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40
40화
“혹시 이런 것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용하가 소희 앞에 내놓은 건 머리카락보다 조금 더 굵어 보이는 구리선이었다.
구리선을 본 소희는 다소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이것은 구리가 아닙니까?”
“잘 보셨습니다.”
“그런데 구리를 어떻게 이렇게 가늘게 뽑아낸 겁니까? 국수보다도 더 가느다랗습니다.”
소희가 놀라는 모습을 보는 용하는 내심 참담했다. 소희라면 적어도 이런 구리선을 한 번쯤 보지 않았을까, 했던 기대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실망감과 허탈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치켜뜬 눈, 새 부리처럼 모아진 입, 그리고 저 목소리…….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이렇게 가는 구리선은 처음 보았다는 의미겠지? 아무래도 내가 지나친 기대를 한 것 같구나…….’
개탄스러웠다. 용하의 속내는 그의 얼굴에 여실히 드러났다. 용하의 그런 심경의 변화를 예리한 소희가 놓칠 리 없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소희 낭자!”
심상찮은 목소리였다. 뭐랄까, 조금 전 단말마를 남기고 죽음의 문턱을 넘을 뻔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을 본 것 같은.
“…….”
반면 소희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런 소희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용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씀은 무슨 방법이라도 있다는 얘기입니까?”
“네,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헌데, 그것이 손이 많이 가는 일이어서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소희의 말에 용하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잠시 침묵을 지켰다. 용하의 이런 표정은 소희 말에 깊이 공감한다는 의미였다.
“아무래도 좀 그렇겠죠?”
용하의 표정에 실망감이 스치자, 소희는 무엇인가 놓치기 싫은 순간과 직면이라도 한 사람처럼 잠깐의 틈도 두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 개방은 어느 정파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노동력이 풍부합니다.”
소희가 곧 가능성을 시사하자, 용하는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경으로 간절히 매달렸다.
“부탁입니다. 꼭 좀 만들어 주십시오.”
반면 소희는 잠시 시간을 두고 대답했다.
“…원장님! 저는 무조건 원장님을 지지합니다. 원장님 말씀이 틀리든 맞든 그런 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나를 그리 봐준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만한 구리선을 만들려면 개방에 존재하는 대장장이들을 전부 끌어모아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런 구리선을 만들 수 있다면 해 주십시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방주 대인의 도움이?”
용하는 두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은 아니 될 말입니다. 혹시라도 방주 대인이 이 사실을 아는 날엔…….”
소희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찾아보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일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동안 우리가 몰래 진행해 온 모든 연구 성과를 방주 대인께서 알게 될 텐데, 그리할 수는 없습니다.”
“네. 바로 그 점 때문에 쉽지 않아 보입니다.”
소희의 대답은 처연했다.
“소희 낭자!”
“네, 원장님.”
“그건 최후의 방법으로 두고,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봅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일단 장설과 인공, 두 형님의 힘을 좀 빌릴 생각입니다.”
“고작 두 분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두 분에게는 방주 대인께서 주신 권력이 있지 않습니까?”
“권력?”
“두 사람은 소희 낭자의 호위무사이기 전에 창의부흥원 산하 기록실의 기록원들입니다.”
기록원.
소희는 기록원이라는 한 마디에 용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얼추 간파해 냈다.
“그 말씀은, 개방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기록원에게 점수를 후하게 받고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란 말씀인 거죠?”
“정확히 간파하셨습니다. 점수로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21세기에서나 먹힐 만한 발상이었다. 모든 게 점수로 평가되는. 아무튼 이렇게 두 사람의 의견은 하나로 좁혀졌다. 그리고 곧 소희는 실천에 옮겼다.
“우선 다음 계획이 수립될 때까지 이 문제는 소희 낭자에게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 * *
그날 소희는 사람들 눈을 피해 호위무사실로 찾아갔다.
“소희 낭자께서 호위무사실엔 어인 일이십니까?”
“왜요? 제가 못 올 데라도 왔다는 말인가요?”
장설과 인공, 두 사람을 대하는 소희는 당돌하기 그지없었다.
“당치않습니다. 단지 저희는 호위무사실이 생긴 이래 처음 몸소 이곳을 찾아 주신 것에 대해 영광스럽다는 마음을 말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소희는 용하에게서 받은 구리선을 불쑥 들이대며 물었다.
“이거 만들 수 있겠소?”
장설은 다소 놀란 기색으로 되물었다.
“이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반면 인공은 차갑게 변하며 생각했다.
‘이곳 무림에서는 귀신이 온다 해도 구리를 저렇게 가늘게 제련할 수 없다. 저렇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은 오직…….’
그 순간 인공의 뇌리에 용하가 떠올랐다. 그리고 소희와는 될 수 있는 대로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괜히 알은체하게 될까 봐 염려되어서였다.
예전 같으면 분명 호들갑을 떨어 가며 아, 그것은 먼 미래의 세계가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 하면서 주책을 떨었을 테지만, 검술과 정신을 수양하기 시작한 지금 인공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인공께서는 왜 말씀이 없으시오?”
“아 눼, 그게 저는 처음 보는 것이라…….”
“처음 것이어도 무슨 생각이 있을 것 아니오?”
“글쎄요, 제 생각엔 실력 있는 대장장이가 구리 동전을 녹여 몇 날 며칠을 두들겨 늘린다면 혹 이런 모양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정확히 보셨소. 제가 두 분을 찾아온 이유가 그것 때문이오.”
소희의 말에 장설과 인공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장설이 입을 뗐다.
“아뢰기 황송하오나, 좀 알아듣게 말씀을 해 주십시오. 대장장이와 저희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까?”
“이곳 개방은 중원에서 온갖 일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모두 모인 곳이오. 두 분께서 개방을 샅샅이 뒤져 중원에서 대장장이 일을 했던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 주시오.”
“아니, 그 어려운 걸 저희 같은 노인이 어떻게…….”
“두 분이 적임자입니다. 두 분이라면 별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소희는 작정이라도 한 사람 같았다. 아니, 확신이었다.
“적임자라니, 터무니없이 말씀입니다.”
어떻게든 발뺌을 하려 드는 장설.
“생각하기 귀찮으면 말씀만 하세요. 이 소희가 다 알려 드릴 테니.”
장설과 인공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소희는 더는 지체할 수 없었던지, 명령하듯 입을 뗐다.
“두 분은 당장 방(榜)을 붙이시오.”
“방을요?”
장설과 인공은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두 분은 창의부흥원 산하의 기록실 일을 담당하는 기록원들 아니오.”
“물론입니다만.”
“아버지께서 두 분에게 부여한 권한이 있었을 것이오. 그것을 잊지는 않았을 것 아니오.”
“그 권한을 잊을 리가요.”
“그럼 서두르세요. 아버지가 부여한 권한으로 개방의 방방곡곡 방을 붙이세요.”
“방이라면 대체 어떤 방을 붙이라는 것인지…….”
“개방에 있는 모든 사람을 상대로 대장장이 일을 했던 사람에게 후한 점수를 주겠다는 방 말이오.”
“아~아~”
그제야 소희가 무슨 속셈으로 방을 붙이라는 것인 줄을 알아차린 장설과 인공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지금 입이나 벌리고 침 흘릴 때가 아니오. 서두르시오!”
소희의 얼음장 같은 명령에 장설과 인공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인공은 서둘러 문방사우를 가져와 먹을 갈았고, 장설은 소희가 알려 준 대로 공을 들여 방을 적었다. 그리고.
그날 밤.
―사삭사삭, 사사삭!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며 창의부흥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있었다. 다름 아닌 인공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여느 때와 달리 가볍고 날렵했다.
이윽고 창의부흥원 뒷문에 도착한 인공은 낮은 목소리로 용하를 불렀다.
“용하야!”
단 한 번 불렀을 뿐인데 뒷문 쪽으로 종종걸음치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형님! 이 야심한 밤에 어인 일이십니까?”
“문 열지 말고 그냥 듣거라.”
“네, 형님. 말씀하십시오.”
“소희 낭자에게 구리선을 만들라고 하였느냐?”
“네, 형님. 그리 협조를 부탁했습니다.”
“구리선은 무엇에 쓰려고 그러는 것이냐?”
“변압기를 만들 것입니다.”
“무어라! 변압기?”
“네, 형님.”
대화가 깊어질수록 두 사람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흘렀다.
“이쯤에서 그만두거라!”
“왜요, 형님?”
“변압기를 만들려면 많은 양의 구리선이 필요할 테고, 그래서 소희에게 구리선을 만들 방법을 주문한 것이 아니더냐?”
“네, 맞습니다.”
“낮에 소희가 호위무사실로 찾아와 대장장이를 모으는 방을 붙이라 했다. 그 말은 머지않아 용두방주도 이 사실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용하는 대답 대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용두방주에게 전기를 만드는 방법은 물론, 축전하는 방법까지 노출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지구의 역사는 어찌 될 것으로 생각하느냐? 무엇보다 우선 전기를 발견한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나 16세기 물리학자 윌리엄 길버트 그리고 에디슨의 영감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 텐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인공의 말에 용하의 입에선 탄식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형님. 미처 거기까지 생각지 못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느냐? 아마도 전기를 발명한 사람으로 용두방주의 이름이 역사에 올라가지 않겠느냐?”
“…….”
엉뚱한 발상은 이쯤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 * *
“보조배터리를 충전할 만한 적은 양의 전기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비단을 문질러 만든 정전기라도 이용해 볼 수 없을까 고민했지만, 전압이 턱없이 부족함을 알게 되었다. 일단 전기를 만들겠다는 계획은 접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앞으로 펼쳐질 일들을 생각하면 미련이 남았다.
개기일식이 있는 날 서남부 티베트까지, 그리고 에베레스트를 말 일백 필을 끌고 올라가는 것까지, 이 모든 것들을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게 아찔하게 느껴졌다. 혼자 가는 것도 힘겨웠던 서남부지역. 그런데 그 멀고도 험난한 길을, 말 일백 필까지 몰고 가야만 한다니.
그날 저녁,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용하는 그것을 식히기 위해 후원을 거닐고 있었다. 그때 반대쪽 후원에서 장설과 인공이 검을 수련하느라 질러 대는 기합 소리가 어스름해진 저녁 공기를 갈라놓았다. 일순 용하의 눈이 기합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기합 소리가 장난이 아니네!”
용하는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혹여 수련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매우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수련 광경이 보이는 곳에 도착한 용하는, 몰래 그들을 지켜보았다.
검을 수련하는 인공. 그리고 그 한편에서 기 수련에 온 정신을 집중한 장설. 용하는 잠시도 두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때였다. 공기를 움직여 기를 모으던 장설의 손에서 옅은 정전기가 발생했다.
“어, 저건!”
용하는 장설의 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장설의 동작이 조금 전보다 눈에 띄게 커졌다. 그의 손에 모아진 기에서 발생하는 정전기 또한 눈에 띄게 강렬해졌다.
“전기다!”
그 순간 용하는, 장설이 만들어 내는 정전기를 잘 활용하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를테면, 장설의 수련을 도와 그가 기를 마음껏 운용할 수 있게 해 준다면, 그의 정전기 또한 생각대로 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절망으로 치닫던 엉뚱한 발상에 일말의 희망이 엿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