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45
45화
“아버지!”
방주를 부르는 소희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를테면 점잖다기보다는 시무룩하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하지만 웬일인지 딸바보 방주는 그냥 침묵을 지켰다. 평소 같으면, 츤데레츤데레! 난리가 났을 텐데 말이다. 그런 아버지의 태도에 소희는 쀼루퉁해서 물었다.
“언제까지 반겨 주지도 않는 사람을 보겠다고 이렇게 매주 산을 올라야 합니까?”
불만의 소리는 시시각각 커져만 갔다. 하지만 방주는 귓등으로 듣는가 하면, 오히려 소희를 달래려 들었다.
“김 원장이 자기 수련 과정을 자청해 보여 주겠다고 하지 않느냐. 이렇게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치라는 말인 게냐?”
“아버지, 김 원장의 실력은 봐서 무엇 하려 하십니까?”
“아 그야, 앞으로 내 딸 소희의 안전…….”
방주는 하려던 말을 잠시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 왜 말씀을 하다 마십니까? 제 안전을 위해 김 원장의 실력을 알아야 한다니, 그게 다 무슨 말씀이세요?”
소희의 추궁이 집요해지자, 방주는 발뺌하기 바빴다.
“어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스스로 자기 실력을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그걸 외면한다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않느냐.”
“김 원장이 스스로 그리하겠다고 했다니, 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소희가 단호하게 말하자 방주는 펄쩍 뛰며 극구 부인했다.
“아니, 소희야. 그럼 너는 지금 이 아비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말인 게냐?”
“너무 티 나게 놀라니까 더욱 의심스럽습니다.”
이렇게 부녀지간의 밀당(밀고 당기기)은 어느덧 시작된 듯 보였다.
“어허, 너무 야박하게 그러지 말거라. 김 원장의 말인즉 자신이 성장하는 모습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겠느냐. 그러니 응원하는 의미로 관전을 해 주는 게 이곳 무림의 예의가 아니겠느냐.”
소희는 훅 치켜뜬 눈으로 반박했다.
“아버지, 노망이라도 나신 겁니까? 아님, 발상이 독특하신 겁니까? 그것도 아니면 그사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긍정적으로 바뀌기라도 하신 건가요? 김 원장이 매번 명상하는 모습만 보여 준다는 건 자기 수련 과정을 공개하기 싫다는 건데, 왜 그걸 모르시는 겁니까?”
그 순간 용두방주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곱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꼭 그리 말을 해야겠느냐?”
소희 또한 걸음을 멈추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버지, 혹시 제 말이 언짢으셨습니까?”
“그럼 언짢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잘 생각해 보거라. 오늘 한 마디라도 좋은 말을 한 적이 있었는지.”
“아버지, 제가 드리는 말씀이 귀에 거슬렸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제가 드리는 직언을 허투루 들으셔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뒤집힌다 해도 저는 아버지의 하나뿐인 외동딸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제가 아버지 잘못되라고 그런 말씀을 드렸겠습니까?”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느냐? 이미 한 약조를 일방적으로 깰 수는 없지 않으냐?”
“오늘 수련은 아무 말씀 말고 관전하십시오. 그리고 관전이 끝나면 그동안 잘 관전했다고 하며 수련하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치하하십시오. 아울러 매주 관전하기로 한 약조를 취소하는 발언을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김 원장은 아버지에게 감사하게 생각하며 더욱 수련에 매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희의 말에 용두방주는 껄껄 웃으며 화답했다.
“역시 우리 소희가 영특하구나, 영특해. 그렇게 쉬운 묘수를 두고 매주 산을 오를 때마다 어찌하면 좋을까 고심했구나. 고맙다, 소희야.”
“아버지, 제 의견을 긍정적으로 들어주시니, 오히려 제가 더 고맙습니다.”
“착한 것! 그리하마. 소희, 네 말대로 김 원장을 치하하면서 말할 것이다. 앞으로는 절대 참견 안 할 것이니, 자유롭게 수련하라고. 그럼 되겠느냐?”
“네, 아버지. 그리하십시오. 역시 제 생각이 맞았습니다.”
“네 생각이 맞다니, 무엇을 말이냐?”
“평소 저는 이 세상에서 우리 아버지가 제일 훌륭하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오호라, 평소 우리 소희가 이 아비를 그리 생각하였구나. 그러고 보니 썩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구나. 세상은 몰라도 이 개방에서는 이 아비만 한 사람이 없지 않으냐.”
“맞습니다. 아버지가 최고입니다.”
소희의 말에 용두방주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껄껄거리며 웃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동굴 앞에 도착해 있었다.
“김 원장 안에 계시오?”
방주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달리 한결 부드러웠다. 반면 안에서 들려오는 용하의 대답은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대인, 수련 방해하지 말고 그냥 들어오십시오.”
용두방주와 소희, 두 사람은 어두운 동굴 속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짙은 어둠 속에 용하가 보였는데, 그는 변함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빠져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용두방주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진저리를 쳤고, 그러는 용두방주를 바라보는 소희는 그러지 말라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사람은 처연히 용하가 수련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꽤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용하는 가부좌를 풀었다.
“대인! 예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시오. 매일 이렇게 산을 오르는 김 원장을 앞에 두고 내 어찌 힘들다 할 수 있겠소.”
“그리 생각하신다니 저는 고마울 따름입니다. 소희 낭자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소희는 아까부터 용두방주에게 무엇인가 눈짓을 계속 보내고 있었다. 그 눈짓의 의미를 용두방주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용두방주는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소희가 방주에게 보내는 눈짓이 빈번해지자, 용하는 금세 그것을 눈치챘다.
‘대체 소희 저 아이가 아까부터 왜 저러는 것일까?’
강한 의구심이 일었지만, 용하는 줄곧 모르는 체하며 소희를 예의주시했다.
보다 못한 소희가 마침내 입을 뗐다.
“원장님, 아버지께서 원장님에게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희의 말에 용하는 조금 커진 눈으로 방주를 바라보았다. 의문의 눈이었다. 용두방주는 일순 난처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 소희가 알려 준 대로 말을 꺼냈다.
용두방주의 말은 한동안 이어졌다. 옆에서 그의 말을 듣는 소희는 꽤 흡족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방주의 말이 끝났을 때 용하는, 허리를 약간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아마도 소희의 일기장에 그날의 용두방주 행위는 가장 훌륭했던 처세로 기록될 것이다.
* * *
그날 이후 용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창의부흥원 연구실에 처박힌 그는 무엇엔가 골몰해 있었다. 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이유는 딱 한 줄의 문장 때문이었다.
[선사시대에 배터리가 있었다]내용을 파헤쳐 보면 이러했다.
[1936년 바그다드 인근 철도 노동자들은 파르티아 전지로 알려진 선사시대 전지로 보이는 물건을 발견. 이 물체는 파르티아 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2,000년 된 것으로 추정. 배터리는 식초 용액으로 채워진 점토 항아리로 구성되었으며, 구리로 실린더로 둘러싸인 철 막대 삽입. 이 장치는 약 1볼트에서 2볼트의 전기를 생산.]위 자료는 보조배터리가 방전되기 직전, 용하가 스마트폰 파일을 글로 옮겨 적은 자료 중 일부인데, 이 자료 때문에 용하는 지금 깊은 고민에 빠진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전기에 집착하는 걸까?”
용하는 초조하게 연구실 안을 서성거렸다.
‘아직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전기라는 하나에만 골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용하는 밖으로 나갔다. 소희에게로 가기 위해서였다. 용하는 소희가 있는 별채로 이동하며 줄곧 중얼거렸다.
“조금이라도 속도를 더 내려면, 지금까지 준비한 것보다 더 강한 추진력이 필요하다.”
그 순간 용하의 머릿속에 꽁지에 불이 붙어 쏜살같이 달아나는 닭의 몰골이 떠올랐다.
이윽고 별채에 도착한 용하는 소희에게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그림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원장님에게 닌자들이 사용하는 폭약이 왜 필요한 겁니까?”
“아, 그게 말이죠. 이를테면…….”
“다시 묻겠습니다. 폭약이 필요한 겁니까, 그것을 만드는 재료가 필요한 겁니까?”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재료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폭약을 만들려면 많은 양의 염초를 채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그보다 더 많은 양의 염초토를 모아야 하고요.”
“염초토? 그건 어디서 구합니까?”
“염초토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물기가 있고 응달진 곳에 소금기를 머금은 흙이 있습니다. 그 흙에서 염초를 따로 걸러내 그것으로 폭약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왕 말 나온 김에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폭약 만드는 일은 소희 낭자께서 전적으로 맡아서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폭약을 무엇에 쓸 것인지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일전에 동력이 필요하다고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아무렴, 기억하고 말고요. 그런데 그건 말과 활을 이용하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그랬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그거로는 왠지 좀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제 꽁지에 불을 붙여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그러니까 사람은 다치지 않고, 폭약의 추진력으로 속도를 좀 더 높여 보겠다는 말씀인 거죠?”
“네. 그런 폭약을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그날 이후 소희는 개방의 남아도는 인력을 총동원해 염초토를 끌어모아 폭약을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 * *
용하는 21세기로 돌아가는, 그날을 머릿속에 찬찬히 그려 보았다. 넘어야 할 산이 겹겹이 놓여 있었다. 우선 서남부지역 티베트까지, 말 일백 필을 끌고 가야 하는 어려움에, 두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그다음은 말 일백 필을 끌고 에베레스트산을 등반해야 하는 더 큰 악재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두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기네스북감이나 다름없는 커다란 화살에 몸을 실어 광채에 휘감기기까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건 하늘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용하의 두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사이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는 순조로웠다.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도 소희의 공이 컸다.
어려운 일을 묵묵히 도맡아 해 준 소희. 덕분에 용두방주의 눈을 피해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것들을 무사히 해낼 수 있었다. 이제 용하는 무엇으로 소희의 공로에 보답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용하는 급히 호위무사실로 향했다. 그는 후원을 걸으며 줄곧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인공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를.
용하는 스마트폰의 절실함을 느끼며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스마트폰만 있었다면, 이런 일로 고민하지는 않았을 텐데.”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장설에게 인공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고백하는 것. 이런 결심이 서자, 용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려면 내줄 건 내주어야 한다.”
용하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이윽고 호위무사실에 도착한 용하는 장설을 찾아 무릎을 꿇었다.
“형님, 인공 형님과 단둘이 할 얘기가 있습니다.”
“그럼 인공과 단둘이 얘기를 하면 될 것이지, 어찌하여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청승을 떠는 것이냐?”
“외람되지만, 오해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오해? 그리 말하는 걸 보니, 무언가 켕기는 게 있긴 한가 보구나.”
장설의 표정에 토라진 기색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널리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전 인공 형님과 잠시 중앙 정원을 거닐며 이야기를 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 용하는 인공과 단둘이 중앙 정원을 거닐었다.
“형님, 21세기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내가 그걸 모를 리 없지 않으냐.”
“그런데 문제가 좀 있습니다.”
“문제라, 그것이 무엇이냐?”
“소희 낭자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를 위해 고생고생했는데, 우리가 떠나고 나면 그 아이의 상실감은 어찌해야 합니까?”
개인의 감정을 어찌하란 말인가. 인공은 무엇이라 대답해야 옳을지 망설여졌다.
그런 인공의 속도 모르고 용하는 재촉하듯 다시 물었다.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제야 인공은 난처한 기색으로 입을 뗐다.
“글쎄다, 쉽지 않은 문제로구나.”
과연 인공은 어떤 현명한 대답을 내놓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