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34
34화
소희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냥 어린아이에게 칭찬 또는 응원하는 의미로 한 번쯤 안아 주어도 될 법했지만, 용하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린 소희가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지 모르니, 항상 조심하고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압도적이었다.
서둘러 화제를 돌려야 했다.
“소희 낭자! 개기일식의 날이 확정되면 바로 알려 주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원장님.”
소희는 서운함을 간직한 채 별채 쪽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용하는 멀어져 가는 소희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창의부흥원 제작실이었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 윙슈트를 하나 더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인공 형님에게 윙슈트 타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용하의 눈빛은 예의 결연했다.
“그게 다가 아니야. 인공 형님은 살도 좀 빼야 한다. 윙슈트를 타기에 적당한 몸무게가 될 때까지 다이어트를 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는 일이다.”
그 말부터 전하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하는 발길을 돌려 호위무사실로 향했다.
호위무사실에 도착했을 때, 인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차라리 잘된 일인 것 같았다. 용하는 장설에게 은밀하게 당부했다.
“큰형님! 오늘부터 작은형님이 식사량을 줄일 수 있도록 잔소리를 좀 해 주십시오.”
“지가 처먹겠다는 걸 내가 무슨 수로.”
“그래서 큰형님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래도 큰형님 말은 곧잘 듣는 것 같아서요.”
“그것도 옛날얘기지, 요즘 같아서는 사기가 충전해 내 말도 듣지 않아.”
“그 말씀은…….”
“그래, 맞아. 기고만장해서 세상에서 지가 최고인 줄 안다니까.”
“아무튼 듣든 안 듣든 잔소리를 끊임없이 해 주십시오. 다 큰 어른한테 그만 좀 드십시오, 라고 말하면 될 거로 생각하겠지만, 큰형님도 알다시피 작은형님은 절대 스스로 식욕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큰형님이 작은형님의 주둥이를 뭉개서라도 못 먹게 해야죠. 부탁입니다.”
강한 어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야멸차게 혼자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인공은 개방에서 누리는 호사에 도취해 굳이 돌아갈 필요성도 못 느끼고 있었다.
“한때 저한테 21세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해 놓고.”
“용하 公! 자네가 이해하시게. 인공이 기분파이긴 해도 성품이 착하지 않은가.”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큰형님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어려워도 제가 해야 하지만, 저는 개량된 윙슈트를 하나 더 만들어야 해서 그럴 만한 시간이 없습니다.”
“바쁘시겠구려. 그 일은 내게 맡기고 가서 일 보시게.”
“고맙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참, 윙슈트를 하나 더 제작하는 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절대 밖으로 새 나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모른다고?”
“네. 소희 낭자도 모르는 일이니, 기밀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소.”
장설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용하가 서둘러 호위무사실을 나갔다. 곧 문이 닫히고 장설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길래, 저렇게 숨기는 게 많아진 걸까?”
장설의 그늘진 얼굴은 수심으로 얼룩졌다.
* * *
호위무사실을 나온 용하는 부지런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걸음걸이에서 조바심이 엿보였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웅장한 규모의 창의부흥원이 보였다. 창의부흥원에 가까워지자, 용하의 걸음은 눈에 띄게 빨라졌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는 창의부흥원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제 막 창의부흥원 앞을 그냥 지나친 용하의 발걸음은 용두방주의 궁으로 향했다.
‘일단 대인이 일에 방해되지 않게 대비책부터 만들어 놓아야 한다.’
전에 없이 결연했다.
용두방주의 궁으로 들어간 용하는 부지런히 걸음을 내디뎌 상담실로 향했다. 꽤나 먼 거리를 걸어 마침내 상담실 앞에 도착했지만, 길게 늘어선 상담 대기자들을 보고 아찔함을 느꼈다.
‘아뿔싸! 미처 염두에 두지 못한 게 있었군.’
용하는 상담실 앞을 서성거리며 골똘히 생각했다. 방주에게 당부하고자 하는 말은 간결했다. 다시 말해 이 말을 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 또한 그만큼 짧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한 사람 상담하는 시간 정도? 아니, 그것도 채 안 걸릴 것이다.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돌아설 것인지, 아니면 어느 한 사람에게 주어진 기회를 직권으로 박탈할 것인지.
결국 용하는 직권을 사용해서라도 용두방주를 서둘러 만나야 한다는 것으로 가닥을 잡고, 대기 중인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잠시 주목해 주십시오!”
상담 대기자들은 물론이고, 문지기를 비롯해 하인들의 눈길도 일순 용하 쪽을 향했지만, 곧 고개를 숙였다. 개방에서 은색 비단옷을 입은 용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금색 비단옷을 입은 용두방주 한 사람뿐이었다.
용하는 사람들을 향해 다시 한번 힘줘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창의부흥원 원장 김용하라고 합니다. 오랜 시간 대기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지금은 중차대한 일로 제가 먼저 용두방주님을 알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혹 양보해 주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지금 용하는 백의개도 득하지 못한 개방의 거지들을 향해 양해를 구하는 중이었다. 제아무리 권력의 중심에 있다 해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사람들 생각은 달랐다.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고 양해를 구하는 용하를 얕잡아 보는 눈치였다.
여기저기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때였다.
―와당탕!
상담실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그리고 곧.
“왜 이리 밖이 시끄러운 것이냐?”
노기 가득한 용두방주가 천지를 뒤흔들 듯 소리쳤다. 방주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그 많은 사람이 일제히 납작 조아렸다. 용하 또한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보시게, 김 원장! 대체 무슨 일로 소란을 피운 것이오?”
“송구합니다. 제 나름대로 긴급하다는 생각에, 미처 여러 사람을 헤아리지 못하고 결례를 범했습니다.”
“내게 할 말이 있으셨소?”
“네, 대인.”
“그럼 바로 들어올 것이지, 이 무슨 추태요.”
용두방주는 사람들을 향해 단호하게 호령했다.
“다들 물러가거라!”
“눼~”
사람들은 일제히 납작 조아리며 입을 모아 대답했다.
“들어오시게!”
용두방주는 짧은 한마디 말을 던지고 야멸차게 돌아섰다. 이래저래 난처해진 용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더니 결국 방주의 뒤를 따라 상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리 없이 문이 닫히면서 술렁였던 조금 전 상황은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할 말이란 게 무엇이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금일부터 제가 중요한 연구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대인께 한 가지 당부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연구라, 그 연구라는 게 무엇인지 귀띔이라도 해 줄 수 있겠소?”
“당연히 말씀드릴 것입니다.”
“좋소, 어디 들어봅시다.”
“제가 지금부터 모든 것을 걸고 할 연구는, 그동안 쌓아 온 제 식견을 총동원해서 서역의 신물을 지금보다 더 효용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개량해 보려고 합니다.”
“개량? 그건 지난번에 하지 않았소. 덕분에 개방 전역에 흩어져 있던 부(富)가 이 용두방주의 궁(宮)으로 전부 모이지 않았습니까? 이제 개방에서 부급인 나, 용두방주를 따라올 자는 아무도 없게 되었소.”
“이번엔 아홉 개 정파를 겨냥한 신물 개발입니다.”
“무어라 아홉 개 정파?”
용두방주의 휘둥그레진 두 눈은 당장에라도 쏟아져 내릴 듯했다.
“네, 개방에 있는 은좌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홉 개 정파에 공금(公金)으로 보관된 은좌를 거둬들일 것입니다.”
아직도 경악을 금치 못하는 용두방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엿보였다. 회심의 미소였다.
“대충 알아들었으니, 그 정도 하시오. 무엇보다도 보안이 중요하지 않겠소.”
“네, 바로 그 점입니다. 그래서 당부드리건대, 창의부흥원에 납실 때 하루 전에 미리 하인을 통해 전갈을 주시면, 그에 따른 준비를 하고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용두방주의 흔쾌한 대답에 용하는 뿌듯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조금 전에 보였던 그런 꼴은 절대 보이지 마시오. 이곳은 개방이오. 개방의 수장인 내가 김 원장에게 내 권력의 일부를 부여하지 않았소. 그러니 김 원장은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그냥 권력을 휘두르기만 하면 될 것이오.”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용하는 방주가 원하는 대답으로 그를 만족시켰다. 처세술이었다.
그날 이후 용하는 이전과는 달리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가장 필요할 때 얻어낸 기회였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21세기로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는 데 주력했다.
외부 활동이라고는 간혹 소희를 찾아가 의견을 나누는 게 전부였다.
“소희 낭자! 개기일식이 있는 날, 히말라야에 바람의 방향도 좀 예측해 주십시오.”
“바람의 방향?”
“네. 바람의 방향이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올 수 있는지요?”
“당연하죠. 곡풍(谷風)입니다.”
“곡풍?”
“네, 그렇습니다. 곡풍은 산 정상과 골짜기 사이의 온도 차이 때문에 생기는 기압 차이로 발생하는 바람입니다. 낮에는 정상이 계곡보다 더 빠르게 가열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공기 밀도가 얕은 계곡에서 정상으로 곡풍이 부는 것입니다.”
“히말라야에도 곡풍이 불까요? 에베레스트산에.”
“계곡과 정상 간 온도 차이가 발생한다면, 어느 산에서든 부는 바람입니다. 그런데 곡풍은 왜요?”
“아래에서 위로 부는 바람을 이용해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려고 합니다. 이왕이면 강한 바람이 불어 준다면 더는 바랄 게 없겠죠.”
“모든 조건이 원장님이 바라는 대로 됐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소희 낭자.”
잠깐이었지만, 만감이 교차했다.
다시 창의부흥원으로 돌아온 용하는 윙슈트 제작에 박차를 가했다. 21세기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서였다. 그리고 여자는 끊어도 먹는 건 절대 못 끊는다던 인공은 하루하루 야위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용하는 스마트폰과 보조배터리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 가지고 다니던 고무밴드를 소희에게 슬쩍 보여 주었다. 소희는 적잖이 의아해했다. 별것 아닌 것에 호기심을 느낀 소희는 고무밴드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만지작거리다가 고무밴드가 얼굴로 튕기는 바람에 맞고 말았다.
“아이, 따가워!”
서희는 옅은 비명을 지르고는 고무밴드를 내던져 버렸다.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엄살 부리지 마십시오. 그 정도로 아프지는 않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용하의 말에 소희는 내던졌던 고무밴드를 다시 들어 용하의 얼굴을 향해 튕겼다.
“뭐, 엄살이라고요? 얼마나 아픈지 원장님도 한번 맞아 보십시오.”
소희의 말에 이리저리 피하던 용하가 우뚝 멈추더니 얼굴을 소희에게 대주었다.
“해 보십시오. 얼마나 아픈지.”
바로 그때였다.
―딱!
소희는 야멸차게 용하의 얼굴에다 고무밴드를 튕겼다.
“악!”
용하는 옅은 비명을 지르며 엄살을 부렸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내가 엄살을 부린 겁니까?”
“아닙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잠깐이었지만, 격이 없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용하에게 어린 소희와 장난이나 치며 소일할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용하는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이것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네?”
“고무밴드라고 합니다. 이것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소희는 어리둥절해서 대답했다.
“죄송하오나, 저는 오늘 처음 본 물건입니다.”
“음, 그럼 비슷한 거라도 구할 수 없겠습니까?”
용하의 목소리는 심장을 짓누르는 듯했다.
“본 적이 없어 무어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혹시 아버지한테 물어볼까요?”
“안 됩니다, 그건…….”
용하가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하는 이유를 소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원장님. 그것을 무엇에 쓰려고 이리 화급히 찾으시는 겁니까?”
“실은 이렇게 작은 고무밴드가 필요해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이 고무밴드보다 수십 아니, 수백 배 더 큰 것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동력을 얻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력? 동력이라면 말들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이용해 동력을 얻습니다.”
“말을 이용해 동력을 얻는다?”
누가 들어도 일리 있는 말이었다. 용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런 용하를 보는 소희는 생각했다.
‘뭐야, 잘하면 침도 흘리겠는데!’
도대체 무엇이 그리 좋은지, 용하는 눈웃음까지 지어 가며 헤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