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47
47화
이틀이 지났다. 조금 전 별채에서 온 하인이 창의부흥원을 나갔다. 마침내 소희가 약속했던 문서가 용하의 손에 들어왔다.
문서가 들어 있는 봉투를 손에 든 용하의 얼굴이 창백했다. 긴장된 표정으로 문서를 꺼내는 용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것을 의식했던지, 용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과연…….”
용하의 얼굴에서 확연하게 느껴지는 긴장감, 설렘, 기대감.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한 그의 표정은 딱히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거친 검도 고수 용하의 손이 이깟 종이 한 장에 떨리다니. 실은 속이 떨리는 것에 비하면, 그의 손 떨림은 여진에 불과했다.
“개기일식의 날은…….”
―척!
급기야 곱게 접혀 있던 문서가 펼쳐졌다.
문서를 눈으로 읽어 내리는 용하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그동안 진행한 일정을 보고드립니다. 천체력 계산 결과 개기일식이 예정된 날은 다음과 같습니다. 매번 일어나는 일식이 모두 같지는 않지만, 기하학적 형태가 비슷해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고 있음을 이번 연구 중에 발견했습니다. 반복되는 주기는 대략 6,500여 일 즉, 18년 남짓한 세월입니다.]‘음, 사로스(Saros) 주기를 계산해 낸 모양이군.’
[개기일식의 반복 주기는 지구, 태양, 달이 상대적으로 거의 같은 위치로 되돌아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으로, 223삭망월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계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반복 주기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고, 주기가 지날 때마다 약간씩 바뀌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근거로 돌아올 개기일식의 날은, ‘1353년 음력 10월 1일’입니다.]문서를 읽어 내리는 용하의 두 눈이 다시 한번 커졌다.
[창의부흥원 원장님께서는 문서를 숙지한 후 소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은밀하게 진행한 것들은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됩니다. 즉, 누군가의 기억에 남기거나 문서로 기록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알게 되는 날엔 어떤 변을 당할지 모르니 착오 없이 처리하시기 바랍니다.]‘역사 속에 남겨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까? 음, 그래서 1277년 10월에 있었던 개기일식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개기일식에 대한 기록이 없었던 것일 수도.’
사실 소희의 당부는 누구보다도 용하가 바라는 바였다. 게다가 무림의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자기 자신과 인공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그것마저도 지우고 떠나고 싶었다. 착오로 발생한 에피소드가 역사 속에 기록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간혹 인터넷에 떠도는 시간 여행자라는 이름으로 항간에 떠돌지언정…….’
결연히 소희의 문서를 직시하던 용하는 불을 붙였다. 그리고 문서가 완전히 소각될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 활활 타오르던 소희의 문서는 한 줌의 재조차 남기지 않고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용하는 황급히 창의부흥원을 나와 호위무사실로 향했다.
‘이 시간이면 당연히 장설 형님도 같이 있겠지?’
호위무사실로 가는 동안, 어떻게 하면 인공을 따로 만날 수 있을까, 그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윽고 호위무사실 앞에 도착한 용하는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때였다.
“원장님! 오셨으면 들어갈 것이지, 문 앞에서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
장설이었다. 용하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휙! 돌아보았다. 장설이 안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연신 하고 있었다. 하늘이 돕는 것인가? 어찌하면 장설을 빼고 인공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아, 장설 호위무사께서는 밖에 계셨었나 봅니다.”
“소인은 늘 이맘때 햇볕을 쬐느라 후원에 나와 있습니다.”
그 순간 용하는 얼핏 지금의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음, 늘 이 시간에 저렇게 후원에 나와 있다고? 그럼 인공 형님은 늘 이 시간에 혼자라는 얘기잖아.’
용하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장설이 호위무사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이런, 지금 오면 안 되는데. 용하는 장설을 향해 목청껏 소리쳤다.
“장설 호위무사께선 굳이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저게 볼 일이 있다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장설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물었다.
“그럼 저한테 볼일은 따로 없는 거지요?”
“네. 그리고 인공 호위무사에게도 특별히 볼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닙니다.”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한다는 건, 무엇인가 감추려는 게 있다 라는 걸, 장설이 눈치 못 챘을 리 없었다. 하지만 장설은 모르는 체하며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을 본 용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호위무사실 문을 넘었다.
“형님, 인공 형님! 안에 계십니까?”
용하의 목소리에 인공 또한 몹시 반갑게 맞이했다.
“자네가 이 시간에 호위무사실엔 웬일인가?”
인공은 얼떨결에 용하를 하대하고는 바깥쪽을 힐끔거렸다.
“형님, 괜찮습니다. 지금은 우리 둘밖에 없으니 편히 말씀하십시오.”
“그래도 조심해야 해. 장설 형님이 귀가 좀 밝아야지.”
“장설 형님이 왜요? 우리끼리 있을 땐 그냥 말씀 놓기로 했잖아요.”
“그러게 말이야. 그러기로 해 놓고도 가끔 심사가 뒤틀리면, 너는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하며 사람은 못살게 굴 때가 있으니 원.”
“알겠습니다. 하소연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시간이 없으니 제 얘기부터 하겠습니다.”
“무슨 중차대한 일이라도 생긴 게야?”
“드디어 개기일식의 날이 정해졌습니다.”
“아, 그래?”
평소 목청을 긁듯 탁했던 인공의 목소리가 일순 격앙됐다.
“그게 언젠데?”
“음력 10월 1일입니다.”
“음력 10월 1일? 그럼 한 달 하고 달포밖에 남지 않았네!”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고 봐야죠.”
“왜? 보름은 어디다 까먹으려고?”
“티베트까지 말 일백 필을 몰고 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또 말 일백 필을 끌고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출발하는 건, 한 달도 채 안 남았다고 봐야 합니다.”
“굳이 말을 일백 필이나 끌고 갈 필요가 있을까?”
“무림에서 말은 동력원입니다. 동력원으로 쓰기엔 사람보다 훨씬 효율적이죠.”
“하긴 열 명의 사람보다 더 쓸모가 있으니, 무림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동력원이지. 그런데 그 많은 동력은 무엇에 쓰려고 그러는 것이냐?”
“형님, 우리가 사패산터널에서 보았던 광채 기억하시죠?”
“나야 모르지. 실컷 곯아떨어졌다가 깨보니 죄다 짜장면집이었으니까.”
“아, 좋아요. 못 봤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말했던 그 광채의 밝기는 21세기에서는 흔한 것이지만, 무림에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강렬했습니다.”
“그야 당연하겠지. 여기서 기껏 광채래 봤자, 콩으로 짠 기름으로 켠 호롱이 전부니.”
“그래서 태양을 이용하려고 그동안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태양 가까이 가려면 그만한 동력이 필요합니다.”
“아니, 말을 듣고 보니, 더 이해가 안 가는구나. 그럼 네 말은 말 백 마리한테 우리를 밀게 하겠다는 게야?”
“네, 얼추 비슷합니다. 말 일백 마리는 활시위를 당기는 데 쓰일 것입니다.”
“뭐라! 말 일백 마리가 활시위를 당긴다고?”
인공은 놀란 기색으로 입을 떡 벌렸지만, 곧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말 일백 마리가 당겨야 하는 커다란 활과 화살이 어디 있단 말이냐?”
“네, 그건 소희 낭자가 용두방주 모르게 몰래 만들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태양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폭약도 준비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네 녀석은 화살에 매달려 날아간 다음 폭약을 터뜨려 추진력을 얻어 태양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 그 광채를 이용해 21세기로 차원 이동을 시도하려는 것이냐?”
“빙고! 정확히 맞추셨습니다. 역시 형님은 똑똑! 해요.”
“나 너랑 못 다니겠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황당한 발상을. 그러다 만약에 네 녀석 예상이 빗나가기라도 하는 날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21세기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무슨 대출 빚 말이냐?”
“그것도 있고, 나만 믿고 기다리고 있을 미숙이도 그렇고.”
“야, 김용하! 너 무슨 결벽증 있냐?”
“결벽증이 아니고 책임감이죠. 저는 말이죠, 형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는 어디서든 편히 살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 느낌 있잖아요. 일 보고 밑 안 닦은 기분.”
“이해할 수가 없구나. 아니 고작 그것 때문에 이 좋은 걸 버리고 목숨을 걸어?”
“이깟 목숨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요? 만약 이번 계획이 성공한다면, 무림을 손아귀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와~ 무섭다, 무서워. 좋다! 생각은 누구는 못 하겠느냐. 그런데 그것을 어찌 장담하겠느냐?”
“만약 21세기와 무림을 자유롭게 차원 이동할 수 있게 된다면, 저는 무림에서 제일 잘나가는 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개방은 물론 아홉 정파의 장문인을 상대로 장사를 할 것입니다.”
“햐― 너 정말 무서운 놈이다. 우리 이쯤에서 대충 인연을 정리하는 게 어떻겠느냐?”
“형님, 저 없는 무림에서 혼자 살아남을 자신 있습니까? 제가 무림을 떠나고 나면, 아마도 용두방주의 횡포가 장난이 아닐 겁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부닥쳤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인공은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구겼다.
“형님, 내숭 떨지 말고 함께 갈 준비나 하세요. 전 반드시 성공합니다.”
“내숭이라니, 그건 무슨 소리냐?”
“그동안 잘하셨잖아요. 저는 솔직히 반신반의했거든요.”
“반신반의? 그동안 잘했다고? 그게 다 무슨 소리냐?”
“형님이 검술을 수련하게 된 거 말입니다. 그거 다 제가 장설 형님께 부탁드려서 그리된 겁니다. 화살에 몸을 실어 태양 가까이 가려면 몸이 가벼워야 하는데, 200근이 넘는 형님은 절반도 채 못 가서 추락하고 말 것 아닙니까. 그래서 다이어트를 좀 시킨 거라고요.”
“뭐, 뭣이라!”
자존심이 몹시도 상했던지 인공은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인공의 표정을 본 용하는 더 도도하게 말했다. 이제 인공의 고집을 꺾는 요령이 생겼다는 뜻이다.
“함께 가든 안 가든 그건 알아서 하십시오. 오늘부터 제 말에 한마디라도 토를 다는 날엔, 형님은 이번 계획에서 배제할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용하의 단호한 말에 인공은 수그러들며 애원하듯 말했다.
“정말 무서운 애구나! 너 따위가 배제하다니 감히 누굴 배제해? 앞으로 용하, 네 말에 절대 토 다는 일 없을 건데, 그래도 배제할 거야?”
그제야 용하는 굳었던 얼굴을 풀며 화사하게 웃었다.
“형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떨어지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어떻게 사고무친한 이곳에 형님을 그냥 내버려 두고 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남은 문제는 장설 형님입니다.”
“장설 형님이 왜?”
“우리 셋은 죽으나 사나 늘 함께하기로 한 의형제 아닙니까? 그런데 장설 형님만 이곳에 남겨 두고 떠난다는 게…….”
“뭘 그런 걸 고민해? 장설 형님도 데리고 가면 되잖아. 모시고 가서 인공사에서 함께 살면 그 형님도 좋아하실걸.”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닌데, 화살을 두 개밖에 만들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셋 중에 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용하와 인공은 거의 동시에 숨소리를 죽였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예상대로 장설이었다. 혹시 엿듣기라도 한 것일까.
용하와 인공이 불안에 떨고 있을 때였다.
“둘이 사귀기라도 하는 것이냐?”
장설의 말에 용하는 펄쩍 뛰었다.
“사, 사귀다니요? 우리가 무슨…….”
그 순간 인공이 매서운 눈빛으로 용하의 입을 막았다. 용하가 하려던 말을 마저 했다가는 또 파문을 일으키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림에는 존재할 수 없는 그 말.
“그런데 어찌하여 그리 물끄러미 서로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냐?”
‘음, 저 말은 적어도 우리가 나눈 얘기를 엿듣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용하는 다소 안도하는 기색으로 인공을 바라보았다. 인공의 안색 또한 조금 전보다는 눈에 띄게 편해 보였다.
“장설 형님, 우리 말입니다. 서로 얼굴 잊을까 봐, 눈에 담고 있었습니다. 요즘 서로 바쁘다 보니 얼굴 볼 시간이 없었잖습니까? 형님도 이리 오십시오.”
능청이 제법이었다. 용하의 능청은 장설조차도 속아 넘어가게 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용하의 처세술 앞에 인공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