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4
4화
“저잣거리엔 갖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니, 일단 산으로 몸을 숨기자꾸나.”
어둠이 내리는 중원. 차가운 그믐달이 고요한 세상을 처연히 내려다본다.
정적이 감도는 차가운 대지 위에 달빛을 받으며 움직이는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헤집으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두 개의 그림자. 그들은 다름 아닌, 인공과 용하였다.
비록 지금은 평온해 보이지만, 한 시간 전만 해도 그들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사패산으로 가실 겁니까?”
행보를 묻는 용하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엿보였다.
“아직도 우리가 처음 닿았던 곳이 사패산이라 생각하느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스님은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용하는 습관적으로 날을 세우며 되물었다.
“내 생각에는 지형으로 보아 사패산이라고 단정 짓기는 좀.”
얼핏 단호해 보였지만, 사실 인공조차 확신이 있어 하는 말은 아니었다.
“참, 이상하시네. 분명 사패산터널에서 사고가 났는데, 왜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시는지.”
“아마도 그것 때문에 사패산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아닌가 싶구나. 잘 생각해 보거라. 이곳이 정말 사패산터널인지. 내 생각엔 말이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이곳은 사패산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드는구나.”
“좋아요, 사패산이 아니라고 칩시다. 그럼 대체 어디입니까?”
현재로선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다. 그런데 용하는 웬일인지 별것도 아닌 일에, 괜히 날을 세우며 들이댔다.
“흥분하지 말고 들어. 확실치는 않지만 내 생각에 이 산은, 아미파의 본거지인 아미산이 아닐까 싶다.”
인공의 말에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사패산이라고 믿고 있었을 땐, 그래도 동네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에 위안이라도 됐는데, 이제 난생처음 보는 아미산이라니.
* * *
아미산 초입으로 들어서자 연검을 휘두르는 여인들의 공격이 빗발쳤다. 베일로 몸을 가린 여인들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것처럼 몽환적으로 팔랑거리며 연검술을 구사했다.
“스님, 이 여인들은 다 뭡니까? 모두가 절세미인이라 마음에 들기는 한데, 왜 다짜고짜 우리를 공격하는 거죠?”
“외모에 현혹되지 말거라. 원래 독버섯이 보기도 좋고 화려하지 않더냐.”
“그럼, 이 일을 어찌해야 합니까?”
“일단 살고 봐야 하니, 가지고 있는 능력을 총동원해서 연검을 방어하거라.”
“연검을요? 맨손으로 말입니까?”
죽음과 직면한 용하로서는 격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할 줄 아는 거라곤 검도뿐입니다. 그런데 맨손으로 어떻게 저 낭창거리는 연검을 대적하란 말입니까?”
“잠깐만 기다리거라. 검 대신 쓸 만한 것이 있나 찾아보마.”
용하의 시선은 줄곧 아미파 여인과 인공을 번갈아 주시했다. 인공은 근접무술로 아미파 여인을 대적하고 있었다. 아미파 여인에게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 기민한 동작으로 공격을 퍼붓는가 하면, 아미파 여인이 연검을 휘두를 거리를 만들지 않았다.
연검술을 절기로 하는 아미파 여인들은 인공의 근접무술에 아무런 대책이 없어 보였다. 이 모든 게 인공의 영특한 전술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이었다. 무릇 검술이란 공격하는 자와 공격을 받는 자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인공의 근접무술은 상대에게 거리를 만들 틈을 주지 않으니, 아미파의 검기인 연검의 쓰임은 무용지물일 수밖에.
용하는 인공을 흘깃거리며 그의 무술을 흉내를 내어 보았다. 어설픈 동작은 매를 벌 따름이었다. 연검이 몸에 닿을 때마다 따끔거렸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살상이 난무하는 무림에서 죽어도 벌써 죽었어야 할 목숨이 고작 따끔거림을 느끼고 있다니. 두 눈을 부릅뜨고 아미파 여인이 휘두르는 연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용하의 몸에 닿는 연검은 검의 날이 아닌 면이었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무림고수의 화려한 검술 그리고 배려. 그 광경을 목도하는 용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럼에도.
“지금 뭐 하는 짓이오? 혹, 나를 얕잡아 보고 이러는 것이오?”
“홋, 그럴 리가요.”
“그게 아님,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란 말이오? 검을 눕힌다는 건, 살상할 마음이 없다는 뜻 아니오?”
“그럴 리 또한 없습니다. 단지 덥석 잡아먹으려고 하니, 제가 들인 노력이 아깝다는 생각에, 좀 가지고 노는 중입니다.”
“뭐라! 이런 요망한 것.”
그때였다.
“어이, 김 관장! 여기 작대기.”
인공은 어디서 주웠는지 꺾어진 나무 하나를 던져 주었다.
“무식하게 작대기가 뭐예요? 목검!”
용하는 아미파 여인에게서 빠르게 떨어져나오며 거리를 만들었다. 검 두 개가 들어갈 만한 거리를 둔 용하는 상단자세를 취했다. 그것을 본 아미파 여인은 움직임을 멈추고 용하를 예의주시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자가 지금 대체 무엇을 하려고 저런 자세를 취한 걸까? 나뭇가지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건, 내 이마를 겨냥하고 공격하겠다는 말인데.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 저런 어설픈 자세로 공격해도 좋을 만큼. 홋, 좋아! 못 이기는 척하고 한 대 맞아 주지 뭐. 그래야 다음 초식도 볼 수 있을 테니.’
그때였다. 용하는 이제껏 해 온 어떤 대련보다 신속하게 아미파 여인을 향해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아미파 여인의 눈에는 삼척동자가 장난감 칼을 들고 아장아장 다가오며 재롱을 부리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아이고, 귀여운 것!’
그러고는 용하가 휘두른 작대기에 이마를 은근슬쩍 가져다 대더니 슬그머니 몸을 눕혔다. 윽! 치명적인 척 엄살을 부리는 아미파 여인. 그 모습을 바라보는 용하는 우쭐한 기색이었다.
‘홋, 일이 점점 흥미로워지는군. 시간을 두고 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아미파 여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 * *
조금 전 아미파 여인의 신호로 그들의 공격은 사라졌고 그들 또한 사라졌다.
아미산을 오르는 인공과 용하. 두 사람의 숨소리는 당장에라도 삶의 끈을 놓고야 말듯 헐떡거렸다.
“스님, 아미파 여인들은 어디로 간 걸까요?”
“어찌하여 그것이 궁금한 게냐?”
“궁금해서가 아니라, 다 이긴 싸움인데 놓쳐 버린 게 아까워서 그렇죠.”
“지금 다 이긴 싸움이라 했느냐?”
“그럼 아니란 말입니까?”
“네 녀석이 아미파 여인에게 농락당한 것이다.”
“뭐라고요? 제가 아미파 여인에게…….”
용하는 두 눈을 치켜떴다.
“그 눈 내리깔지 못하겠느냐!”
인공의 치켜뜬 두 눈은 당장에 무슨 일이라도 낼 듯 섬찟했다.
용하는 몸에 배인 습관처럼 말대꾸를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그대로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공손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절대 없도록 하겠습니다.”
용하가 이렇게 얌전해진 건, 아마도 조금 전 아미파 여인을 대적하는 인공의 실력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미파는 무림의 아홉 개 정파 중 하나다. 그리고 아까 그 여인들은 자기들 본거지인 이 산을 최전방에서 수비하는 고수 중의 고수들이다. 그런 고수들이 자네가 휘두르는 작대기가 두려워 퇴각을 했겠느냐?”
듣고 보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 순간 용하는 얼굴이 후끈거리며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미파 여인들은 어디에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인공의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누군가 은밀하게 미행하며 지켜보고 있다는 건 원래 그런 거니까.
“혹시 기억하고 있느냐?”
인공의 이 말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아까 저잣거리에서 우리가 날아오는 창에 맞지 않고 달아났던 거 말이다.”
“그게 뭐가 어때서요?”
“흠, 단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말투구나.”
“뭘 그런 걸 다 고민해요? 머리 빠지게.”
“다시 묻겠다. 분명 네 녀석 입으로 한 말이다. 창이 정지된 듯 보인다고 하지 않았느냐?”
“물론 그랬죠. 그런데 그건.”
바로 그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해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걸 믿어야 하는 것인가. 가슴이 떨렸다.
용하는 떨리는 가슴을 달래며 인공을 바라보았다. 그가 하려던 말을 조심스럽게 상상해 보았다.
그러기를 잠깐, 인공이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금세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인공이 말하는 그것은 다름 아닌 물리학에서 말하는 상대성이론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가 날아오는 창만큼 빠른 속도로 달렸단 말인가.’
더는 태연할 수가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미간이 좁아졌다.
그것을 본 인공은 등을 돌리며 짧게 한마디 했다.
“알아들은 모양이구나.”
인공은 처연하게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발아래 보이는 산기슭 여기저기에 벚꽃들이 나풀거렸다.
벚꽃으로 보이는 이들의 정체는 실은, 아미파 수비대 소속의 여인 아니, 무사들이었다.
영원히 지지 않을 것만 같은 벚꽃잎들. 흩날리는 벚꽃들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적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무림은 낯선 곳이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적과 친구가 돼야 한다. 괜히 날을 세워서 이득 볼 게 하나도 없다.’
인공은 멀리 두었던 시선을 다시 가져와 용하를 바라보았다.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느닷없이 어찌하다니, 대체 무엇을 묻는 것이며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막연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그래서인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이런 순간에 어떤 말을 듣고 싶어 물었겠느냐? 아미파 여인들 말이다.”
“그 문제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리 말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
“우린 고작 둘입니다. 게다가 저는 무공이 그리 뛰어나지도 못합니다. 다시 말해 형님 혼자 대적하는 거나 다름없는 싸움입니다. 그러니 행여 아미파를 건드렸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인공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에효!
―에효!
두어 차례의 한숨이 연이어 새 나왔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뗐다.
“네 녀석 말이 맞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방법을 제시해 보거라. 그래서 어찌했음 좋겠느냐?”
또다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용하의 표정에 초조함이 엿보였다. 인공의 뜻과 일치할 만한 의견을 찾지 못해서였다.
그리고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을 때였다.
마침내 용하의 입에서 말문이 터졌다.
“마음 같으면 아미파 여인들과 친해지는 게 가장 바람직한 방법인데,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겠죠? 제대로 비유한 거 맞나?”
용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인공을 바라보았다. 인공의 표정으로 보아, 비난받을 말을 한 건 아닌 듯했다.
“좋은 생각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 할 만큼 비관적인 발상은 아닌 것 같구나.”
“아미파 여인들의 마음을 떠볼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일단 부딪쳐 봐야 해서 아까 싸움을 걸었던 것이다.”
“뭐라고요? 다 알면서 일부러 그랬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아미산에 발을 들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했느냐? 이곳 무림에서는 각 문파마다 자기들 영역이 정해져 있어, 누구든 그 영역을 침범하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고 찢어 죽이려 들 것이다.”
“아, 그걸 알면서도 떠보려고 사지나 다름없는 이 아미산엘 들어왔다는 거군요. 썩 믿음이 가는 건 아니지만,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일단 믿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용하의 빈정거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인석아, 넌 왜 매사에 그렇게 삐딱한 게냐? 사춘기 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것이냐?”
인공이 묻자 용하는, 쀼루퉁해서 되물었다.
“제가 뭘요?”
“이럴 땐 그냥, 네 알겠습니다! 한마디면 깔끔하고 좋았잖아. 꼭 그렇게 싸가지없이 말을 해야 속이 후련했느냐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잘못했어요. 그건 그렇고 아미파 여인들을 진단해 본 결과는요?”
바로 대답을 들을 거라 기대했는데 인공은 입을 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심경에 무슨 변화가 생긴 게 분명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찰나에 불과한 시간… 그 짧은 시간조차 용하에게는 길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