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43
43화
“방주께서 함께하시고자 합니다.”
별말 아니었지만, 이 말 한마디를 한다는 게 너무나 힘겹게 느껴졌다.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용하가 난색을 지어 가며 한 말에, 장설 또한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용두방주께서 함께하겠다는데, 선택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누가 들어도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 따위 없었다.
“방주께서 자리를 함께하자고 제안했다면 저희로서는 영광이지 않습니까?”
“허허, 인공 자네 말이 백번 옳은 소리야.”
장설의 말에 인공이 말을 받았다.
“어디 백 번뿐이겠습니까? 괜히 거절했다가 호위무사 생활 꼬입니다요, 형님!”
분위기 파악을 하느라 눈동자를 떼굴떼굴 굴리던 용하가 마침내 입을 뗐다. 결론이었다.
“그러니까! 두 분 말씀은 용두방주의 제안을 받아들이자는 거죠?”
인공과 장설은 서로 눈치만 보았을 뿐, 누구 하나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별것도 아닌 말을 뭘 그리 어렵게 하십니까? 그냥 가서 즐깁시다. 방주 대인이 만드는 자리, 의외로 괜찮습니다.”
용하의 말에 인공과 장설이 무릎을 탁! 내리쳤다.
“바로 그거거든! 아무래도 덩어리가 큰 놈이 쏘는 자리니까, 그만큼 빛나는 자리겠지?”
분명 다 같이 좋아해야 할 순간에 용하의 미간이 좁아졌다.
“한 가지 유념하셔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끼리 간단하게 하려고 했던 소연회가 방주 대인이 개입하면 커진다는 겁니다. 약주 말입니다. 방주 대인이 권한다고 다 받아 드시면 안 됩니다. 괜히 술에 취해 말실수라도 하는 날엔…….”
용하는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던지, 진저리를 치는 것으로 부정의 뜻을 표했다.
장설이 강렬한 눈으로 인공을 직시했다.
예전 같으면, 내가 뭘? 그래서 어쩌라고? 하며 능청을 떨며 대들었을 테지만 자금의 인공은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염려 마십시오. 요령껏 분위기만 맞출 생각입니다.”
말만 들어도 듬직했다. 처연한 인공의 대답에 장설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 순간 장설이 인공에게 보내는 눈빛은 칭찬의 의미였다.
* * *
예상대로 연회는 풍악만 울리지 않았다 뿐이지, 성대하게 치러졌다.
일전에 치러졌던 용하를 위한 힐링 연회 때와 마찬가지로 연회장 하녀들이 방주를 비롯한 세 사람 옆에 앉아 술 시중을 들었다.
네 사람의 하녀들 곁에 놓인 교자상 위에 하얀 도자기로 만든 연적처럼 생긴 작은 술병이 열 개씩 놓여 있었다.
어여쁜 연회장 하녀가 술을 따르자 장설의 양 볼이 홍조를 띠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여인이 따라 주는 술을 받아 본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어서였다.
그 광경을 본 용두방주가 흥을 돋우기 위해 한마디 했다.
“장설께서는 벌써 술에 취한 것이오?”
“아, 아닙니다. 제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술에 취하겠습니까?”
“진정이시오, 진정 아니란 말씀이오?”
“네, 그렇습니다. 용두방주님.”
“그런데 어찌하여 얼굴색이 붉게 변한 것이오?”
“아, 제 얼굴이 그렇게 벌겋습니까?”
“모르셨다는 말이시오? 누가 봐도 홍당무 같은 얼굴인데.”
“아, 그건…….”
장설은 더는 아무런 항변도 못 한 채 고개를 숙였다.
어지간해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 장설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건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장설 형님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던가?’
지금 무공 고수 장설이 보이는 모습은 한없이 순박해 보였다. 비단 용하뿐 아니라, 인공의 눈에도.
사실 인공도 내심 설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소에 음주와 가무를 즐겼지만, 지금처럼 미모의 여인이 옆에 붙어 앉아 간혹 풍만한 가슴을 팔에 비비대며 다소곳이 시중을 들어주는 자리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 분위기를 지켜봐야 하는 용하는 내심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원장님,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용하의 시중을 드는 하녀가 나직하게 한 말이었다.
하녀의 말에 용하는 가벼운 미소를 건네며 옅은 고갯짓을 해 보이며 속내를 숨겼다.
용하의 표정이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지, 하녀는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술병을 들었다.
마지못해 술잔을 드는 용하는 썩 달갑잖은 표정으로 하녀가 권하는 술병 가까이 잔을 가져다 댔다.
주석으로 만든 용하의 잔에 곡주가 찰랑찰랑 채워지기 시작했다. 술 한 잔이 채워지기까지의 시간이 유난히도 길게만 느껴졌다.
이윽고.
“자, 개방의 미래를 위하여 한잔 드십시다.”
용두방주의 건배 제안에 세 사람은 잔을 높이 들었다.
―턱!
주석으로 만든 잔이어서인지, 둔탁한 소리를 냈다.
세 사람의 하녀 곁에 놓인 교자상 위에 각각 열 개씩 놓여 있던 술병이 이제 네 개씩만 남아 있었다.
용하는 염려의 눈빛으로 장설과 인공 그리고 술병을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그런 용하의 눈치를 장설은 물론 인공이 모를 리 없었다.
장설은 용하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지긋한 눈빛으로 한동안 바라보았다. 장설과 한동안 눈을 마주하고 있던 용하는 마침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신뢰한다는 의미였다.
‘저는 장설 형님과 인공 형님을 믿습니다.’
더는 용하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머무는 일은 없었다.
어느 술자리나 그렇듯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그만큼 밤 또한 깊어갔다.
방주와 용하 일행 사이에 더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네 사람은 각자의 하녀와 은밀한 담소를 나누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였다.
“분위기가 좋구려. 혹 잠자리 시중이 필요하시면 말씀들 하시오. 단, 김 원장은 예외요.”
도발적인 용두방주의 말에 장설과 인공은 소스라쳤다.
“당치 않습니다. 저희는 부처를 섬기는 불제자들입니다.”
“아, 그러시오? 그런데 어찌하여 불제자라 자처하는 자들이 술과 고기는 물론, 여자를 그리 가까이했던 것이오?”
장설과 인공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광경을 보는 용하는 왠지 방주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대인! 오늘의 분위기는 대인께서 만들었고, 이런 분위기라면 규율에서 잠시 벗어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은, 오늘의 책임이 나한테 있다는 게요?”
“애초, 우리의 계획은 조촐하게 한잔하고 물러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방주 대인께서 함께 자리를 가졌으면 하는 부탁을 해 오지 않았습니까? 사실 우리의 처지는 대인과 함께한다는 게 적잖이 불편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인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유는, 혹시라도 서운해하실지 모를 대인의 처지를 고려해서 그리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용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방주가 마침내 입을 뗐다.
“알겠소. 내가 술에 취해 망언한 것 같소. 김 원장을 비롯해 두 분께 정중히 사과하리다.”
용두방주의 말에 용하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불안에 떨고 있던 인공과 장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용하 일행의 반응을 방주가 모를 리 없었다.
‘딱한 사람들 같으니. 극도의 불안감 속에 갇혀 있다 해방감을 맛보는 그 기분이 어떠한가?’
방주의 질문에 굳이 대답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닌,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에서 이제 막 벗어난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극한의 시원함이었다.
“방주 대인! 사과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한 가지 청해도 되겠습니까?”
“또 무슨 청이 있소?”
“불편하시다면 없었던 거로 하겠습니다.”
“아니오, 그럴 리가요. 어디 말해 보시오.”
“연회장 하인들에게 명하여 호위무사실에 작은 주안상을 마련해 주셨으면 합니다.”
“호위무사실에 주안상을?”
“네, 대인.”
“이유가 궁금한데 말해 줄 수 있겠소?”
“제 소견으로는 장설과 인공, 두 호위무사가 대인 앞에서 술을 마신다는 게, 아마도 적잖이 긴장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여 두 사람이 긴장을 풀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호라, 갸륵하신 생각이오. 내 그리하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세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십시오.”
“세 사람이? 그것은 왜 그런 것이오?”
“저 또한 함께 자리하여 두 분을 독려하고자 함입니다.”
“오호라, 역시 그릇이 남다르시오. 그리하겠소.”
시원시원하게 용하의 청을 들어주는 방주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 * *
호위무사실에 먼저 도착한 용하 일행은 주안상이 오기를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었다.
“장설 형님과 인공 형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잠시 말씀을 삼가십시오. 연회장 하인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장설의 말에 인공이 한마디 거들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아직은 우리만의 자리가 아닌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어떤 말이 새 나갈지 모르니 하대하겠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공과 장설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인공과 장설. 호위무사 두 사람은 오늘의 분위기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보통은 장설이 먼저 입을 열었지만, 이번 물음에는 말을 아낀 채 인공을 바라보았다.
장설의 눈치를 찰떡같이 알아차린 인공이 이때다 싶어 경망스럽게 입을 뗐다.
“아마도 영원히 기억되지 않을까요? 저는 태어나서 이 나이 먹도록 그런 분위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솔직히 연회를 즐기는 동안 잠시 불가에 몸을 둔 것을 후회하는 순간이 있었으니까요.”
인공의 솔직한 고백이 끝나기 무섭게 용하는 장설에게 눈을 돌렸다.
“장설 형님은요?”
용하의 물음에 장설은 선뜻 대답을 못 한 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아마도 인공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굳이 대답 안 하셔도 좋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믿겠습니다. 두 분에게 부디 오늘이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때였다. 밖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인기척이 들리더니 곧, 문이 스르르 열렸다.
연회장에서 온 하인들의 손에 들린 주안상이 들어왔다.
“아이고, 간단하게 준비해 달라고 했건만, 이건 상다리가 부러지겠소.”
용하의 말에 하인 중 하나가 방주의 말을 전했다.
“창의부흥원 원장도 함께하는 자리이니, 성대하게 준비하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하인의 뒤로 세 명의 하녀가 얼핏 보였다. 술 시중을 들기 위해 온 하녀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하인이 보내는 눈짓에 세 명의 하녀들은 용하 일행을 향해 다소곳하게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
“잠깐!”
단말마와 같은 용하의 말에, 세 명의 하녀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방주님의 배려에 깊이 감사를 드리나, 지금부터는 창의부흥원과 무관하게 호위무사들의 술자리니, 하녀들은 물러가시오.”
용하의 말에 장설과 인공의 표정에 얼핏 아쉬움이 스쳤고, 세 명의 하녀와 연회장 하인들은 서둘러 물러갔다.
이윽고.
“두 분 형님들! 이제 온전히 우리만의 술자리가 되었습니다. 혹 술 시중을 드는 하녀들을 물린 것에 대해 서운하게 생각하실 수 있겠으나, 만약 하녀들이 함께 있으면 온전한 우리만의 자리가 아니니, 또 예를 갖춰야 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제야 장설과 인공은 굳어졌던 얼굴을 풀었다.
“자네의 깊은 속을 우리가 몰랐을까.”
인공이 우쭐해서 입을 떼자, 용하는 흔쾌히 건배 제안을 했다.
“자, 그럼 두 분 형님들. 제대로 한잔 드십시오.”
용하의 말이 끝났을 때, 인공이 장설에게 물었다.
“형님, 저 오늘 제 스타일로 한잔해도 되겠습니까?”
“자네 스타일?”
“네. 제 스타일요.”
인공의 말을 의아하게 여겼던 장설이 돌연 흔쾌히 응했다.
“그리하라. 오늘은 영원히 기억될 우리만의 날이 아니냐?”
“감사합니다, 형님.”
인공은 다소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 그럼 한잔할까요?”
용하의 건배 제안에 인공은 술잔 대신 술병을 높이 들었다.
“호위무사실의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하나의 술병과 두 개의 술잔이 천장을 향해 높게 올려졌다.
가슴 벅찼던 그 날의 분위기는 세 사람의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