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53
53화
‘원래 병원이란 데가 이런 곳이었나?’
대기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잘 꾸며진 곳이었다. 상류층이나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공간.
그런 공간에 익숙하지 않은 용하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왠지 구금당한 기분마저 들 만큼.
‘아닐 거야. 이 병원이 좀 유별난 걸 거야. 그래, 다른 병원은 절대 이러지 않아.’
애써 다독거리며 스스로 지금의 어색한 분위기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텔레비전에서 보면 위증 환자는 병실에서 만나고, 경증 환자는 병동 안팎에서 산책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만나고는 하잖아.’
예상도 못 했던 상황으로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한편 불안하기도 했다. 갑자기 허리가 꼿꼿하게 세워졌다.
아무리 좋은 대접이라 해도 더는 편히 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응이 안 되어서였다.
‘괜히 구라까서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거 아냐? 공무원 사칭은 반의사불벌죄라던데.’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것 같아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듯했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한두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이씨!
지금 이런 순간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으라면, 딱 드라마의 한 장면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릴 것으로 생각되었다.
시간이 멈춰 버린 세상이거나 아님, 매우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랄까? 그러니까 그게, 동영상을 느리게 돌려 긴장감을 한층 고조시키는 것 같은 기분!
“웬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오는 거야?”
초 단위로 흐르는 시간 앞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였다. 급기야 VIP 대기실 문이 와당탕 열렸다.
그러고는 봇물 터지듯 일단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음, 끝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인가.’
문 앞에 병원장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중장년의 사내와 그 뒤로 역시 나잇살이 좀 느껴지는 의사 차림의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서 있었다.
하지만 정작 기다리는 미숙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왜 미숙이는 보이지 않고 불청객들만 잔뜩 몰려온 거야?’
저도 모르게 미간이 좁아졌다. 불편한 감정이 은연중에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병원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그런 용하의 감정을 칼같이 감지해냈다.
역시 그냥 병원장 된 사람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도대체 뭣들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으라고 여러분들 월급 주는 겁니까?”
병원장은 괜히 여직원들을 나무랐다. 아무 죄 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게 버릇이라도 된 사람처럼. 병원장의 말 한마디에 다들 벌벌 떠는 꼴이 보기조차 안쓰러울 정도였다. 바로 그 순간 처음 이 병원에 왔을 때 나를 대했던 여직원들의 표정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쳤다.
‘음, 이 병원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되는군.’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충 정리가 되었다.
일단 미숙이가 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상황은 없다. 하지만 그동안 세상을 살아온 경험에 비춰봤을 때, 세상이 내게 그렇게 관대한 편은 아니라고 용하는 결론지었다. 그러니 그런 기대는 애초에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단지 지금 이 총체적 난국의 순간을 어떻게 모면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을 뿐.
‘미뤄 짐작하건대, 적어도 이 병원에 미숙이가 없는 건 확실하다. 그걸 알면서 여기서 시간 낭비하고 있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적어도 지금 용하가 이 병원에서, 이렇게 후한 대접을 받는 이유가 미숙이와는 무관하다는 말이다.
병원 전체가 난리가 난 이유도 미숙이 때문이 아니라, 조금 전 용하가 보건복지부에서 나왔다고 구라친 것 때문이다.
그래서 병원장을 비롯해 저렇게 높은 사람들이 용하를 보겠다고 앞다퉈 온 것이다.
‘이제 어떡하지?’
아무리 감추려 해도 미간이 좁아지며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걸 감출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보건복지부에서 나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병원장으로 보이는 자는 울림통이 제법 큰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그렇…습니다만…….”
용하가 어정쩡하게 대답하자,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좀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병원장으로 보이는 자가 또 질문을 던졌다. 의구심이 엿보이는 말투였다.
“그런데 저희 병원엔 무슨 일로…….”
“그건 알 거 없고, 오늘은 그냥 조만간 정식으로 한번 찾아뵙게 될 거라는 안내 정도 하러 왔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렇게 묻는 분은 누구십니까?”
“아 네, 저는 본 요양병원의 원장으로 있는 강진상이라고 합니다.”
“아, 원장님이셨구나. 저는 김용하라고 합니다.”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충 이렇게 통성명까지 마쳤다. 치밀하게 준비되지 않은 탓에 본명을 말하고 말았다.
‘젠장, 이럴 땐 보통 미리 지금 보건복지부 담당자 이름 정도는 알아 와서 그 이름을 대야 하는 거 아냐.’
난처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용하의 모습에 병원장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아, 김용하 선생님! 그런데 보건복지부 어느 분과 일하십니까? 제가 웬만한 관계자님들은 다 아는데, 처음 뵙는 분 같아서…….”
얼핏 말꼬리를 흐리는 것으로 보아 떠보려 드는 게 분명했다. 그런 뻔한 수작에 넘어갈 용하가 아니었다. 무림의 세계를 다녀오기 전 같으면 혹시 모를까.
“아, 그러세요? 이렇게 촌구석 작은 병원의 원장님께서 어떻게 대한민국 행정부서 중 하나인 보건복지부를 다 아는 것처럼 말씀하실까? 그리고 그렇게 보건복지부를 속속들이 아신다는 분이 왜 나는 모르는 걸까?”
너무 실감 나게 비아냥을 떨어서인지 병원장은 자세를 고쳐 앉는 건 물론이고 목소리까지 달라졌다.
“혹 제 말에 무슨 오해라도 있으셨는지요.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 아니니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병원장이 하는 말 따위 귓등으로 들었다.
‘자꾸 머리 굴리는 놈에겐 궁지로 몰아붙이는 게 약이다. 생각할 겨를을 주지 말아야 얌전해지는 법. 숨도 못 쉴 만큼 옥죄어야 잡념이 사라지고 머리가 맑아지지.’
용하는 지체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다.
“자,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이름들 가운데 아는 사람 있으면 대답해 보시오.”
그러고는 거침없이 아무 이름이나 마구 불러 댔다. 그러자 조금 전 보건복지부에 대해 꿰고 있는 거처럼 으름장을 놓았던 병원장이 난색이 되었다.
‘앗싸, 걸려들었어!’
용하는 내심 쾌재를 질렀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 득의양양해서 다그쳤다.
“뭐하고 계세요? 아직 아는 사람이 없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보건복지부 관계자들 다 아는 것처럼 굴더니,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셨나?”
그제야 병원장은 자세를 낮추며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그 말투가 적잖이 애원하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몰라보고 죽을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러게 왜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고 그러십니까?”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보기엔 원장님은 그게 문제입니다. 그거 다 버릇이거든요. 몹시 나쁜 버릇!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네, 선생님.”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영업허가 받아서 개원한 크고 작은 병원들 말입니다. 그 사람들과 관련된 비리나 부패 척결 말입니다. 그거 내 결재 없이는 단 한 건도 집행할 수 없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그 말 한마디에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세를 낮추며 엄살을 떨었다. 역시 잘난 놈들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다는 말이 통한 모양이라고 용하는 생각했다. 분명 귀가 따가웠을 것이다.
갑자기 찾아와 병원의 평화를 깨뜨린 용하가 죽이고 싶도록 밉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색을 하나도 드러내지 않는 게, 역시 고수다웠다. 능구렁이 같으니.
‘그렇지! 병원장?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지. 함께 올라간 동료 중에 가장 교활한 놈이 병원장 된다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교활한 놈들은 원래 구린 데가 많은 법!’
한눈에 보기에도 병원장이라는 작자, 제대로 걸려든 듯했다.
“오늘은 공적인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니, 얼굴들 펴십시오.”
그 말 한마디에 다들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아울러 병원 사정에 대해서도 알려고 들지 않을 것이니, 환자 하나만 찾아주시오.”
“환자?”
병원장의 얼굴은 난관에 부딪혔던 사람이 돌파구라도 찾은 듯한 표정이었다.
“애들아! 너희들은 대체 뭣들을 하는 거니? 여기 보건복지부에서 왕림하신 나랏일 하시는 분께서 환자 한 분을 찾는다고 하시잖니. 협조 안 하고 뭣들 하고 있어.”
병원장의 성화에 여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VIP 대기실 앞으로 종종걸음쳤다.
“선생님. 환자분 존함이…….”
“김미숙이요. 아까도 말씀드렸었는데.”
“아네, 김 미 字, 숙 字, 쓰시는 환자분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선생님. 제가 바로 찾아서 대령하겠습니다.”
일이 너무 술술 풀리니까 오히려 불안했다. 항상 이렇게 잘 풀리다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데서 빵 터지고는 했다. 이럴 때일수록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심정으로, 매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야! 너희들 뭐 하고 있니? 빨리 김미숙 환자님 안 찾고.”
병원장이란 작자는 거센 파도에 휩싸인 범선 선장이라도 된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불똥은 여직원들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과장급 중견 의사들에게까지 튀고 말았다.
“야! 너희들은 뭐 하고 있어. 내 말 안 들려?”
병원장의 한마디에 과장급 의사들도 허둥지둥 차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직원들이 찾아낸 미숙이와 의사들이 찾아낸 미숙이의 자료가 취합된 파일이 병원장에게 건네졌다. 병원장은 빠르게 파일을 훑어보고는 어느 정도 마음에 들었던지, 우쭐한 기색으로 용하에게 건넸다.
파일 두께로 보아 미숙이란 이름의 환자가 얼핏 수십 명은 돼 보였다.
‘일단 최대한 범위를 좁히는 데 주력하자.’
척! 파일을 펼친 용하는 연령란에 시선을 꽂았다. 그다음은 성별. 그리고 이름. 이런 순으로 파일을 훑었다. 30대 여성 김미숙.
30대 여성 김미숙은 총 여섯 명이었다.
“형광펜 좀 주시겠습니까?”
그 짧은 한마디에 여직원들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했고, 서너 명의 손으로 옮겨진 형광펜이 병원장의 손을 거쳐 이제 막 내 손에 건네졌다. 서둘러 여섯 명의 김미숙이란 이름이 적힌 칸에 형광펜으로 줄을 그었다. 그리고 파일을 다시 병원장에게 건넸다.
“그 형광펜으로 표시된 사람들 말입니다. 한 군데다가 좀 모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어디 한 군데뿐이겠습니까. 열 군데라도 선생님께서 필요하다면 해드려야죠.”
아부도 타고나야 해 먹는다더니, 이 작자 전형적인 아부꾼이다.
시간이 대략 이십여 분쯤 흘렀다. 병원장이 다시 VIP 대기실로 들어왔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역시 급한 쪽은 병원장이 아닌, 용하였다.
“어찌 됐습니까?”
“네. 일단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모아 놨는데, 선생님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아부가 몸에 켜켜이 밴 놈이다. 약점만 제대로 알면 부려 먹기 좋은 놈. 홋!
“일단 갑시다.”
용하는 성큼 발을 내디뎌 앞장서 나가려다 멈칫하더니 병원장에게 앞자리를 양보했다. 어차피 안내할 사람은 병원장이니까. 그것도 아주 귀한 보건복지부 공무원! 홋.
병원장이 앞장서고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마음은 누구보다 조급했지만, 그렇다고 서두르다 가볍게 보여서는 안 되는 순간이다. 마음을 추스르느라 속으로 왈츠의 리듬을 읊조렸다.
―쿵 작작~ 쿵 작작~ 쿵 작작~ 쿵 작작~
조금 전보다 걸음걸이도 한결 부드러워졌고, 마음도 훨씬 안정됐다. 그래서인지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하자.
저만치 통유리가 쳐진 곳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광경이 보였다. 길게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곳이었다. 분명 그곳에 미숙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조바심이 생겼다.
마음 같으면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경거망동은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한번 왈츠의 선율을 읊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침착하자… 이제 거의 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