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46
46화
“이건 어떻겠느냐?”
마침내 인공이 입을 떼자 용하는 솔깃했다.
“우리가 21세기로 갈 때 소희 낭자도 데리고 가는 건.”
기대감에는 못 미쳤지만, 일단 발상은 참신하다는 생각에 용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희 낭자를 데리고 가 버리면 딸바보인 방주 대인은 어떡합니까?”
용하의 말에 인공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방주 대인? 그 작자가 왜?”
“그 작자라니요? 아직 우리는 방주 대인의 그늘에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 삼가십시오.”
“그늘이 아니라 손아귀겠지……. 사내자식이 야누스 같긴… 이랬다저랬다……. 아, 대체 나더러 어쩌라고?”
“제가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매 순간 일단 살고 보자는 생각에 급급하다 보니… 이제 어떤 게 진실이고 어떤 게 거짓인지… 그것조차 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습니다.”
“그걸 나무라는 게 아니야. 나 또한 자네 못지않게 우선 살고 보자는 생각이 강하니까.”
“그럼 뭡니까? 왜 나무라시는 건데요?”
“네 녀석이 매번 펼치는 상황 윤리! 나는 그 꼴이 보기 싫어서 그런 게야. 지 살겠다고 유불리만 따지는 네 놈의 얄팍한 처세술 말이야.”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용하는 곧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알았으면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염두에 두지 말도록 하라!”
“누굴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닙니다. 단지 자식 잃은 슬픔을 어찌 달랠까, 걱정스러워서…….”
“그래? 뭘 그런 걸 다 걱정하고 그러는 게냐?”
그 순간 용하는 솔깃해서 덤벼들 듯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좋은 방법인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용두방주도 데리고 가면 되지 않느냐.”
이번에도 인공의 머리에서는 어김없이 엉뚱한 발상이 쏟아졌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여행이나 놀러 갈 때 해 볼 만한 생각이지, 지금처럼 중차대한 일에 적절한 대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하는 한쪽 입꼬리를 씰룩였다.
“형님! 소희 낭자 하나도 감당할 수 없는데, 방주 대인까지 데리고 간다면 그 파장은요?”
인공의 입에서 긍정적인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말이다. 우리가 아예 여기 눌러앉는 건 어떻겠느냐? 대접도 괜찮고 무엇보다도 용하 자네가 자리도 제대로 잡지 않았는가. 권력에, 여자에, 금전적으로도 우리가 어디 가서 이런 호강을 누려 보겠느냐?”
인공의 말에 용하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하지만 곧 어금니를 깨물며 대답했다.
“설령 이곳에 눌러앉을지언정, 일단 21세기에 한 번은 다녀와야 합니다.”
“뭐, 다녀와? 21세기가 무슨 동네 편의점이냐, 다녀오게!”
“그럼 어떡합니까? 검도 체육관 차리느라 대출받았던 은행 빚은 해결해야 할 거 아닙니까. 게다가 나만 바라보고 노처녀로 늙어 갈 미숙이는요.”
“그것 때문이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두 가지만 해결된다면, 이대로 무림에 눌러앉을 수도 있을 것처럼 말하던 용하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왜 대답을 못 하는 것이냐? 그 두 가지만 해결되면 여기 눌러앉을 수 있겠느냐?”
“음, 저… 그게 말입니다.”
용하가 대답을 망설이며 약한 모습을 보이자, 인공은 두 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
“왜 그리 망설이는 것이냐? 잘난 주둥아리에 달고 다니던 모터가 고장이라도 난 것이냐?”
“고장이 아니고 방전이죠. 알다시피 이곳엔 전기가 없잖아요.”
“지금 그 입에서 농담이 나오느냐?”
“오죽 답답했으면 이러겠습니까.”
“가장 정확한 답은 없을 듯싶구나.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가장 좋은 방법?”
용하가 혹해서 되물었을 때 인공은 말을 아꼈다.
“형님! 일단 21세기로 가서 대출 빚 다 갚고 미숙이를 데리고 오는 건요?”
“뭣이라! 약혼녀를 무림으로 데리고 와?”
“왜요? 별로예요?”
“자네 약혼녀를 여기로 데려오면, 용두방주가 가만히 둘 것 같아? 그러잖아도 자기 딸하고 결혼 못 시켜 안달인 사람인데. 네놈이 하는 발상이란 게, 사자한테 톰슨가젤을 옜다 먹어라, 하고 던져 주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형님, 야단만 치시지 말고 무슨 방법을 좀 알려 주십시오.”
“그러게 왜 책임도 못 질 일을 벌이고 다녀? 몸 쓰는 놈이 단순하게 살지.”
인공은 혀를 끌끌거렸다.
“왜요? 형님 눈에는 제가 한심해 보입니까?”
“한심해 보이기라도 하면 다행이게? 이런 기분이면 네 녀석 하는 꼴도 보기 싫어.”
오랜만에 느껴 보는 인공의 본모습이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인간 본연의 모습.
“형님, 그… 형님 처세술은 다…….”
“그놈에 처세술! 이제 지긋지긋하다.”
“검을 수련하며 달라지신 거 아니었습니까?”
“달라졌지! 달라졌었어. 잠시나마 어른이 되기로 마음먹었었다고. 그런데! 그런데 왜 그런 나를 자꾸 긁느냐고?”
인공이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건 여러모로 손실이었다. 용하는 물론, 인공 자신도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것에 대해선 질색하는 기색이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아직 시간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죠.”
“부디 현명한 생각을 하기 바란다. 나 또한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볼 것이다.”
“네, 형님.”
용하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 * *
며칠 후 인공은 장설과 나란히 중앙 정원을 걷고 있었다.
“형님, 뭐 하나 여쭙겠습니다. 제 얘기는 아니고, 친구 얘긴데요.”
항상 떳떳하지 못할 때 하는 구질구질한 변명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사실을 장설이 눈치 못 챘을 리 없었다.
모른 척해 줄까 잠시 고민도 했지만, 장설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친구 얘기를 왜 자네가 묻는 게야? 대답이 듣고 싶거든 친구가 직접 오라고 해.”
웬일인지 쌀쌀맞다는 생각도 얼핏 드는 순간이다.
“아, 그게 말입니다, 형님. 그 친구가 오기는 좀 그렇고, 제가 대신 여쭤보고 형님이 답을 주신다면, 전해드리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그래?”
장설은 콧방귀를 뀌었다.
“답을 주면 자네 친구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잘 전달할 자신은 있느냐?”
“아이참, 형님도. 사람이 한 말을 사람에게 전달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장설의 말이 어이없게 들렸던지, 인공은 피식피식 웃어 가며 조롱하듯 말했다.
“좋다. 부디 잘 전달하기를 바랄 뿐이다. 자네 친구에게 잘 전하게. 사람에게는 취할 것과 취해선 알 될 것이 있다고. 그리고 취할 수 있는 것과 그림의 떡인 것도 있다고.”
인공은 장설의 말을 입엣말로 따라 하며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떠하냐, 잘 전달할 수 있겠느냐?”
“이게 다입니까?”
“이보다 더 정확한 답이 있겠느냐?”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지, 그걸 말씀해 달라는 거죠. 그래야 뭘 전하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보통 이 정도 얘기하면 다들 알아듣던데, 그리 토를 다는 걸 보면 자네는 죽었다 깨나도 내 말을 친구에게 전달하지 못한다는 데, 이 손모가지 걸겠네.”
“형님도 참, 뭐 그만한 일에 손모가지씩이나.”
인공이 말꼬리를 흐리자, 장설은 자기 목을 조이는 시늉을 하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아이고, 이 늙은 것아! 마음 같으면 손모가지가 아니라, 그냥 이 모가지를 걸고 싶을 만큼 답답해서 그러지 내가.”
“알겠습니다. 그만하십시오. 그러니까 형님 말씀은 감정의 선을 끊어야 한다, 뭐 그런 말씀이잖아요.”
인공이 툭 내뱉듯 쏟아내는 말에 장설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어찌 알았느냐? 내가 하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니라. 모든 일에 감정을 배제하면 답이 보인다는…….”
장설의 말대로 감정을 배제하고 나면, 그래서 용하와 인공 두 사람의 처지만 생각한다면, 애초에 소희라는 인물에 대한 배려는 사치였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인공은 지그시 두 눈을 감으며 후회했다. 그런 인공을 장설은 처연하게 바라보았다.
다음 날 용하를 만난 인공은 근엄하게 말했다.
“지금 자네가 소희 낭자를 걱정한다는 건 우리에게는 사치일세.”
“네, 사치라고요?”
용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러자 인공은 조금 전보다 더 근엄하게 답했다.
“지금 우리 처지를 좀 생각해 보게. 자네나 내가, 우리 둘 말고 다른 사람 걱정할 여유가 있는지를.”
인공의 말에 용하는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린 주제에,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을 걱정했다니.
“이제라도 내 말을 알아들었으면, 그깟 정 따위에 연연하지 말고 마음 단단히 먹도록 하라!”
“네, 형님. 그리하겠습니다.”
최대한 예를 갖춘 대답이었지만 참담함은 감출 수 없었다.
‘21세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자꾸 헷갈린다.’
만약 용하가 무사히 21세기로 돌아간다면, 무림 속 이야기는 그의 상상 속 이야기가 되고, 무용담으로 남을 것이다.
상상 속 이야기와 무용담!
허상에 휘둘려 잠시라도 판단이 흐려진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창의부흥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희 낭자와 마주쳤다. 잠시 눈길이 오갔지만, 용하는 여느 때와 달리 냉담하게 지나쳤다.
소희는 용하에게 외면당했다는 생각에 괜한 용심이 생겼다.
“뭐야? 갑자기 왜 저래?”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저기요!”
용하는 못 들은 척 걸음을 크게 내디뎌 멀어져 갔다.
“저 인간, 대체 나한테 왜 저러는 거야? 뭐, 잘못 먹은 거야?”
소희는 표독하게 용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창의부흥원으로 향하던 용하는 불현듯 멈칫했다.
‘아니지. 아직은 내가 이렇게 처신해선 안 되지. 소희가 치사하게 용두방주에게 고자질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괜히 골이 나서 더는 날 돕지 않겠다고 하는 날엔…….’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리는 용하. 그의 얼굴이 옅은 경련을 일으켰다.
‘에이씨, 무슨 팔자가 이렇게 더럽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말이야.’
이제 어떡하지? 찰나에 불과한 짧은 시간에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그래, 상대는 아직 어린아이다. 그에 걸맞은 처세술로 위기를 모면해 보자.’
용하는 휙! 뒤돌아보며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것을 본 소희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피었다.
“아니, 저 인간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가만둘 리 없었다.
“원장님! 이제 좀 마음에 여유가 생기셨나 봅니다. 짓궂게 장난을 다 치시는 걸 보니.”
용하의 처세술은 제대로 적중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가 아니고, 매일 쳇바퀴 돌 듯하는 우리 일상이 지긋지긋해서 장난 좀 쳤습니다. 괜찮으시죠?”
“그럼요. 덕분에 잠시나마 생기를 되찾은 기분입니다.”
“이리 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할 얘기가 있어서 조만간 찾아뵈려던 참이었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창의부흥원 연구실로 오십시오.”
일 다경쯤 후, 두 사람은 창의부흥원 연구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웬일인지 두 사람은 예전과 달리 서먹서먹했다.
소희가 빤히 바라보았지만, 용하는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매일 같은 일만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인데, 일은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용하의 입에서 한숨처럼 새 나온 말이었다.
“원장님, 지금 진행하시는 일에는 전혀 진척이 없는 겁니까?”
소희의 질문에 용하는 고개를 떨구며 낙담했다.
“답보 상태입니다. 소희 낭자는요?”
“개기일식이 있는 날과 관측 장소는 알아냈습니다.”
“아, 그래요?”
용하는 그 어느 때보다 소희의 말이 반갑게 들렸다.
“지금 시간을 계산하고 있는데, 저 또한 매일 쳇바퀴 돌듯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다면, 이건 어떻겠습니까?”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어디 말씀해 보십시오.”
“개기일식의 날에 맞춰, 에베레스트산의 관측 장소에 미리 가서 기다리는 거 말입니다.”
“아, 그러면 되겠네요. 그렇게 하면 굳이 풀리지 않는 문제로 골머리 아플 일도 없고.”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알고 날짜를 주십시오. 날짜에 맞춰 제가 손을 쓰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모레쯤 문서로 전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