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51
51화
‘미숙이는 나를 반가워할까?’
그토록 그리워하던 연인을 만나러 가면서 이런 걱정을 해야 하다니.
남들은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런 걱정을 하는 이유는 조금 전 아버지가 보였던 반응 때문이다.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아버지의 목소리…….
‘언제 네 녀석한테 대출 빚 갚으라고 한 적 있어? 내가, 이 아비가 너한테 바란 건 오직 열심히! 열심히 해 주기만 바랐어.’
그 쉬운 걸 하지 못해 그나마 비빌 언덕이었던 아버지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괜히 눈물이 핑 고였다.
“이제 나에게 남은 사람은 미숙이밖에 없는 것 같다.”
미숙이와 용하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두 사람 다 워낙 없는 살림이어서 특별히 약혼식이니 뭐니 하는 사치스러운 의식을 치른 건 아니지만, 그 어떤 약혼식 못지않은 그들만의 의식을 치르며 굳게 다짐했다.
검도 체육관을 차렸을 때를 돌이켜보면, 두 사람은 가슴이 부풀었다. 그뿐 아니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대박 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수련생 수가 백 명이 되는 날 결혼식을 올리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넘어야 할 산만 겹겹이 눈앞을 가렸다.
일단 모든 걸 뒤로 미루고 검도 체육관 운영에 전력투구하기로 미숙이와 합의를 보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괜히 마음만 조급했지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무엇부터 해야 하지? 우선 미숙이부터 만나야 하겠지? 그런데 막상 미숙이를 만나면 뭐라고 하지. 무어라 변명해야 미숙이가 내 처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두말할 나위 없이 진실을 털어놓아야 마땅하겠지만 변명할 궁리부터 해야 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굳이 그래야 했던 이유는 그동안 겪은 일들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미숙이에게 포천 주금산의 인공사 주지와 과거로 차원이동을 했다고 털어놓는다면, 미숙이마저 미친놈 취급하며 멀어지고 말 것이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용하는 자신이 한 궁색한 변명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짓말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 일단 미숙이가 마음이라도 편하게 갖도록 해주자.’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걷고 있는 사이, 어느덧 미숙이가 근무하는 어린이집 근처에 도착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가까운 곳에 보이는 모퉁이만 돌면 어린이집 건물이다.
곧 결승선을 통과해 미숙이를 만날 것으로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거짓말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하얀색 거짓말과 빨간색 거짓말.’
미숙이에게 무어라 둘러댈지 아직 아무것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면서 흰색 거짓말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일단 미숙이를 만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볍게 말할 것이다. 그러려면 고도의 능청이 필요하겠지.
자칫 침체된 목소리로 어눌하게 말을 꺼냈다간 오히려 사태가 더 안 좋아질 게 뻔했다.
[미숙아, 미안. 배터리가 방전되는 바람에 연락도 못 하고.]그러면 미숙이가 쀼루퉁해서 그러겠지?
[연락은 둘째치고 잠수는 왜 탄 건데?]이 질문에 절대 밀려서는 안 된다. 미숙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금 전보다 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능청을 떨어야 한다.
이때 미숙이의 눈을 피한다거나 우물쭈물했다가는 괜한 의심과 함께 돌이킬 수 없는 수세에 몰리고 말 것이다.
[음, 그게 말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미숙이 네가 믿지 않겠지만 말이야. 믿든 안 믿든 네가 알고 싶어 하고 내가 말해 주고 싶으니까, 너에게만 얘기해 줄게.]여자들이란 원래 감정이 여리고 비밀 만들기를 좋아해서,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 이건 너만 알고 있어야 해.’라고 미리 약을 치고 얘기를 시작하면…….
큭! 대부분 기대감에 부풀어 얌전해지잖아! 그때 슬그머니 미숙이의 손을 잡고 따뜻하게 마음을 전하는 거야. 그러면 미숙이는 슬그머니 눈을 감을 테고…….
후훗, 생각만 해도 괜히 여기저기 근질거리며 화사하게 미소 지을 미숙이 얼굴이 떠올랐다.
여기서 끝나면 다행인데 혹시 집요하게 요것조것 캐물으면, 지체하지 않고 북경에서 열리는 무술 박람회에 참가했다가 스폰서를 만났다고 둘러댈 요량이었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하는데, 뭐라 그러겠어? 일 안 하고 빈둥거리는 게 문제지, 후훗.
‘그래 이게 정답이다. 어차피 스폰서는 돈 문제만 해결되면 믿어 줄 테고.’
이렇게 하나둘 변명의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억지로 짜 맞추긴 했지만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라는 생각에 자신감이 솟았다.
돌이켜 보면, 비록 북경은 아니지만 고색창연한 중원에 갔었잖아. 그리고 무술 박람회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버라이어티한 무림에 간 것도 사실이고.
게다가 비록 스폰서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지지하는 사람도 만났으니까. 그 순간 방주와 소희의 얼굴이 불현듯 스쳤다.
이제 막 모퉁이를 돌았다. 곧 보게 될 미숙이를 생각하니 다시 한번 가슴이 벅찼다.
―짜잔!
언제나 모퉁이를 돌면 제일 먼저 보였던 어린이집 간판. 그런데 웬일인지 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용하는 눈을 의심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모퉁이를 돌기 전까지만 해도 예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런데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웬일인지 불길한 예감에 빠져들게 했다.
‘뭐야, 도대체 여긴 어디람? 이것저것 생각하다 길을 잘못 들었나?’
모퉁이를 돌아 다시 조금 전 오던 길로 나왔다. 대로변은 아직 낯이 익었다. 그런데 모퉁이만 돌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무림으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미숙이가 근무하는 어린이집은 3층짜리 독채였다.
그런데 지금 그 자리에 짓고 있는 건물은 얼핏 골격만 봐도 약 10층 이상은 돼 보인다. 그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불길한 예감은 극에 달했다.
그래서였을까, 무엇 하나 정확히 시선을 맞출 수 없었고, 행동도 부자연스러웠다. 길 가는 사람에게 어찌 된 영문인지 물어봐야 하는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용하의 모습이 심상찮아 보였던지, 길 가던 아주머니 하나가 먼저 말을 건넸다.
“이봐요, 총각! 어디 안 좋아요? 얼굴색이 창백한 게 어디 아픈 사람 같아.”
“아, 아닙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고 이마를 훔치는데, 땀이 흥건했다.
“그보다는 아주머니, 여기 혹시 어린이집 있지 않았습니까?”
“어린이집? 있었지. 그것도 아주 오래된. 우리 손주들 다 그 어린이집 다녔잖아.”
“아, 그러세요? 혹시 손주들이 몇 살이나 됐습니까?”
“우리 손주들? 둘 다 초등학생이지. 그런데 왜?”
“그럼 혹시 김미숙 선생 아세요?”
“김미숙 선생? 가만있자… 혹시 키가 크고 얼굴이 갸름한…….”
“네, 맞아요. 우리 미숙이!”
“우리 미숙이?”
“아, 아니… 우리 김미숙 선생님…….”
“그 선생님이 우리 둘째 손주 달님반 맡았었기 때문에 잘 알지. 그런데 왜요?”
“다름이 아니고, 제가 일 때문에 외국에 좀 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돌아와서 보니 이렇게 건물이 올라가고 있어서요.”
“에이, 여기뿐 아니야. 이 동네 신도시다 뭐다 해서 옛날 집들 다 없어졌어요. 보세요! 어디 옛날 집 한 채라도 남았나.”
그리고 보니 어린이집 찾는 데만 정신이 팔려 미처 보지 못했던 이면도로 양옆으로 신축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럼, 여기 있던 어린이집은요?”
“아마 건물이 다 지어지면 다시 들어올 거예요. 지금은 임시로 건너편 고목이 있는 동네 있잖아요? 거기로 옮겨 가서 운영하는 것 같던데…….”
비록 말꼬리를 흐리긴 했지만, 임시로 옮겨 간 위치를 구체적으로 말하는 거로 봐서, 그릇된 정보는 아닌 것 같았다.
“그 느티나무 보호수 있는 동네 말씀이죠?”
“보호수인가 뭔가는 몰라도. 거, 한 300년 이상 된 커다란 나무 말이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아주머니는 용하가 만족할 만한 정보를 준 것이다.
“감사합니다.”
조금 전 불길한 예감은 온데간데없고, 얼굴색이 화색이 돼, 넙죽 허리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한달음에 달려 조금 전 아주머니가 알려 준 보호수가 있는 동네로 향했다.
* * *
어느덧 보호수 나무 아래 섰다.
그곳에서 바라보니 비로소 어린이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조립식 건물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미숙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미숙아…….”
머릿속이 온통 미숙이 생각으로 가득 차 미리 염두에 두었던 변명거리들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순간 용하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깟 변명 따위 자기하고는 무관한 것들이라고.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건 미숙이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달음에 어린이집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제일 먼저 눈이 마주친 건 원생이었다.
용하에게는 눈앞의 원생이 한없이 귀여워 보였지만, 그 원생에게는 용하의 존재가 두려움을 주었는지, 삐죽거리며 경계하는 눈초리더니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원생의 울음소리가 커지자 선생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울고 있는 원생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어떻게 오셨죠?”
얼핏 야멸차게 들리는 말투였다.
“아, 네. 선생님이신가 보죠?”
“그런데요?”
“어느 반 담당하세요?”
“그건 알아서 뭐 하게요?”
“아, 저는 달님반 선생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달님반이요? 제가 달님반 맡고 있는데요!”
적잖이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달님반 맡고 계신 선생님은 김미숙 씨 아닌가요?”
조금 전 달님반 선생이라 자처한 여인에게서 얼핏 잘 모르겠다는 뉘앙스가 풍겼다.
하지만 곧 대답이 들려왔다.
“김미숙 선생임이시라면 제 전임인 거 같은데,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달님반 선생이 들어가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안에서 중년의 여인이 종종걸음치는 게 보였다. 중년의 여인은 다름 아닌 원장이었다.
“김미숙 선생 만나러 오셨다고요?”
“네, 원장님이시군요.”
“저 알아요?”
“그럼요, 소풍 때 몇 번 뵈었는데.”
“아, 검도 체육관 하신다는 그 관장님이신가 보군요? 미안해요. 난 얼굴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김미숙 선생이 우리 원생들 특기 교육으로 검도 좀 가르치면 어떻겠냐고 하면서 관장님 얘기 많이 했던 건 기억나네요.”
그 순간 용하는 저도 모르게 왈칵 복받쳤다. 하지만 눈물을 보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의 감정을 억눌렀다.
“아, 그랬었군요. 죄송하지만 우리 미숙이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설마 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나 보네요?”
그 말이 왠지 이상하게 들렸다. 꼭지를 잡아당긴다고나 할까?
“…….”
“김미숙 선생님 몇 달 전에 그만뒀는데…….”
원장의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만두다니, 그게 다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미숙이가 왜요?”
“아, 모르고 계셨나 보군요?”
“미숙이가 어린이집을 그만두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우리 미숙이는 어린이집 선생님을 천직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미숙이가 왜요?”
용하는 저도 모르게 절규하듯 물었다. 무림에서 몸에 밴 바로 그 목소리로.
그런 용하를 감당할 수 없었던지, 원장은 갑자기 얼굴색을 바꾸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옵니까?”
원장의 목소리가 차갑게 달라지자, 용하는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원장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김미숙 선생이 몇 달 전 갑자기 우울증을 앓더니, 끝내 공황장애에 분노조절장애 그리고 대인기피증까지, 한꺼번에 찾아온 3종 세트에 시달리길래, 갑자기 왜 저러나 했더니, 관장님이 범인이셨네.”
원장의 말꼬리는 비아냥이었다. 아니, 비난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우리 미숙이는…….”
그 말을 하는데 눈물이 솟구쳐 가슴 한구석이 멍든 것처럼 아팠다.
원장은 미심쩍은 눈으로 흘깃거리며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꾸역꾸역 말했다.
“정확한 건 아닌데, 파주에 있는 요양병원에 한번 가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