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32
32화
“형님들, 죄송합니다.”
용하의 목소리는 침통하고 무거웠다.
“죄송하다니, 당치않은 소리. 신물 발표회 때 싸늘했던 용두방주의 표정이 생생하구나.”
위로하기 위해 장설이 한 말에, 되레 용하는 의아해서 물었다.
“싸늘하다니 그게 다 무슨 말씀입니까? 형님들을 대하는 대인의 태도가 그리 냉정했습니까?”
장설은 몸을 부르르 떨며 말을 이었다.
“말도 마시게. 그날 방주의 표정을 생각하면, 당장 창의부흥원을 폐지할 기세였어.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런데 이렇게 명맥을 이어 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형님들이 아니라, 저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용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공은 장설이 했던 말에 토를 달았다. 인공 또한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죠, 형님? 그날 분명 무슨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날 거라는 생각에, 얼마나 조마조마 했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무탈하게 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니 다행 아닙니까? 게다가 이렇게 호위무사 자리에 올랐는데,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도인이 기록원으로 썩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습니까?”
인공은 모든 게 다행이라는 듯 너스레를 떨었고, 그것을 듣고 있는 용하는 잠시 딴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고는 곧 입을 열었다.
“형님, 기록실 임무도 하셔야 합니다. 저 역시 창의부흥원 원장직도 수행해야 하고요.”
일이 많아졌으니 당연히 펄쩍 뛰며 불평을 늘어놓아야 할 인공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솔깃해서 물었다.
“그럼 겸직이야? 호위무사도 하고 기록원도 하고?”
“네. 아무튼 일만 많아진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마냥 좋아할 일만도 아닐 듯합니다.”
비관적인 말투였다. 방주의 처지를 옹호하며 인공과 장설을 다독이며 달래 주어야 할 용하가 의외의 태도를 보이며 인공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분명 이번에도 불만을 토하며 자기가 한 말에 맞장구를 칠 거라 생각에서였는데 뜻밖에도.
“그깟 일 좀 많아지면 어때? 겸직이면 그만큼 우리 권력도 세진 거 아냐? 그럼 됐지. 뭘 더? 난 어디 가서 꿀리지만 않는다면 뭐든 할 수 있어.”
인공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뭐랄까, 오히려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고 있는 듯하다고 할까. 아무튼 세 사람의 얼굴에 화색이 역력했다.
용하, 인공, 장설. 3인의 호위무사는 서로에게 시선을 건네며 흡족한 표정들이었다. 그때였다.
“창의부흥원 원장님, 용두방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문지기의 말 고함에 용하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리고 곱지 않은 목소리로 전했다.
“곧 찾아뵙겠다고 전하시오.”
용하의 대답이 끝났을 때, 장설이 작은 소리로 구시렁거렸다.
“잠시도 가만두지를 않는구먼. 어서 다녀오시게.”
“네, 형님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얼른 가서 단칼에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뭐, 뭣이라. 다, 단칼에?”
“아, 물론 농담입니다. 지금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올 줄 모르니 기다리지 마시고 형님들 일 보세요.”
“말 안 해도 다 알아. 방주가 어찌나 자네를 옆에 끼고 있으려고 하는지…….”
“그럼 저는…….”
마치 하직 인사 같은 말을 남긴 용하는 뒷짐을 진 채 처연하게 창의부흥원을 나섰다.
용두방주 전의 하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상담실에 도착했다. 원래 멀기도 했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용두방주님, 김용하 원장 드셨습니다.”
안에서 방주의 목소리가 흘렀는데, 평소 곱지 않던 목소리와는 달리 반색이 짙었다.
“들도록 하라!”
늘 그랬듯 방주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왜 불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저 목소리는 선심을 쓸 때 내는 음색이잖아. 게다가 웬일인지 들떠 보이기까지.’
문지기들의 조심스러운 손길로 방주의 상담실 문이 스르르 열렸다. 21세기로 치면 자동문이라 할 만큼 정교한 움직임이었다.
이윽고 문이 완전히 열렸을 때였다. 그 안에서 용하를 근엄하게 기다리고 있는 용두방주가 보였다.
용하는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갖추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겨우 한 발을 안으로 들였을 뿐인데.
“거기 앉으시오.”
용두방주는 성급하게 용하를 맞이했다.
“네, 대인.”
대답과 동시에 방주를 흘긋 바라보며 생각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저리도 들뜬 것일까. 게다가 뭐가 그리 급해 아직 들지도 않은 사람에게 자리를 청하기까지.’
조금 서두르는 기색으로 방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자, 그는 몹시 조바심을 내며 마치 근질근질해서 못 견디는 사람처럼 바로 용건을 꺼냈다.
“이렇게 김 원장을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긴히 할 말이 있어서요.”
방주가 용하의 태도를 살피기 위해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정작 용하는 여전히 고개를 조아린 채 허리를 살짝 굽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소희의 별채 쪽에 창의부흥원 건물을 새로 지을 생각이오. 그곳에 호위무사실도 따로 지어 소희의 호위를 더욱 강화할 계획인데, 김 원장 생각은 어떠시오?”
그렇지 않아도 용두방주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불편했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렇게 파격적인 결정을 하시게 된 무슨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갑자기 결정한 게 아니고, 일전에 신물 발표회가 성공리에 끝나면 내가 상을 내릴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니,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마시오.”
용하는 입이 귀에 가서 걸릴 듯했지만, 속내를 감추느라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별말을 다 하시오. 일전에 신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끌어낸 것도 그렇고, 우리 소희의 호위 업무까지 맡겼는데, 그 정도야.”
용하는 다시 한번 납작 조아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는 감사의 표시였다.
다시 창의부흥원으로 향하는 용하는 득의양양했다.
이윽고 창의부흥원 앞에 도착했을 때는 가슴이 벅차 바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찌할까 고심 끝에 두어 차례 심호흡을 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인공과 장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물었다.
“별일 없으셨소?”
“별일 없었으니 안심하시고, 다들 앉으십시오.”
용하가 먼저 자리에 앉고, 인공과 장설이 앉았을 때였다. 용하는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마침내 입을 뗐다.
“좋은 소식입니다.”
인공과 장설이 솔깃해서 다그쳤다.
“좋은 소식이라니, 그것이 대체 무엇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용하는 또 한 차례 심호흡을 하면서 잠시 시간을 끄는가 싶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창의부흥원을 건립한다고 합니다.”
“엥, 창의부흥원을?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이미 잘 돌아가고 있는 창의부흥원을 두고 또 무슨 창의부흥원?”
“아, 그게 말입니다. 창의부흥원을 또 하나 둔다는 게 아니고, 창의부흥원 건물을 신축한다는 말입니다.”
“창의부흥원 건물을?”
“네. 소희 낭자의 별채 쪽에 창의부흥원 건물을 짓고, 호위무사실도 따로 짓겠답니다.”
“그 말은 창의부흥원을 독립된 기관으로 인정하고 청사를 짓겠다는 뜻이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창의부흥원에 청사가 생기는 것입니다.”
부푼 가슴으로 대답하는 용하. 그의 대답에 인공과 장설은 뛸 듯이 기뻐했다.
“아니, 그럼! 이 지긋지긋한 용두방주의 궁(宮)에서 나가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용두방주의 궁에서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만의 독립된 공간이 생기는 것입니다. 게다가 외부에서 보기에 우리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 보이는 효과까지 부수적으로 생기니, 이 얼마나 잘된 일입니까?”
인공과 장설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표했다.
* * *
별채 쪽에 창의부흥원 건립 공사가 시작되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기존의 소희의 별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규모였다.
그 광경을 목도하는 용하는 가슴이 벅찼다.
“방주 대인, 과분한 처사가 아닌지 염려됩니다.”
“먼 미래를 생각하면 이 정도쯤이야.”
건물 규모로 보면 용두방주의 궁(宮)이 가장 크고, 그다음이 바로 창의부흥원이었다. 웬일인지 용하는 착각에 빠졌다. 일전에도 전혀 예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 넘버3가 돼 있었듯, 이번에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 또 이인자로 급부상한 것은 아닌지.
이런저런 생각에 용하는 조바심이 생겼다.
‘다른 건 몰라도 개방의 시계는 늘 빠르게 흘렀다. 용두방주의 리더십이 그렇게 만들었다.’
아마도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창의부흥원 건물은 지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소희라는 높은 벽을 뛰어넘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외부 사람들 눈에, 혹 용하가 이인자 아닐까, 하는 오해를 사기에는 충분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고 이쯤에서 만족해야 한다는 것쯤 누구보다 잘 아는 용하였다.
하루하루가 지루하긴 했지만 개방의 시계는 바깥세상보다 빠르게 돌아갔다. 창의부흥원의 건물이 점차 윤곽을 드러냈다. 그 형태는 용두방주의 궁(宮)과 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크기. 아무래도 규모 면에서 용두방주의 궁(宮)을 뛰어넘을 순 없었다.
한 가지 분명했던 건, 소희의 별채보다는 확연히 큰 규모라는 사실이다. 하늘에서 내려본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똑같이 생긴 크고 작은 건물 세 개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있는 모습이 마치 아빠 곰과 엄마 곰. 그리고 아기곰 같았다. 새하얀 털이 유난히도 복스러운 북극곰.
용하 못지않게 새로 지어지는 창의부흥원 건물을 보며 가슴 벅찬 사람은 소희였다.
“그리 좋으십니까?”
“왜요? 좀 좋아하면 안 되는 겁니까?”
“무엇이 그리 좋은지 궁금합니다.”
“公 아니, 원장님이 제 곁으로 성큼 다가온 것 같아 가슴이 다 설렙니다.”
아버지 닮아 그런지 당돌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저 또한 소희 낭자를 가까이에서 호위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역시 처세술 갑, 김용하다웠다. 소희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살짝 돌리며 용하를 보았다.
“또한 소희 낭자만 괜찮으시다면, 창의부흥원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제가 보유한 모든 정보를 소희 낭자와 공유하고자 합니다.”
“그 말씀은 저를 창의부흥원 연구원으로 탐내고 계신다는 뜻인가요?”
“음, 이를테면! 하지만 방주 대인께는 비밀로 했으면 합니다. 만약 대인께서 아시면 역정을 내실 게 분명하니 우리 둘만 아는 걸로.”
“맞아요, 맞아. 아버지가 알면 괜히 질투하실 거예요. 그럼 우리 둘만 아는 거예요.”
소희는 느닷없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깜찍했던지 용하는 소희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소희와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든든했다.
그런데 사실 용두방주가 소희의 별채 가까운 곳에 창의부흥원을 건립할 계획을 세운 이유는 용하와 소희를 좀 더 가까이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지는 게 인지상정. 반대로 가까이에서 자주 만나고 접하다 보면, 마음까지도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그런데 원장님!”
“말씀하십시오, 소희 낭자.”
“창의부흥원 건물 규모가 너무 크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그 순간 용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소희와도 평행선을 달렸던 것인가.
“글쎄요… 아무래도 좀 과하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닙니다만…….”
“제 생각엔 아버지는 돈을 벌려고 하는 것 같아요.”
“돈을?”
의아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버지는 개방의 부급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는 속셈인 것 같아요.”
“서역의 신물 [바람찬]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아버지는 [바람찬]을 대량 생산해서 개방의 부급을 상대로 고가로 팔아 돈을 벌려는 계획인 게 분명해요. 그래서 아버지는 그날을 염두에 두고 창의부흥원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지으시는 것 같아요.”
그 순간 용하는 생각했다. 음, 그러니까 창의부흥원은 먼 훗날, [바람찬]을 만드는 생산 공장이 될 것이고, 호위무사실은 공장을 지키는 경비실이 되겠구나.
“이를테면 소희 낭자 말씀은, 우리 눈에는 과분할 정도로 지나치게 커 보이는 창의부흥원 건물이 방주 대인의 눈에는 그리 크게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죠?”
“그렇죠. 아버지 욕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창의부흥원은 작아 보이실 거예요.”
타당성 있는, 그러니까 충분히 해 볼 만한 추론이었다.
소희의 말을 듣고 보니, 마냥 넋 놓고 좋아할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