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37
37화
“기다려라, 21세기여! 머지않아 너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목청껏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엣말로 웅얼거렸다. 이래야만 하는 처지에 한숨이 나왔다.
막연하게 머릿속에만 존재할 것 같았던 일들이 소희라는 한 소녀를 만난 덕에 하나하나 현실로 되어 갔다.
이제 모든 게 완벽했다.
“이제 바라는 건 단 하나. 소희 낭자가 개기일식의 시간과 관측할 수 있는 장소까지 알아내 준다면.”
용하에게는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들을 소희가 반드시 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소희는 지금까지 하는 일마다 작은 실망조차 시킨 적 없이 모든 걸 완벽하게 해냈기 때문이다.
만약 이번에도 그렇게만 해 준다면. 가슴이 다시 한번 벅찼다.
하지만 가슴이 벅찼던 것도 잠시, 용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인상을 구겼다.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 또한 극복해야 아니, 극복할 것이다. 어디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좋은 일만 생각하자. 아찔한 것들은 그때 가서 생각하고.”
용하는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용하의 두 눈이 번쩍 열렸다.
그리고 한풀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도대체, 도대체 몇 굽이를 돌고 돌아야 그곳에 갈 수 있단 말인가.”
* * *
“이보게, 인공!”
“네, 형님.”
“짐작하건대 자네는, 그동안 힘으로 하는 무예만 연마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내 말이 크게 틀리지 않지?”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검술을 연마하기 전 자네 몸을 생각해 보게. 그게 어디 사람의 몸이라 할 수 있었는가를.”
예전 같으면 펄쩍 뛰었을 테지만, 지금의 인공은 달랐다.
“장설 형님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웬일인지 인공은 장설의 말을 순순히 인정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보니 인공의 외모가 예전과는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팔이면 팔, 다리면 다리, 게다가 몸통까지.
헤비급 역도선수처럼 굵직굵직했던 그의 몸집이 한눈에 보기에도 단단하고 날렵하게 변해 있었다.
“수련 중에는 스승님이라 부르도록 하라. 그래야 검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숭고해질 수 있으니, 그리하도록 함이 옳을 것이야.”
“알겠습니다. 허나, 굳이 그래야 하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검을 대함에 있어 숭고해야 생명도 소중히 여길 터. 그 이상 무엇을 더 알고자 하는 것이냐?”
“음, 알겠습니다. 그냥 구도자의 욕심이었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단지 개인적인 소회가 있어서였다. 그러니 괘념치 말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물어보도록 하라.”
웬일인지 인공은 얼핏 미간을 좁히고는 끄덕였다.
“지금까지 나는 누굴 가르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과거 나는, 살상을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적잖이 회의적이었거든.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단 하나의 제자도 키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와 같은 미천한 것에게…….”
“개방의 호위무사실에 자네와 나 말고 누가 또 있는가. 그런데 둘 중 하나가 검을 쓸 줄 모른다? 이거 너무 웃기지 않느냐. 그래서 결심하게 된 것이다. 자네에게 검술을 가르쳐야겠다고.”
“어떤 이유에서든 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호위무사란? 말 그대로 살상이 아닌, 누군가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일하는 무사들이다. 이전에 강호를 떠돌 때와는 달리 사명을 다해야 하는 자리가 생기니, 생각하는 바와 마음가짐도 달라지더구나. 누군가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호위무사에게 검술은 필수가 아니겠느냐. 그래서 자네가 호위무사로서 검을 연마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걸세.”
그제야 인공은 숙연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왜 너를 가르치려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추호도 후회는 없다. 그 이유는, 자네가 기대 이상으로 잘 따라와 주었기 때문이야.”
장설이 소회를 밝히자, 인공은 더 깊이 허리를 숙여 답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뿌듯하구나. 네 녀석한테 인사를 다 듣다니.”
“처음에 저더러 검(劍)을 연마하라고 했을 때는 솔직히 좀 짜증도 났습니다. 이 나이에 제가 뭘 또 배워야 한다는 게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배워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한 게 지금은 매일매일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누구와 대적하더라도 근육을 쓴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고 내공을 쓰도록 하라.”
“네, 스승님. 그리하겠습니다. 아울러 호위무사로서 임무가 아니고서는 절대 대적하는 일 없을 것입니다.”
장설은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인공을 바라보았다.
“자, 오늘은 검에 기를 불어넣는 방법을 가르칠 것이니, 잘 보고 익혀 두거라.”
“네, 스승님. 거듭 감사드립니다.”
장설은 검을 쭉 뻗으며 말했다.
“자, 보거라. 검이 제구실을 할 수 있는 거리는 이게 전부다. 다시 말해 검은 근접무기란 뜻이다. 최대한 뻗어봤자 일곱 자(2m)가 채 못 되는.”
장설은 곧 진각을 내디뎌 인공에게서 순식간에 10여 미터쯤 멀리 간격을 벌리더니 인공을 향해 검을 쭉 뻗었다.
바로 그 순간 치명적이라 할 만큼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인공의 심장부 한구석에 적잖은 충격이 전해졌다.
“헙!”
인공은 가슴을 움켜쥐며 무릎을 꿇었다.
“형님! 이, 이것은… 대, 대체 무엇…….”
심장에 전해진 충격으로 피가 한꺼번에 얼굴로 쏠렸다. 인공의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곧 터져 버릴 듯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형… 형… 형님…….”
무슨 말인가 해 보려 했지만, 생각처럼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마침내 인공은 고통을 호소하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누워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정신을 잃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대로 누워서 보거라!”
심장에 강한 충격을 받은 것치고는 멀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검집에 한 대 맞았다는 느낌일 뿐 내상 하나 없었다.
장설은 나무를 향해 연속으로 검을 쭉쭉 뻗었다.
―휙!
―휙!
―휘익!
세 차례 검을 뻗자 10여 미터쯤 앞에 보이는 세 그루 나무가 그대로 두 동강 났다. 그 광경을 목도한 인공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로만 듣던 아니, 무협 영화에서나 봤던 특수효과 같은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이라고 한다.”
“신검합일!”
“나와 검이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
“즉, 내 몸에 흐르는 기가 검으로 전달돼, 그 힘이 크게 증폭돼 상대를 공격하는 경지이다. 오늘부터는 이 신검합일을 연마할 것이다.”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특수효과로만 보았던 신검합일을 실제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공의 마음 한구석에, 과연 할 수 있을까, 라는 약한 면모 또한 존재했다.
“자신감을 잃지 말거라. 또한 약한 마음도 먹지 말거라. 진정 자기 자신을 신뢰하며 수련에 정진한다면, 누구나 이를 수 있는 경지이다.”
장설의 가르침에 자신감 있게 대답해야 했지만, 자신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장설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필요 없다. 단지 이 장설의 가르침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잘 따라오겠다는 각오만 보여 주면 될 것이다.”
“네, 스승님. 그리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감을 잃지 말거라.”
“네. 스승님.”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하겠다. 내일부터는 신검합일을 본격적으로 연마할 것이다. 아마도 많이 고될 것이니, 각오를 새롭게 하도록 하라. 알겠느냐?”
인공은 허리를 반쯤 숙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만 들어가자꾸나.”
“네, 스승님.”
“어허, 자네는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것인가?”
“네? 그, 그게 다 무슨…….”
“그새 잊은 것이냐? 검술 수련 때만 스승으로 모시라고 하지 않았더냐?”
“아, 즉각 시정하겠습니다. 형님.”
“한 번쯤이야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 허나, 두 번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무림의 섭리이니라.”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검을 품은 장설과 인공. 호위무사실로 향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무사로서의 강직함이 엿보였다.
* * *
어스름한 달빛을 받아 호젓한 창의부흥원. 후원으로 이어지는 문이 열리고 용하가 은밀한 걸음을 옮긴다. 이제 막 창의부흥원을 나온 용하는 사람들 눈을 피해 호위무사실로 향했다.
―사삭, 사사삭!
그의 걸음걸이로 보아,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긴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호위무사실에 당도한 용하는 은밀하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이미 불 꺼진 지 오래된 호위무사실은 바람 한 점 느낄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똑똑!
조금 전보다는 큰 소리였다. 그제야 안에서 옅은 인기척이 들렸는데, 다름 아닌 인공이었다. 용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 시간에 인공 형님이 깨어 있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시간이면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죽은 듯 잠들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의아함을 금치 못해 어리둥절했을 때였다. 문 쪽으로 걸음을 내디뎌 오는 기척이 은밀하게 들렸다. 이윽고 스르르 문이 열리며 인공이 모습을 나타냈는데, 용하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인공의 달라진 모습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이건 뭐, 광덕이가 원빈이 된 꼴이니.
“너는 용하가 아니냐? 네가 이 야심한 시각에 호위무사실에는 어인 일이냐?”
“인공… 형님……?”
용하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느냐? 내가 자네를 이리 대하는 게, 혹 기분이 나쁜 것이냐?”
“아, 아뇨. 그거야 우리끼리 있을 땐, 그리하기로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대체 무엇이 문제인 것이냐?”
용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배를 불룩하게 그리며 말을 이어 갔다.
“형님! 이거, 이거 어디로 간 겁니까?”
그러고는 팔뚝과 허벅지에도 두꺼운 면을 그리며 또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거는요? 이거는요?”
인공은 껄껄거리며 말했다.
“오호라, 그것 때문에 그렇게 토끼 눈을 뜨고 있었구먼.”
용하는 아직도 놀람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엇을 좀 해야 해서 덜어냈는데, 보기 어떠하냐?”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이제 좀 사람 같습니다.”
“이제 좀 사람 같다고?”
곱씹듯 되묻는 인공의 안색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불뚝 성질을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인공을 보는 용하는 생각했다.
‘뭔가 이상해.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던데.’
확인이 필요했다.
“형님! 괜찮으세요?”
“괜찮으냐고? 그게 다 무슨 말이냐?”
“제가 방금 한 말, 말입니다.”
인공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방금 한 말? 무어라 했었느냐?”
시치미도 이런 시치미가 없었다. 그런데 단순히 시치미를 뗀 거라 치부해 버리기엔, 어딘지 꼭지가 당긴다.
“형님! 외람되지만, 묻겠습니다.”
“외람될 것이 뭐가 있느냐. 어차피 자네에게는 개방의 이인자라는 파워가 있지 않은가.”
“이인자라뇨, 당치않습니다. 넘버3!”
“농담이다. 어디 말해 보거라.”
“혹, 그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무슨 일이라니, 그게 다 무슨 말이냐?”
“사람이 너무 달라져서요. 외관은 물론이고 속까지 달라져서,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해서요.”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다만, 장설 형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기로 했다는 것밖에.”
“네에? 장설 형님을 스승님으로요?”
“왜 그리 놀라는 게냐? 그것이 그리도 놀랄 일이더냐?”
“그럼 이게 안 놀랄 일입니까? 인공 형님 성격에 어떻게……?”
“장설 형님을 스승으로 모신다는 게, 내게는 과분한 일이라 생각한다. 진작 형님 같은 분을 만났더라면, 아마도 내 인생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 순간 인공은 깊은 눈으로 용하를 직시했다.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그때였다. 어디에선가 옅은 인기척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