보았을 뿐,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 * *
연회가 끝나고 용하는 창의부흥원으로 돌아왔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었지만, 일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21세기로 말하면 조기 퇴근인 셈이다.
“원장님, 잠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창의부흥원까지 용하를 부축해 온 하녀가 한 말 치고는 이례적이었다. 개방의 규칙을 모르는 용하는 아무 생각 없이 하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들어오시오.”
“감사합니다.”
연회장 하녀가 창의부흥원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내게 바라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아닙니다. 제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바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럼 무엇이오?”
하녀는 조심스럽게 서책처럼 생긴 것을 내놓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조잡하고 보잘것없는 책이었다. 용하는 망설이는 기색으로 책을 받아 들고는 썩 내키지 않은 기색으로 펼쳐 보았다. 서책 속에는 검을 수련하는 사내의 그림과 그 동작을 설명하는 듯한 글들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용하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이것이 다 무엇이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동안 제가 몰래 지켜본 원장님의 검술 수련 광경입니다.”
“오, 놀랍구나. 상단자세, 중단자세, 하단자세가 정확히 그려져 있고, 설명 또한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어 보여.”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혹시 이 동작을 몸소 해 본 적이 있으시오?”
“쉬는 시간에 가끔 해 봤습니다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갸륵할 데가.”
용하는 하녀의 노력에 감동했다.
“오늘 밤 후원으로 오시오.”
“야심한 시간에 무슨 일로…….”
“검도를 배우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내 그대에게만 가르쳐 줄 생각이오. 단, 궁 안의 식구들이 알면 곤란할 것 같으니, 은밀하게 와주어야 할 것이오.”
“네, 감사합니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하녀는 허리를 깊이 숙여 수차례나 감사의 뜻을 표했다. 용하가 손사래를 치자, 하녀는 미끄러지듯 창의부흥원을 빠져나갔다. 하녀가 나간 자리에 은자 한 냥이 놓여 있었다.
* * *
그날 밤, 어김없이 하녀는 용하를 찾아왔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저를 위해 시간을 내주셔서…….”
“아니요. 지금은 내가 수련하는 시간이어서 나온 것이니,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소.”
“감사합니다.”
“그동안 어깨너머로 갈고닦은 실력 좀 보여 줄 수 있겠소?”
“부끄럽습니다.”
“무공을 수련하는데 부끄러움이라니, 당치않소!”
지금까지와는 달리 단호했다. 용하의 달라진 태도에 하녀는 짐짓 고개를 숙였다.
“무엇 하는 것이냐?”
이번엔 대놓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하녀는 치마를 걷어 허리춤에 찔러 넣고 검을 들었다. 상단자세를 취한 하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림자를 베어 보시오.”
하녀는 그동안 먼발치에서 보고 배운 것을 그대로 흉내 냈다. 제법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지만, 그림자를 벤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용하는 하녀의 동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깨너머로 배운 게 저 정도라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렇게 완벽한 자세로 어찌하여 그림자를 베지 못하는 걸까?’
용하는 하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검을 쥔 그녀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 곧 무엇 때문에 그렇게 그림자를 베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지 알아차렸다.
“하던 걸 멈추고 자연체로 돌아오시오!”
자연체? 하녀는 그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자 용하가 책에서 배운 대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연체란, 검도의 겨눔세에서 근본이 되는 몸의 자세로서, 언제나 무리가 없는 자연스럽고 안정감이 있는 몸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오.”
그러고는 곧 자연체를 취해 하녀에게 보여 주었다. 하녀는 간결하게 예를 갖추고는 조금 전 용하가 취했던 자세를 그대로 따라 했다. 그 광경을 보는 용하는 하녀의 타고난 소질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처음 죽도를 잡은 게 열 살 때였다. 초등학교 3학년. 그런데 저렇게 빨리 습득하는 수련생을 본 적이 없다.’
용하는 놀람을 감추고 설명을 이어 갔다.
“이 자세는 상대가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더라도 민첩하고 정확하게 그에 대처할 수 있는 좋은 자세니, 연습을 게을리하지 마시오.”
“몸에 배도록 부단히 연습하겠습니다.”
마음에 쏙 와닿는 목소리였다.
“자, 그럼 지금부터 검도 수련은 왜 해야 하는지 알려 줄 것이니, 지금까지 막연하게 검도를 배우겠다고 생각해 온 것은 모두 잊으시오.”
“네, 그리하겠습니다.”
“검도 수련은 신체를 강건하게 하고 몸의 움직임을 민첩하고 활발하게 하며, 자세를 바로잡고 태도를 침착하게 해 품격을 갖추게 하는 스포츠요.”
“스포츠?”
하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녀의 반응에 용하는, 스포츠란 말을 무엇으로 바꾸는 게 가장 적절할까, 를 고민해야 했다. 운동? 무공? 무술? 그래 수련으로 하자.
“그게 나만 사용하는 말인데, 달리 말하면 수련이라 하오.”
“아아, 수련!”
“그렇지, 검을 수련하는 것 말이오. 검을 수련하게 되면, 판단력과 결단력이 몸에 배고, 용기와 관용 그리고 인내심이 형성돼 상대를 존중하고 예의를 갖출 줄 알게 된다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궁금한지 말해 보시오.”
“어찌하여 원장님과 똑같이 하는데 저는 그림자를 벨 수 없는 것인지요?”
“아, 그러잖아도 그걸 바로잡아 주려던 참이오.”
“그 말씀은 제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크게 잘못된 건 아니고, 검을 쥐는 방법이 잘못되었소.”
“검을 쥐는 방법?”
“잘 보시오. 검을 잡을 때는 왼손의 새끼손가락이 칼자루 끝에 오도록 하고 약지와 중지의 순으로 조여 잡고,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붙여야 하오.”
하녀는 용하의 말대로 검을 다시 잡았다.
“어디 봅시다.”
용하는 하녀의 손을 흘깃 보았다. 대하면 대할수록 말귀를 참 잘 알아듣는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하였소. 그럼 이제 오른손으로 검을 세워서 칼자루 끝이 팔꿈치 안쪽 길이만큼 오도록 부드럽게 잡아 보시오. 이때 오른손과 왼손의 간격은 한주먹에서 한주먹 반쯤이 적당하다오.”
검술 수련이 한창일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