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55
55화
“제 앞을 막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병원이 떠나갈 듯 소리쳤다. 하지만 병원장은 묵묵히 바라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눈앞에 미숙이를 두고도 등을 돌려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용하가 있는 곳은 미숙이가 있는 병실이 아닌 병원장실이다.
“원장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미숙이를 못 만나게 하는 겁니까? 미숙이가 남입니까? 미숙이는 제 약혼녀란 말입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미숙이를 겨우 만났지만 눈 한 번 마주하지 못한 채 생면부지였던 병원장이란 자와 입씨름이나 하고 있어야 하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용하를 대하는 원장의 심정 또한 착잡했다. 한참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던 병원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음, 답답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 김미숙 환자를 만난다는 건… 음, 환자에게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음, 그래서 그랬습니다.”
병원장은 자신의 착잡한 심정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이 짧은 몇 마디를 하는 것조차 힘에 겹다는 듯 몇 번에 나눠 가며 겨우 말을 이어 갔다.
그런 순간에도 용하의 머릿속엔 몹쓸 잡념이 스쳤다.
‘이 인간 좀 보게! 왜 나보다 지가 더 미숙이를 위하는 것처럼 구는 거야? 재수 없게…….’
말도 안 되는 현실 앞에 자기도 모르게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걸 겨우 억눌렀다.
용하는 최대한 차분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자기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차분하게 설명했다.
“도움이 안 된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미숙이가 저렇게 된 게 다 저 때문 아닙니까? 병의 원인이 저라면 제가 오히려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왜…….”
용하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병원장은 그의 말문을 막았다.
“무슨 말씀하는지 잘 압니다.”
“그런데 왜 못 만나게 하는 겁니까?”
“지금까지 진행해 온 치료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해할 수 있게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진행해 온 치료 때문이라니. 대체 어떤 치료를 해 왔길래.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원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원장이 대답하든 안 하든 일단 물어보려고 입을 벌리려고 할 때였다.
“그동안 환자 보호자와 나눈 문진을 토대로, 김미숙 씨를 환자로 만든 그 누군가라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다시 김미숙 환자에게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환자의 기억 속에 있는 누군가를 지우는 치료를 해 왔습니다.”
병원장의 말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용하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다 이해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으니…….”
용하가 혼잣말처럼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병원장의 눈빛이 달라졌다.
지금 용하를 직시하는 병원장의 눈빛은 ‘음, 바로 너였구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 그대로 입을 뗐다.
“아무튼 저는 환자가 하루빨리 원인 제공자를 잊는 게 치료에 도움이 될 거로 판단했습니다. 대체로 심인성 질환을 앓는 환자들 치료가 그렇습니다.”
용하는 병원장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원장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걸 어떻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까?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현명한 처사인지는 본인이 찾아야지요.”
얼핏 야멸차게 들렸지만, 곧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현명하게 처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원장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셔야 합니다.”
“좋아요. 제가 도울 일이 있다고 칩시다. 제게 그런 의무가 있습니까?”
첫 번째 요양병원의 병원장보다는 순수해 보였으며 환자를 대함에 있어 긍휼함이 느껴져 믿음이 갔다.
“제가 어떻게 하면 원장님께서 의무감을 느끼겠습니까?”
지나치게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부담을 느꼈는지 원장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죽으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하겠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고자 하지만 망설이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주저하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환자 치료에 필요하다면 사생활도 숨김없이 말해 줄 수 있겠습니까?”
미숙이의 치료를 위한 것이라면 그리 어려운 요구 사항도 아니었다. 하지만 용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미숙이가 저 지경이 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올 게 불을 보듯 뻔한데, 그렇게 되면 무림의 세계로 차원 이동했다가 돌아온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
‘안 돼, 안 돼!’
용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둘렀다.
“아무래도 어렵겠지요?”
원장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목소리로 보아 그 역시 침통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고…….”
또다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무도인의 정신으로 강직하게 살아온 용하는 원장의 요구에 섣불리 대답했다가 본의 아니게 비굴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왜요? 어렵겠습니까?”
“아뇨! 어렵다기보다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이 부족해서요.”
“김미숙 환자의 병은 감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감정이 심하게 뒤틀려 공황장애에 빠졌고, 공황장애를 겪으니 한번 화가 나면 통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분노조절장애가 심해지면 대인관계를 맺는 게 어려워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죠.”
원장의 말은 한마디로, 이 모든 게 개인적인 일에서 비롯된 것이니, 사생활까지도 숨김없이 말해 달라, 뭐 그런 요구였다.
“그럼 혹시, 아까 환자 치료에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말해 줄 수 있느냐고 했던 게, 조금 전 말씀하신 공황장애라는 병의 특성 때문이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나마 희망적인 건, 김미숙 환자의 경우 공황장애만 잘 치료되면 나머지 질환은 자연스럽게 나을 거라는 겁니다.”
“분노조절장애나 대인기피증 말입니까?”
원장은 딱히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등을 돌렸다.
원장이란 자의 성품이 느껴졌다. 용하는 미숙이와 저를 만나지 않게 했던 이유도 이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미숙이의 뒤틀린 감정이 풀리기도 전에 용하와 만난다면, 괜히 감정이 더 안 좋아지지는 않을까, 아마도 그걸 우려했을 것이다.
용하는 일단 검도 체육관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동안,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연인을 그리워하며 우울증에 시달리고, 공황장애에 시달렸을 미숙이를 생각했다. 그러자 가슴이 미어졌다.
검도 체육관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사무실 책상 위에 잔뜩 쌓여 있는 각종 고지서를 보는 순간 숨이 탁 막혔다.
가진 것은 없는데 내야 할 것투성이라는 현실이 21세기로 돌아왔음을 실감하게 했다.
“무엇부터 해야 하지?”
이게 무슨 차이일까? 무림에서는 그렇게 잘 돌아가던 머리가 21세기에선 꽉 막혀 버렸으니.
그날 밤, 용하는 무림과 21세기가 무슨 차이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다 새벽이 다 돼서야 해답을 찾았다.
무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준 용두방주였고, 다른 하나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문명의 차이였다.
비록 후기인생을 전전한 악성 루저였지만, 21세기 첨단 과학 문명 속에서 살던 용하를 14세기 무림이 무슨 수로 따라올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다.
절대 그럴 리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그립다… 14세기… 고색창연한 무림의 세계…….’
동이 트는지 창문이 온통 파란색이었다.
책상머리에 앉아 잠시 붙였던 눈이 번쩍 떠졌다.
“오늘은 포천으로 가자.”
밤을 꼬박 새워 고민한 끝에 검도 체육관을 살릴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 * *
수도권 제1 순환 고속도로.
그 위를 얼마나 달렸을까, 눈앞에 사패산터널이 보였다.
용하는 저도 모르게 가속기에 올려져 있던 발을 들었다.
그러자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며 옆 차로의 다른 차들이 앞질러 가는 게 보였다. 별안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100km도 채 안 되는 속도로 사패산터널 속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바로 그 자리를 지나고 있었다.
광채에 휘감겼던 바로 그 자리. 신비한 경험, 차원 이동을 하게 해준.
‘이쯤이었지?’
순식간에 그 자리를 지나쳤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사패산터널을 빠져나가 호원 나들목이 있는 램프로 차를 올렸다.
예전 같으면 의정부 나들목으로 나가서 축석고개를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도로 사정이 좋아져 더 빨리 갈 수 있었다.
양주를 지날 즈음 갓길에 차를 잠시 세웠다. 포천으로 가겠다는 급한 마음에 무조건 차를 움직이느라 미처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아서였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검색란에 [포천 주금산 인공사]라고 입력하니, 결과는 없다고 나왔다.
“뭐야? 결과가 없다니…….”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고 [포천시 주금산]이라고 다시 입력했다.
검색 중이라는 아이콘이 한참을 돌더니, 비로소 화면을 띄워주었다.
“음, 주금산! 그래, 일단 주금산으로 가자.”
용하는 차를 움직이려고 왼쪽 사이드미러를 보았다. 바로 옆 차로 뒤쪽 저만치에서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오는 차들이 보였다.
자동차 전용도로여서 멈췄던 차를 쉽게 다시 본궤도로 진입시킬 수가 없었다.
한참을 방향지시등을 켠 채 기다리고 나서야 겨우 진입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어렵게 본궤도에 올라 얼마 달리지 않았을 때였다.
[경로를 다시 탐색합니다! 경로를 다시 탐색합니다!]내비게이션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뭐야?”
딱히 의심의 여지는 없었지만, 내비게이션 화면에 시선을 보냈을 때였다.
현 위치와 도착지의 GPS 궤적이 3시 방향을 가리켰다.
“뭐야, 왜 동쪽을 가리키는 거지?”
용하는 내비게이션 화면을 빠르게 터치해 도착지 쪽으로 움직였다.
궤적의 끝에 보이는 주금산은 포천과 남양주의 경계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순 난감했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포천, 포천, 해서 거기에만 꽂혀서 북쪽으로만 달렸네! 그려.”
그 순간부터 고집을 버리고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차를 몰았다. 그 덕분에 생각보다 훨씬 빨리 주금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때로는 자기 자신을 잠시 잊는 게 살기 수월할 때가 있다는 말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등산로 초입에 차를 주차하고 트렁크에서 등산 장비를 꺼냈다.
미리 챙겨 온 등산 장비로 산을 오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주금산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한눈에 보기에도 생각했던 것보다 큰 산이었다.
주금산은 높이가 813미터로 포천과 남양주 그리고 가평에 걸쳐 분포한 수도권에 있는 산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었다.
다행이었던 건, 산 높이나 규모와는 달리, 등산하기엔 편한 산이란 사실이었다. 산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저도 모르게 조였던 긴장감이 풀리며 걱정거리가 밀려왔다.
“내가 인공 형님을 너무 얕잡아 봤네! 그 형님이 주지라는 말에 작은 절간을 떠올렸고, 그래서인지 작은 산을 연상했는데……. 그나저나 이렇게 큰 산에서 인공사를 찾을 수나 있으려나 모르겠네.”
등산로 군데군데 이정표가 있었지만, [인공사]라는 세 글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설마 이 노인네가 스님인 척하려고 구라친 건 아니겠지?”
쓸데없는 잡념은 조금 전 걱정거리를 두려움으로 바꿔놓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산을 오르다 보니, 어느 순간 간간이 보이던 등산객들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다들 어디로 간 거지?”
그때까지만 해도 길을 잃었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등산로에서 살짝 벗어났다고만 생각했다.
설령 길을 잃었다 해도 어차피 목적지는 주금산 정상이니, 하늘을 향해 난 길을 무작정 오르기만 하면 그만이다.
2~3km만 오르면 주금산 정상이라는 이정표를 본 지 반나절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도 용하는 숲이 우거진 오르막길을 헤매고 있다.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데 늘 새로운 길이다.
“이 정도 했으면 같은 길이라도 한 번쯤 나타났어야 하는 거 아냐?”
또다시 불안감이 엄습했다.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또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던 거야. 다 알면서 어처구니없게도 말이다.”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고개를 떨구었다. 때늦은 후회였다.
“이제 어떡하지?”
바로 그때였다. 미처 절망할 틈도 주지 않고 숲속 저편에서 옅은 인기척이 들렸다.