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28
28화
인기척의 정체는 다름 아닌 용두방주였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들이닥친 용두방주. 속수무책 그의 눈에 들키고 만 용하와 하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광경을 목도한 방주의 노기는 극에 달했다.
“남녀가 유별하거늘, 어찌하여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오? 방주의 허락 없이 남녀가 은밀한 만남을 가질 수 없는 것이 개방의 법도이거늘, 이 야심한 밤에 감히 하녀 따위가!”
왜 그리해야 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용두방주는 피를 토할 듯 소리를 지르며 하녀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버렸다.
“학! 아악…….”
하녀는 단말마를 남긴 채 서서히 쓰러졌고, 그녀의 심장에서 뿜어진 혈액이 용하의 얼굴에 낭자하게 뿌려졌다.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에 용하는 망연자실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왜? 어찌하여 저렇게까지 잔악한 짓을 한단 말인가.’
굳은 듯 방주를 직시하는 용하의 눈에 살의가 드리워졌다.
용하와 잠시 시선을 주고받은 방주는 자신의 속내를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눈을 돌렸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이오?”
조금 전 보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용두방주의 태도를 대하는 용하는 의아했다.
‘대체 지금 자세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 비굴해 보이는 행동… 어찌하여 저리도 자신감 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인가.’
이때까지만 해도 용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용두방주가 어린 여식 소희와 정략결혼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깐의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용두방주가 두어 차례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득의양양한 원래 그의 목소리였다.
“개방에서는 방주의 판단이 곧 법이라는 사실을 훈육전에서 안 가르쳤소?”
들은 바는 있지만, 막상 눈앞에서 이런 일이 펼쳐지니 분노가 앞섰다.
“더군다나 이곳은 나, 용두방주의 궁이 아니요?! 그런 나의 궁에서 요망한 짓을 저지른 하녀 하나 처단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이오.”
방주의 언성은 점점 높아만 갔다. 짧은 몇 마디를 내뱉는 동안에도 수많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것이었어. 어리석게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이곳 무림에서는, 개방에서는, 용두방주의 궁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지금의 현실을 대하는 용하의 심경은 비관적일 수밖에 없었다.
비통한 눈으로 방주를 바라보는 용하의 뇌리에 인공이 했던 말이 불현듯 스쳤다.
“무림의 일에 절대 개입해서는 아니 된다. 알겠느냐?”
그제야 인공이 했던 잔소리 같았던 말이 찰떡같이 가슴에 와닿았다.
용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주 대인! 저는 단지 죽음을 목도한 것에 대한 소회의 뜻으로 대인을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곳 개방에서 누가 죽어 나가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저는 그저 창의부흥원의 일에만 전념할 따름입니다.”
용두방주는 내리깐 눈으로 용하를 보았다.
“정말이시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는 지금 창의부흥원이 해야 하는 일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합니다. 하여, 다른 것에 괘념을 둘 여력이 없습니다.”
강직한 용하의 말에 비로소 분노로 얼룩졌던 방주의 얼굴이 화사해졌다.
“며칠 있으면 내게 가장 소중한 외동딸 소희가 올 것이오. 앞으로 절대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용두방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유유히 돌아갔다.
* * *
용두방주가 말한 며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다. 어스름한 달빛이 후원을 휘감았다. 그곳에 검을 수련하는 그림자가 하나가 있었다. 다름 아닌 용하였다.
그는 달빛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를 향해 수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용하의 생각이 오직 수련에만 몰입돼 있을 때였다.
―휘이이이잉~
바람을 가르는 의문의 소리와 함께 후원의 마당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광경은 얼핏 구름이 달을 가려 생기는 현상 같았다. 이윽고 후원 어딘가에 독수리 아니, 그보다 좀 더 큰 새 한 마리가 내려앉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푸드덕, 푸드덕!
용하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칼을 뻗었다.
“웬 놈이냐!”
우레와 같은 목소리였지만, 그 한구석엔 다소 떨리는 기색도 숨어 있었다.
새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던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어린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였다.
“아이참, 그렇게 연습했건만.”
용하는 군 복무 때 배운 야간 보행 전술로 쥐도 새도 모르게 거리를 좁혀 갔다. 그 모습이 마치 먹잇감을 노리고 접근해 가는 암사자 같았다. 이윽고 시야에 인기척을 냈던 대상이 얼핏 보였다.
“뭐야? 꼬맹이네.”
도무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야심한 밤에 하늘에서 무엇인가 떨어졌는데, 그게 다름 아닌 어린아이라니. 일단 경계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지켜보았다.
어린아이는 주변 상황은 개의치 않고 후원 마당에 펼쳐져 있는 정체 모를 물건을 척척 접어 어깨에 둘러멨다. 그리고 용하를 향해 낑낑거리며 거리를 좁혀 왔다. 달빛이 피사체 뒤에 있어 아직은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밤에 몰래 용두방주의 궁에 잠입해 들어온 자의 행동거지치고는 너무 당당하지 않은가.’
피사체를 바라보며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급기야 용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어린아이는 뜻밖에도 서역으로 배움의 길을 떠났던 소희 낭자였다.
‘소희! 소희 낭자였어? 맹랑한 것 같으니, 사람 참 다양한 방법으로 놀라게 하네.’
소희의 등장은 그야말로 서프라이즈였다.
“구경만 하지 말고 이것 좀 들어주시오.”
“어! 어, 그러자꾸나.”
용하는 얼떨결에 소희가 둘러메고 있는 물건을 덥석 받아들었다. 보기보다 꽤 무거웠다.
“이게 다 무엇이냐?”
소희는 훅 치켜뜬 눈으로 대답했다.
“못 보셨소?”
“무엇을 말이냐?”
“이 소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 말이오.”
“아하, 안타깝게도 못 보았구나.”
“안타까운 게 아니고, 평생 후회할 것이오. 그런 진귀한 광경을 놓치다니.”
말은 비관적으로 하면서 표정은 항상 긍정적이고 해맑았다.
“그런데 정말 하늘에서 내려왔느냐?”
“사람 말을 뭘로 들어.”
쀼루퉁해진 소희는 빠른 걸음으로 용하에게서 멀어졌다.
“뭐야? 그냥 가 버리면 나더러 이걸 다 어떡하라고?”
용하는 소희에게서 건네받은 물건을 둘러메고 창의부흥원으로 돌아와 펼쳐 보았다. 용하의 눈에 비친 물건의 정체가 얼핏 행글라이더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하는 물건을 어림짐작으로 조립해 보았다.
이윽고 하나하나 조각이 맞춰지며 형체를 드러냈는데, 그 물건의 정체는 짐작했던 대로 행글라이더였다. 그제야 용하는 소희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진귀한 광경이란 게 이걸 두고 한 말이었군. 소희 낭자는 이걸 타고 내려온 거야.”
그때였다. 용하의 뇌리에 불현듯 무엇인가 스쳤다. 그리고 곧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용하는 서둘러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다운받아 저장해 놓은 자료를 열어 행글라이더나 그와 유사한 자료가 있나 찾아보았다. 한참을 뒤진 끝에 자료 하나를 찾아냈는데, 다름 아닌 윙슈트였다.
“그래, 이거지!”
용하는 행글라이더와 윙슈트를 번갈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이른 아침.
용두방주의 궁이 야단법석이었다.
“무사히 돌아왔구나. 그래, 언제 온 것이냐?”
“어젯밤 늦게 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야 모습을 나타낸 것이냐?”
“야심한 밤이어서 혹 단잠을 깨울까 염려돼 조용히 제 방으로 가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오, 역시 영특하구나. 그래 오늘은 무엇을 할 계획이냐?”
“오늘은 창의부흥원 김 원장과 긴히 의논할 것이 있어 그곳에 가 보려고 합니다.”
“김용하 원장과?”
“네, 그러합니다.”
“음, 그럼 이 아비가 무엇을 해 주면 도움이 되겠느냐?”
“아버지가 해 주실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니 적잖이 서운하구나.”
“아버지가 저를 믿는다면, 그냥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하며 들뜬 기분으로 기다려 주십시오. 그게 바로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다.”
“오호라, 그래! 우리 소희가 그사이 어른이 다 되었구나.”
흐뭇해진 용두방주는 껄껄거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소희는 예를 갖추고 일어나 바로 창의부흥원으로 향했다. 어느덧 소희가 창의부흥원에 당도했을 때 하녀가 용하에게 고했다.
“소희 아씨 드셨습니다.”
소희라는 말에 용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 시작된 연구에 분명, 방해될 거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용하는 곱지 않은 목소리로 고했다.
“들어오시오.”
스르르 문이 열리며 곱게 단장한 소희가 모습을 나타냈다. 용하는 자기도 모르게 짐짓 놀란 기색을 보였다. 미인을 보면 반사적으로 보였던 21세기형 반응이었다.
방 안에 펼쳐진 광경을 본 소희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 시작한 것이오?”
“…….”
“사람을 보았으면 눈인사라도 하는 게 도리 아니오. 그런데 어찌 그리 냉랭하시오.”
남들은 소희의 이런 당돌함이 귀엽다고 하지만, 용하는 칭칭 엉기는 것 같아 성가셨다.
‘어린 것이 당돌하기는. 아비 잘 만나 호사하는 가증스러운 금수저!’
그런 용하의 속내는 얼굴에 여지없이 드러났다. 어린 나이에 고생을 사서 하며 세상을 배운 소희의 눈에 그것이 안 보일 리 없었다. 용하를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는 소희는 생각했다.
‘公께서 아무리 이 소희를 멀리하려 해도, 결국은 이 소희의 곁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오.’
잠시 용하와 눈이 마주쳤을 때였다. 소희는 웬일인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행글라이더와 윙슈트를 접목한 새로운 병기 연구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이것만 있으면 닌자술이 필요 없습니다. 굳이 그들처럼 삼실에 의존해 적의 소굴로 침투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삼실 없이 어떻게 허공을 가를 수 있단 말이오.”
“공기의 저항을 이용해 비행하는 것입니다. 서역의 사람들은 이것을 양력이라고 한다 들었습니다.”
“그 말을 누구한테 들었소?”
그 순간 딱 말문이 막혔다. 달리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버지, 오해는 마십시오. 제가 이 신물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한 말입니다.”
“오호라, 그랬었구나! 영특한 우리 딸이 그런 고급 정보를 김 원장에게 알려 주었어?”
용두방주는 소희에게 정신이 팔려 일순 통찰력을 잃고 있었다. 조금 전 뜻하지 않은 실수로 소희의 도움을 받고 만 용하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모멸감이 밀려왔다. 그것을 떨치기 위해 어금니를 질끈 깨물며 와신상담하듯 되뇌어야 했다.
‘말 한마디 잘못해 세상에서 가장 저주하는 금수저에게 신세를 지고 말다니.’
바로 그때였다. 용두방주와 잠시 눈길이 마주쳤다. 그의 예리한 눈빛이 무엇을 감지했는지, 불똥이라도 튈 것처럼 희번덕거렸다.
‘대체 무엇을 감지한 걸까?’
용하의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맺혔다. 보통 사람 눈에는 띄지도 않는 그것을 용두방주는 예리하게 찾아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 이 순간이 긴장해야 할 순간은 아니지 않은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 비단 용두방주뿐 아니었다. 용하도 그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금세 알아챘다.
‘방주의 다음 질문은 당연히 지금의 이 순간이 될 것이다. 그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했느냐고. 어떻게 변명할 것인지 미리 준비해야 둬야겠군.’
그리고 곧 용두방주가 입을 뗐다.
‘그럼 그렇지. 역시 내 예감은 빗나가는 적이 없다.’
그런데.
“이보시오, 김 원장.”
“네, 대인.”
“우리 소희가 그 먼 길을 수행하는 무사 하나 없이 혼자 힘으로 다녀왔소. 연회라도 열어야 하지 않겠소?”
“좋은 생각이십니다.”
이상했다. 분명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느냐고 물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용두방주는, 뜻밖의 말을 하고 있다.
‘대체 무슨 속셈으로 저러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