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36
36화
“이를 어쩐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방주와 소희가 만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용두방주보다 먼저 별채로 달려가 소희를 빼돌려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으로선 그렇게 할 방법이 없다.
“21세기 같으면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될 것을…….”
용하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방 안을 서성거렸다. 표정에 초조함이 역력했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밖으로 나온 용하는 마당으로 나와 몇 바퀴 거닐었다. 그리고 누각 위로 올라가 저만치 보이는 그러니까, 소희의 별채 쪽으로 이동해 가는 용두방주와 하인들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방주 일행의 걸음걸이가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다.
“저 정도 걸음걸이라면, 내가 숲으로 돌아간다 해도…….”
용하는 숲을 둘러보며 눈대중으로 맞춰 보았다. 지금 방주 일행이 걷고 있는 길은 원의 지름 위를 이동해 가는 것이고, 용하가 숲으로 가는 건 반원의 호를 따라 이동하는 것이다. 대충 시간을 따져 보았다.
“저런 속도로 걷는다면 별채까지 10분 남짓, 내가 숲으로 난 길을 달리면…….”
어림짐작으로 계산해도 승산이 있어 보였다. 이건 내가 이기는 게임이다. 단전에 힘이 들어갔다. 이길 수 있다는 게 불을 보듯 뻔한데 이대로 있을 바보는 없다. 용하는 숲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빨리 달렸던지 눈 깜짝하는 사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숲을 헤치며 달리는 용하.
막상 숲속을 달리기 시작하자 예상했던 것처럼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악재 때문이었다.
용하의 앞길을 방해하는 건 다름 아닌, 가시덤불이었다.
“이깟 가시덤불 따위가 김용하의 가는 길을 막다니. 용납할 수 없다. 온몸이 찢기고 할퀴어 혈흔이 낭자하다 해도 나는 이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방주 대인과 소희 낭자의 만남을 기필코 막아낼 것이다.”
용하의 결심은 더욱 단단해졌다.
이윽고 숲을 빠져나와 별채 후원에 들어섰을 때였다. 얼굴 군데군데 흐른 피와 땀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별채를 향해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는데, 반대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한발 늦었단 말인가.’
결국 용하는 방주와 소희의 만남을 저지하지 못한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기 가장 좋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아버지께서 기별도 없이 어인 일이십니까?”
소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비가 딸을 보러 오는데, 기별은 무슨 기별이란 말이냐!”
용두방주의 목소리가 들리자, 심장이 별안간 펄떡거리기 시작했다. 용하는 가슴을 움켜잡고 심장을 진정시켜 보려 애썼다. 왠지 심장박동 소리가 밖으로 새나갈 것 같아서였다.
“그건 그렇지만…….”
소희 낭자가 부끄러워하며 살포시 웃는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하는 일은 잘되고 있는 것이냐?”
“최선을 다하고는 있으나, 예측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보니, 매 순간 부족함을 느낍니다.”
“감히 아비 앞에서 겸손을 떠는 것이냐?”
소희가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쥐새끼처럼 무엇을 엿듣고 있는 것이냐?”
갑작스러운 용두방주의 호통에 용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곧 자세를 낮춰 살금살금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송구하옵니다. 바로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겁에 질린 하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씨, 뭐야!’
비로소 용하는 한숨 돌리며 다시 문 앞에 귀를 기울였다.
바로 그때 소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겸손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대체 무슨 일들을 하기에, 우리 소희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냐?”
짜증이 짙게 밴 방주의 질문에 소희는 무엇인가 대답을 해야 했다. 그리고 소희가 어떤 대답을 할지 누구보다 기다려지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용하였다. 또한 소희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가슴에 통증을 느낄 만큼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인가. 용하는 고개를 접으며 체념하고 말았다.
길게만 여겨지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소희가 입을 뗐다.
“아버지도 알다시피, 저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물건에 대해선 흥미가 없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느냐. 그래서 이 아비가 네 연구에 필요한 거라면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것 아니냐.”
“하여, 이번에도 창의부흥원…….”
마침내 모든 게 들통나고 마는 것인가. 현기증과 함께 소희의 목소리가 사우나에서처럼 들렸다. 용하가 이렇게 정신을 잃어 가고 있을 때였다.
“원장님도 모르는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보려고, 그것에 정신이 팔려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제야 용하는 안도하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용하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 방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왜, 김 원장과 함께 머리를 모으면 일이 더 쉽지 않겠느냐?”
“함께할 일은 당연히 같이합니다. 하지만 원장님보다 제가 한 수 위라는 걸 보여 주려면 내세울 만한 저만의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호, 그래!”
용두방주는 흡족해하며 소희가 어찌나 대견했던지, 최근 보기 드물게 껄껄거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더는 들을 것도 없겠구나. 우리 소희의 의중을 알았으니, 이 아비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거라.”
“네, 아버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날의 급박했던 상황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윽고 용두방주가 소희의 방에서 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아직 믿기지는 않았지만, 그제야 용하는 길게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차, 내가 지금 이렇게 한가할 때가 아니지.’
그 순간 용하의 머릿속에 무엇인가 불현듯 스쳤다. 창의부흥원을 지나가던 방주가 혹시라도 다시 자기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용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없다!”
숲이 우거진 곳을 향해 내달리던 용하는 가시덤불 때문에 여의찮았던 순간을 떠올리고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누구인가. 두뇌 집단인 창의부흥원을 총괄하는 기관장 김용하가 아니던가. 그런 내가, 내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 고생을 하고도 미련하게 그 길을 또 선택할 것 같더냐. 절대 불합리한 쪽에 무리수를 둘 리 없다.”
용하는 장삼을 꺼내 들었다.
“돌아가는 길은 하늘길을 이용할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다름 아닌 닌자술이었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수많은 나무와 장삼을 이용한 닌자들의 특별한 이동술.
다소 어설픈 감은 있었지만, 덕분에 예상보다 빨리 창의부흥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용하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연구에 몰두한 척하고 있을 때였다.
“용두방주님 납시셨습니다.”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안으로 모시도록 하세요.”
그리고 곧 스르르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용두방주가 화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 표정! 저 표정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용하는 최대한 속내를 감추려 애썼다.
“안으로 드십시오.”
“됐소! 얼굴 봤으니 이만 가 보겠소.”
용하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고맙소. 우리 소희를 잘 이끌어 주어서.”
의아했다. 하지만 최대한 속내를 감추며 방주의 심리전에 대응했다.
‘소희를 잘 이끌어 주어서 고맙다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이런 말이 나올 만한 대화는 없었지 않은가.’
용하가 엿들었다는 사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주는 용하가 자기가 던진 미끼에 분명 걸려들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별말씀을요, 제가 뭐 한 일이 있나요. 영특하신 소희 낭자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어, 제가 오히려 고마울 따름입니다.”
예상 밖의 대답에 용두방주의 눈이 조금 커졌다.
‘흠, 만만찮은 녀석이군. 말 받아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그런데 저 얼굴에 난 긁힌 자국들은 대체 무엇인가. 저런 상처는 숲속을 도망치듯 달렸을 때 나는 상처가 아닌가.’
상대가 강하다는 것을 느껴서일까. 방주는 속내를 더욱 깊이 감췄다. 그리고 용하의 얼굴에 난 상처에 대해서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허허,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오. 나는 괜히 어린 우리 소희가 일에 방해나 되지 않을까, 늘 염려스럽다오.”
용하는 허리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그렇지 않다는 의중을 비쳤다.
“김 원장의 생각이 그러하다니, 그 말만 믿고 나는 이만 돌아가 보겠소.”
이번에는 허리를 깊이 숙여, 살펴 가라는 의사를 표했다.
이렇게 용하가 최대한 말을 아끼는 이유는 용두방주의 심리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요리조리 건드려 봤지만, 좀처럼 용하가 걸려들지 않자, 용두방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나가 버렸다. 그리고 곧 문이 스르르 닫혔을 때였다. 비로소 용하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목적한 바가 바로 코앞이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총동원해서 뜻한 바를 실현해야 한다.”
차시환혼(借屍還魂)을 염두에 두고 어금니를 깨물었지만, 사실 실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 * *
그날 이후 개방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원장님, 원장님! 드디어 제가 그날을 찾아냈습니다.”
개기일식의 날을 계산해 낸 소희가 동네가 떠나갈 듯 소리를 지르며 찾아왔다. 용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소희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소희 아가씨 납시셨습니다.”
“안으로 모시도록 하시오.”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 앞에 소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용하는 미간을 좁히며 강렬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소희는 자기 잘못을 깨닫고 움찔 수그러졌다.
“들어오십시오.”
소희는 쭈뼛거리며 겨우 걸음을 내디뎌 들어왔다. 이미 반성하는 기색이 역력해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이 멀기에, 앞으로는 절대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따끔하게 짚어 줘야 했다.
“앉으십시오.”
평소와 달리 굳은 표정인 용하를 보는 소희는 차마 앉을 수가 없었다.
“뭐 하고 계십니까? 어서 앉지 않고.”
“원장님 안색이 그리 안 좋은데, 제가 어찌 앉을 수 있겠습니다. 안색이 왜 그리 안 좋으신 건지 알고 있으니, 그만 노여움을 푸십시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을 제가 어찌 믿겠습니까? 소희 낭자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믿을 수 없습니다.”
“거듭 사과드립니다. 제가 너무 기뻐서 그만.”
“제가 믿을 수 없다는 게 바로 그 감정입니다. 희로애락!”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도록 평소 수양에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그리 해 주십시오. 제가 가슴이 조마조마해 못 살겠습니다.”
그제야 소희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반쯤 올려 뜬 눈으로 용하를 바라보았다. 용하 또한 그에 화답하는 의미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기분이 풀렸으니 말씀해 보십시오.”
“개기일식의 날을 찾았습니다.”
“시간은요?”
“시간은 좀 더 계산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예측할 수 없으나,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어디에서 관측할 수 있는지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은…….”
“세상 어느 곳에서나 다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히말라야산맥 에베레스트산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서남부지역 티베트고원의 하늘에서요.”
“서남부지역 티베트고원?”
“네.”
“그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용하는 스마트폰 자료를 하나하나 글로 옮겨 적어 보관한 서책을 보여 주었다. 서책을 빠르게 눈으로 읽어 내린 소희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럴 수가!”
“그동안 진행했던 일들을 끝낼 때마다 하나하나 잘 정리하여 창의부흥원 서고에 봉인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서고의 봉인을 해제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소희 낭자 단 두 사람뿐입니다.”
용하를 올려다보는 소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감당키 어려워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