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5
5화
“왜, 내 말이 거짓으로 들리느냐?”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사실 용하도 아미파 여인의 행동에서 몇몇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빠르게 스치는 몇몇 기억들.
“스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분명 무슨 토를 달아도 달아야 할 놈이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너무 쉽게 공감 아니, 동의의 뜻을 밝혔다.
게다가 눈에 띄게 고분고분해진, 저 이해할 수 없는 태도. 인공은 의아해서 물었다.
“그리 순순히 내 말을 받아들이는 이유가 무엇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노인, 변죽이 심한 것 같다. 의심하는 수준도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집요하다. 본인은 몰라도 당하는 사람은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동안 단 한 번도 고분고분 내 말을 받아들인 적이 없지 않았느냐? 그래서 하는 말이다.”
“데헷, 그건 스님… 음, 조금 전 스님께서 말씀하는 제 모습은 부캐고, 실은 이게 본캐거든요! 저 원래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동안 스님께서 한 번도 의심하지 않게 처신한 적 있습니까? 솔직히 없잖아요. 그런데 이번엔 웬일로 의심할 여지없이 똑 부러지게 말씀을 하신 겁니다. 알겠어요?”
“인석아, 변명 집어치우거라! 치고 들어올 틈이 없으니 꼬리를 내린 것이 아니더냐?”
“치고 들어갈 틈이 없다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스님은 그런 자만심 자체가 허점이라는 사실을 정녕 모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너, 인석아 그 말빨 조지는 거 보면, 만만치 않은 거라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래서 특히 저 같은 놈에게는 완벽한 논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완벽하게 대처했다는 말이다.”
“데헷, 솔직히 완벽한 건 아니었고요. 음, 조금 생각해서 말씀드리자면, 그동안 하신 말씀 중에는 가장 합리적이었던 건 사실입니다. 스님 말씀대로 아미파 여인은 저를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뜻밖이구나. 끝까지 우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인정하다니. 그런데 넌, 아미파 여인이 살상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는 걸, 어찌 그리 장담하는 것이냐?”
“아미파 여인의 연검이 제 몸에 닿을 때 말입니다. 살상할 생각이 있었다면 아마도 칼날을 세웠을 겁니다. 그런데 내 몸에 닿는 그 여인의 연검은 날이 아닌 면이었고, 더군다나 베거나 찌른다는 느낌보다는 찰싹찰싹 때린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치 엄마가 어린아이에게 사랑의 매를 대듯 말입니다.”
용하의 설명은 꽤나 장황했다. 인내심을 갖고 그의 설명을 끝까지 들은 인공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소회를 밝혔다.
“옳거니, 내가 본 것이 맞는 게로구나. 아까 너와 대적하던 여인의 동작으로 보아 절기를 다루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적어도 단순한 고수는 아닌 그 여인의 연검이 네 녀석 몸에 닿았을 때 말이다. 네 녀석은 단지 아프다고 오두방정을 떨었을 뿐, 치명적인 외상 하나 입지 않았다. 내 말에 한 치의 어긋남이라도 있느냐?”
용하는 고개를 몇 차례 끄덕였을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인공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는 의미였다. 두 사람의 생각이 모처럼 깔끔하게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인공은 흐뭇한 표정으로 등을 돌려 몇 걸음 움직였다. 그때 뒤에서 용하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예의 고백이라도 하는 듯했다.
“아미파 여인, 의외로 짓궂은 면이 있었습니다.”
“호의적으로 하는 말이냐?”
인공은 마치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기라도 하듯 빠르게 몸을 돌리며 물었다.
“네. 웬일인지 아미파 여인에게 끌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잘하면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더냐?”
“글쎄요, 거기까지는 아직……. 조금 전 드린 말씀은 상대방 생각은 철저하게 배제된 오직 저만의 생각이라…….”
“그 말은 아미파 여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뜻이냐?”
“네, 그렇습니다.”
“알았다. 어찌 됐든 몸조심하거라. 현재로서는 네 녀석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몸이라도 성해야 하지 않겠느냐?”
얼핏 걱정해 주는 것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자존심을 긁는 말이었다. 이런 소리를 듣고 그냥 넘어갈 용하가 아니었다.
“그게 다 무슨 소리입니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
“왜, 내 말이 고깝게 들린 것이냐?”
“그럼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서운하라고 한 말 아니니, 그만 마음을 가라앉히거라.”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이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그거나 말씀해 주세요.”
“아까 하던 말을 계속해도 괜찮겠느냐?”
“웬일이세요? 제 허락을 다 구하고.”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고, 서운해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야.”
“말씀해 보세요.”
용하는 끝내 알량함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인공은 그런 것 따위, 별 개의치 않았다.
“네 녀석이 믿든 안 믿든, 나는 진심으로 네 녀석이 강인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 중에 하나다.”
“왜요? 제게 힘이 생기면, 제일 먼저 스님부터 작살낼 거라는 거, 잘 알면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었다.
“차라리 네 녀석이 누구든 두려워할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 내 마음이 좀 편할 것 같구나. 지금 같아선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도저히 못 봐 주겠어.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아서 말이야.”
어, 빈말이 아니었나? 곧이듣고 싶지 않았지만, 왠지 진심이 느껴졌다. 용하는 몇 차례나 힐끔거리며 물었다.
“진…심…이세요?”
자기 자신을 미덥지 않아 하는 게 불쾌했던지, 인공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럼 아니겠냐? 무림에서 내가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오직 자네뿐인데, 그렇게 약한 모습만 보이니 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게도 히든카드가 있으니까요.”
“히든카드?”
인공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히든카드라는 게 무엇인지 보여 줄 수 있겠느냐?”
“생각 좀 해 보고요.”
아직도 알량한 자존심이 남아 쀼루퉁하게 대답했다.
“명심하거라. 우린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는걸.”
“알았어요.”
여전히 쀼루퉁한 용하는 대답과 동시에 두어 걸음 물러나며 짜잔! 도포를 풀어헤쳤다. 폼나게 풀어헤친 도포 안에 주머니가 열 개쯤 달린 조끼가 보였다.
“그 주머니는 다 무엇이냐?”
“대리기사 필수아이템 단말기, 보조배터리, 블루투스 이어폰, 연결케이블 등. 이거 다 최소한 두 개씩은 있어야 하거든요. 이 많은 걸 다 어떻게 가지고 다니겠어요. 그렇다고 가방 메고 다니기는 좀 불편하고. 그러니까 이런 조끼가. 자, 보세요.”
말이 끝나갈 무렵, 용하는 한쪽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거 다 무용지물이야. 이런 곳에 전파가 닿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기대 안 해요. 전파도, 통신도, 인터넷도 다 필요 없고, 저는 오직 전기만 있으면 돼요.”
“전파, 통신, 인터넷 당연히 없고. 전기마저도 없다면?”
“당장 쓸 건 제게 있어요. 대리기사 필수아이템 보조배터리!”
용하는 다른 쪽 주머니에서 제법 큼직해 보이는 보조배터리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준비성이 철저하구먼. 그런데 그걸로 인터넷도 안 되는 곳에서 무엇을 하게?”
“예전에 다운받아 저장해 놓은 파일들은 인터넷 없이도 열어 볼 수 있을 거예요.”
“그걸 어찌 장담하느냐? 혹시 확인해 볼 수는 없는 것이냐?”
“왜 없겠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일단 다운받았던 자료가 열리는지 확인하기 위해 먼저 네비게이션을 작동시켰다.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스마트폰 화면에 떠 있는 메시지가 부푼 가슴을 한순간에 쪼그라들게 했다. 인공 또한 혀를 차며 실망하는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자칫 주눅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잠시 고민에 빠졌던 용하는 내비게이션 위치를 다른 곳으로 설정해 보았다.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1번지]이 주소를 어떻게 안내할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대체 어느 지역이 나올까, 가슴을 조이며 내비게이션을 작동시켰다. 별 기대감 없이 시도한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용하는 뛸 듯이 기뻐하며 인공에게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스님, 됐어요!”
“무어라! 됐다고? 어디 좀 보자꾸나.”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는 인공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 진짜네! 기대도 안 했는데,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냐?”
“스님 말씀대로 여긴 우리나라가 아닙니다. 게다가 전파니, 통신이니, 인터넷 같은 건, 전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럼 아까, 사용 권한이 없습니다, 라는 메시지는 뭐야?”
“그건 아마도 광채에 휩싸여 차원 이동을 할 때 마지막으로 실행된 화면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아, 그럴 수도 있었겠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야?”
“어떻게 하기는요. 잘 활용하면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는 귀한 장비입니다. 그동안 제가 다운받아 파일로 저장해 둔 방대한 자료들이, 우리가 21세기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 줄 거라 굳게 믿거든요.”
“제발, 제발 그렇게만 된다면 소원이 없겠어.”
철인 같았던 인공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 생각난 김에 이것도 한번 확인해 볼까요?”
“뭔데? 나도 좀 같이 보자고.”
용하는 스마트폰 화면을 열어 판타스틱한 분위기의 아이콘 하나를 터치했다. 앱이 구동되고 곧 화면이 열렸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모바일 무협 RPG였다.
“스님, 이게 말이지요. 레벨에 따라 절기도 마음대로 골라 쓸 수 있고요. 또 파워도 마음껏 키울 수 있어요. 잘 응용하면 이곳 무림에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어디 유용하다 뿐이겠느냐. 세상에 현존하는 모든 전술전략은 죄다 그 안에 있는 것 같구나. 잘하면 스마트폰 하나로 이 광대한 무림을 통째로 우리 손에 넣을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부풀었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잘만 하면 이 드넓은 대지를 고스란히 차지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김 관장! 일단 휴대전화 꺼. 전기 아껴야지.”
“온종일 써도 일주일은 갈 거예요. 대용량 배터리거든요. 보조배터리 두 개니까, 아껴 쓰면 대략 한 달은 버틸 수 있을 거예요.”
아직도 들뜬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너스레를 떨어 대는 용하와는 달리 인공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에효, 이번에도 시한부구먼. 한 달이라, 한 달 안에 무슨 수를 내야 한다니.”
절망! 두 사람은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눈길을 건네며 한동안 각자 자기 자신에게 걸맞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인공의 두 눈을 촉촉하게 적셨던 눈물은 온데간데없고, 그의 표정엔 결연함만 남았다. 마침내 인공이 먼저 입을 뗐다.
“나는, 내가 계획하고 있는 작전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그러니 용하 자네는, 자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자네의 작전을 실행하도록 하거라.”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무엇 하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하지만 무슨 대답이든 해야만 했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말로 인공을 안심시켰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그러니까 스님도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언급 정도는 해 주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알겠다. 그리하도록 하마.”
“그럼 어디 말씀해 보세요.”
“음, 그게 말이다. 나는 일단 아미파 소굴로 들어갈 것이다.”
“어떻게 말입니까? 어떻게 들어가겠다는 말씀이세요?”
아미파의 소굴로 들어간다는 게 곧 위험에 빠진다는 사실을 알기에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격앙됐다.
“방법이야 많지만, 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접근해 들어가,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볼 계획이다. 혹시 아느냐? 뭐 하나 주울 수도 있을지.”
“줍다니, 뭘요?”
“모르는 일 아니냐. 그들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어떤 비밀을 알고 있을지…….”
“비밀, 무슨 비밀이요?”
“이를테면 말이다. 21세기로 돌아가는 방법이랄까…….”
“에이, 말도 안 돼. 좋아요. 그건 그렇고 아미파 소굴로 들어가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면 어떤?”
“그렇게만 알고 있거라. 보름달이 뜨는 날 다시 보자꾸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인공은 깊은 여운을 남긴 채 저만치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